좁은 문에서 좁게 살기
마태복음 7장 13, 14절
서론
13절에, 좁은 문(門)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문(門)은 출입구로 어느 문으로 들어가느냐? 에 따라 왕인가, 신하인가, 일반 백성인가, 신분을 드러냅니다. 바티칸에는 교황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고 대형교회도 담임목사만 이용하는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전용 문으로 들어섰다는 것은 그가 누구인가를 보여줍니다.
공자는, 군자(君子) 대로행(大路行)이라, 대인은 큰 길을 걸어야 한다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큰 대문(大門)이 아니라 소문(小門)입니다.
문(門)을 놓고 보면 네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1.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사는 사람
이런 분들, 세상 편하게 살아요. 책임감도 없고 남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건국정신은 홍익인간입니다. 남을 유익되게 함. 이런 사람은 홍해인간,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냥 넓은 문에서 하고 싶은 대로 어린애처럼 철없이 마음껏 넓게 삽니다.
세상에는 너무 쉽게 넓은 문 넓은 길 인생이 많습니다. 일확천금 누리고 도박이나 로또… 사기 방법으로 편하게 넓은 길을 가려는 공짜인생 책임 없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작년 6월, 흥사단이 1만 명 초중고생들의 정직지수를 조사했더니 32%가“10억 생긴다면 죄를 짓고 1년 동안 감옥에 가도 괜찮다”응답했습니다. 청소년 3명중 1명은 돈이라면 1년 정도는 감옥도 괜찮다는 것입니다. 이런 청소년들은 재미로 거짓내용이나 악성댓글을 올린다고 응답했습니다. 입시위주의 교육방식으로 도덕의식이 낮아지고 황폐화되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어떤 삶을 살겠어요? 많이 배우고 누렸으면 자기에게는 엄격하고 좁은 길로, 검소하고 약자 배려하고… 그야말로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감당해야 하는데 넓은 문에서 멋대로 넓은 길 살아갑니다.
인생이란 가치가 있잖아요? 삶은 왕복도 아니고 딱 한 번 1회성입니다! 주어진 시간 얼마인지 몰라요! 이런 인생을 넓게 편하게 자기밖에 위할 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넓은 문에서 넓은 길을 가는 유아기적 존재들입니다. 끝은 멸망의 길입니다.
2. 넓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사는 사람
세상에 유익한 사람입니다. 자선을 베풀며 착하게 사는 홍익인간입니다. 쓰고 싶은 것 아끼고 남 위하느라 불편한 길 갑니다. 남 구하려다 죽습니다. 자기도 빠듯하게 살면서 남을 돕습니다. 정말 훌륭한 사람입니다. 세상은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굴러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지를 못했어요. 넓은 문은 아직은 구원을 받지 못한 세계입니다. 좋은 일은 많이 하고 선하게 착하게 사는데 내세를 위한 저축이 없어요. 이런 사람들은 살기는 좁은 길로 잘 사는데 좁은 문으로 입문하지 못한 거예요. 사람들의 칭송은 받지만 좁은 문을 열고 들어서지 못했기에 구원이 없습니다. 이런 선행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 결과를 보는 우리 마음이 참 아쉽습니다. 주변에 이런 사람들 많습니다.
이렇게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좁은 문으로 많이 들어와야 해요! 그래야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가 높아지고 교회는 빛으로 세상에 나타날 수 있습니다.
넓은 문에서 넓게 살거나 좁게 살기! 둘 다 좁은 문으로 들어서지 못했습니다. 나만을 위한 넓은 길로 살거나 이타정신으로 좁은 길 살아 삶이 빛나거나 죽으면 같습니다. 같은 문, 같은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내세 문은 같은 문이기에 그 문으로 들어가는 내세의 세계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착한 사람들 들으면 팔짝 뛸 말이지만 성경의 가르침은 둘 다 같은 세계로 갑니다. 들어가는 문이 같기에 당연히 같은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좁은 문에서 넓게 사는 사람
예수님을 믿는 것은 좁은 문으로, 예수님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일본은 기독교인 0.5%, 제주도 븍음화율 5%미만, 대한민국 기독교신자가 20%, 얼마나 좁은 문입니까?
이렇게 좁은 문, 예수님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주일성수 십일조생활… 기도하고 전도하고 술 담배 삼가고… 좁은 문입니다. 값진 것은 문이 좁아요. 서울대학 문이 좁습니다. 판검사… 공무원… 삼성… 재벌기업 취업문 좁습니다. 문이 좁다는 것은 좋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온갖 수고와 노력해서 좁은 문을 열고 들어왔어도 서울대학생들 공부하지 않으면 탈락합니다. 삼성맨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좁은 문 뚫은 것, 별 의미 없습니다. 근래 육사생도들, 사법연수원생, 명문대학교 의대생들 일탈을 보세요! 좁은 문으로 들어왔지만 여생도, 같은 사법연수생, 여학생 성추행으로 고발당하고 망신당하고, 자격 박탈당했습니다. 좁은 문으로는 들어왔지만 제어하지 못하고 넓은 길 본능으로 살다 꿈이 깨진 거예요.
우리가 교회 다니고 예수님 믿는 것은 좁은 문 입문(入門)입니다. 좁은 문의 세상은 14절, 길이 협착합니다. 협착(狹窄)은, 차지한 자리가 매우 좁다, 처한 사정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뜻입니다. 넓은 대로(大路)가 아니라 가시밭 같은 좁은 길, 고난의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보통 좁은 문이 아닙니다. 좁은 문은, 문이 원체 작아서 발견이 어렵고 초라한 문입니다. 문안으로 들어가면 유익도 인기도 없습니다. 들어가면 큰 길이 아니라 계속 좁고 또 좁아지는 문입니다. 그러니 힘든 길입니다.
예수님 사역은 대단합니다. 가르침도 좋고 보리떡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 먹입니다. 물로 최고 포도주 만듭니다. 죽은 사람 살려내고 그물이 찢어질 만큼 고기가 잡힙니다. 왕이 되면 한 자리씩 합니다. 예수님 따르면 다 잘 되는 줄 알았습니다. 모든 게 공짜! 병 고침도 공짜, 먹을 것도 공짜… 신나지요, 가는 곳마다 환영입니다. 뭐라도 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유대인 동족들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좁은 문으로 들어왔어요. 아주 잘했지요!
지내다보니 예수님 따르는 길이 너무 힘들어요! 번영과 축복이 예수님 가르침의 중심이 아닙니다. 십자가 공로로 죄사함의 은총을 누리고 부활로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얻었으면 예수님처럼 살라! 요구사항이 너무 엄격합니다, 하지 말라는 것! 하라는 요구가 너무 많아요.
군중들은 그렇게 살기 힘들어 다들 떠났습니다. 믿음의 길은 행복이요 축복의 대로(大路)다! 이렇게 광고해야 하는데 내 길은 좁은 문, 좁은 길이라 했으니 누가 따르겠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는 모두 물러가고 다음부터는 예수와 함께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너희도 가려느냐?”(너희들도 넓은 길로 가려느냐?) 물으시자 베드로가 이런 대답을 합니다.
“영생의 말씀이 여기에 계시매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68)
지금 우리는 어때요? 믿음의 길은 힘들고 어려워야 제대로 된 길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내 행동반경이 너무 쉬우면 뭔가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편한 것은 세속화된 것입니다. 같은 색깔이 되어버리니 주목받을 것도 없고 핍박도 없습니다. 남이 마실 때 마시고 남이 부패할 때 부패해 버리니 어려운 것이 없습니다. 동성애 함께 주장하고 신권보다 인권을 더 중요시 여기고… 기독교 욕할 때 같이 욕하고… 그러면 편합니다.
로마가톨릭이 그래요,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왔을 때 엄청 핍박 받았습니다. 특히 제사문제로 핍박 받고 3대(代)가 멸족 당했습니다. 지금은 어때요? 모든 걸 다 허용했습니다. 제사도 해라 술도 마셔라 담배도 해라… 너무 편해요. 그러니 천주교가 엄청 부흥했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오기까지는 잘 했는데… 좁은 문으로 들어오면 각오를 단단히 하고 좁은 길로 가야하는데 교회 다니면서 세상길로 걸어가고 세상 방법으로 살아버립니다. 돈을 버는 방법도 인간성도 같습니다. 좁은 문에서 넓은 길로 살아가는 세속화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한국교회가 1천만 명 이하로 떨어진다고 염려합니다. 그게 뭐 그렇게 문제입니까? 문제는 좁은 문에서 넓은 길로 살아가는 교인들로 교회가 부흥되는 걸 두려워하고 걱정해야 합니다. 교회가 알곡신자들을 만들어 내야지 가라지 신자들로 가득 채운다고 부흥일까요?
4.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에서 살기
좁은 문으로 들어왔으면 좁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길,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부인이 자기포기입니다. 부인(否認)은, 아니다! 그게 좋은 것이 아니다! 그게 영생의 길이 아니다! 나를 살리는 길이 아니다! 아니다! 이걸 매일매일, 순간순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나를 좁은 길로 계속 나가도록 채찍질이 됩니다.
구약에, 팔레스타인 경내 요단계곡은 세계 최고의 계곡입니다. 요단에서 이집트-에티오피아로 이어지는데 얼마나 큰지 인공위성에서 사진 찍으면 만리장성(萬里長城)과 요단계곡이 보일 정도로 엄청난 계곡입니다. 계곡 위에는 산이 아니고 넓은 평지인 골란고원이 한없이 펼쳐지는 신비한 땅입니다.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대로(大路)가 나 있습니다.
요르단,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쪽의 길을 왕의 대로(大路), 소위 팔레스타인의 실크로드-비단길입니다. 도로가 좋아서 편하고 장사꾼들이 애용합니다. 황금 길이지요.
반대쪽의 길은 아브라함과 족장들이 다녔다고 족장로(路)라고 합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간 개척의 길이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가던 외로움의 길입니다. 요셉이 형들 음모로 애굽으로 가던 눈물의 길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족장로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족장로는 높습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살았는데 해발 1200m입니다. 대관령이 800m, 예루살렘이 800m, 베들레헴도 족장로에 있습니다. 족장들은 다 높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엘리 제사장 제단이 있던 실로도 해발 800m, 사무엘 집도 족장로에 있고 그 길로 다녔습니다.
이스라엘은 산의 민족입니다. 산은 하나님과 가까운 곳으로 기도가 있고 제단이 있고 영혼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는 곳입니다. 평야는 조건이 훨씬 좋지만 아래로 내려갈 때는 언제나 시험이 왔습니다.
아브라함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망신당하고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세겜땅에 내려가 살다 딸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높은 지대를 선호했습니다. 고산지대는는 불편합니다. 춥습니다. 그러나 족장들은 이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고 불편했지만 믿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이곳에는 영적인 것들이 먼저고 정신적인 깨끗함이 있었습니다.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영적으로는 깊고 풍부했습니다. 산지에서 장막치고 살았지만 누구보다도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족장로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것을 경계로 아래로 하산하지 않았습니다. 생활의 커트라인을 정하고 불편해도 참고 지낸 것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온갖 불편을 감수합니다. 대표적인 것이 안식일 준수요 십의 일조 이조 때로는 십의 5조를 바칩니다. 자기들 언어와 복장 예배의식을 고수합니다. 힘들어도 세상과 평준화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준화하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지켜주신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다니는 길이 따로 있습니다. 십자가 길입니다. 십자가 길은 왕의 대로와는 달라요. 왕의 대로는 넓은 길, 성공의 길, 유행의 길입니다. 그 사는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하향평준화입니다. 이런 길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면 세상에서는 불편하고 힘들어야 합니다. 남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작은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비난 받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게 당연합니다. 우리가 들어온 문(門) 자체가 좁고, 좁은 문을 통해 들어왔으면 큰 길이 나타나야 하는데 갈수록 길 자체가 협착합니다. 참 힘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서 떠납니다. 편한 길로! 편한 길은 편한 라이프스타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안에도 보수적 교단보다 진보적 교단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진보교단들은 주일성수도 강조하지 않고 주초(酒炒)문제도 강제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갑니다. 그런 사람들치고 성경적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 많지 않습니다. 편하나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노벨문학상 작가 앙드레 지드의 <좁은문> 소설이 있습니다. 주인공 제롬은 여름휴가를 시골에서 보내다 알리사와 사랑에 빠집니다. 알리사는 엄마가 바람나 떠났기에 자기에게도 그런 피가 흐르고 있음을 두려워한 나머지 엄격한 종교심으로 자신을 다스립니다. 제롬과 사랑에 빠지지만 제롬은 신에 대한 관심이 없습니다.
자기 사랑이 오히려 제롬의 영혼을 위태롭게 만든다고 확신하고 제롬의 영혼 구원을 위해 종적을 감추고 슬픈 사랑으로 끝납니다. 때로는 인생의 아름다움까지도 억눌러야 종교적 구원의 길을 이를 수 있다는 주제입니다.
청교도적 정신에 입각한 소설이어서 지나친 면은 있지만 믿음을 위해서는 믿음에 방해되는 사랑은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 소설입니다. 생명의 길은 좁은 길입니다. 불편하고 힘든 길입니다. 울면서 가야하고 희생하면서 가야하고 양보하면서 가야합니다. 그래도 그 끝에는 승리의 길이요 영혼이 안식할 길이요 자손만대가 구원 받을 족장로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길을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문제로 교육문제로 자존심 문제로 족장로의 길 십자가의 도(道)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결론
서울대학교 성악과에 두 성악 수재가 있었습니다. 같은 예고를 다닌 소년과 소녀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각종 콩쿠르에서 상(賞)을 휩쓸었습니다. 라이벌로 불렸습니다. 그녀는 서울대 성악과 실기수석으로 입학했고 그는 실기수석으로 졸업했습니다. 30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세계인이 주목하는 올림픽 무대에 서고 그는 시골교회에서 노래합니다. 그녀는 소프라노 조수미, 그는 테너 박종호입니다.
조수미가 전설적 지휘자 카라얀을 만나 오페라 무대를 준비할 때, 박종호는 가난한 학생을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그녀가 이탈리아 나폴리 국제콩쿠르에 나갈 때, 그는 국내 복음성가 경연대회를 준비했습니다.
박종호는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하나님 노래를 부르라는 명령을 따랐습니다. 박종호는 영혼을 위한 찬양을 부르기를 원했습니다. 미국에 있을 때, 50개주 한인교회를 다 돌기로 작정했고 교회주소록을 샀습니다.
한번은 뉴멕시코주 앨버커키 한인교회에 갔습니다. 집회 후 담임 목사는 알라모고도에 있는 지교회에도 찬양사역을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교인은 두세 명. 하나님께 약속한 바가 있어서 그 교회로 가는 동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하나님, 제가 두세 명을 위해 5시간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씩 차 타고 가야 합니까?’
급기야 화를 냈습니다.
‘난 못 가요. 천하의 박종호가 그런 데까진 못 갑니다. 그런 데는 하나님이 가세요. 하나님이 노래 못하시면 배워서 가세요.’
이 순간 하나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야, 너 잘 났다. 네가 아무리 큰 무대 서고 싶어 해도 넌 복음성가 가수야. 넌 나를 노래하는 거야. 넌 가야 해. 단 한 명을 위해서라도 노래해야 하는 거야!”
박종호는 통곡했습니다. 순종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박종호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것이 좁은 문, 좁은 길의 삶입니다.
시대가 바뀌고 세월이 흘러도 교회는 교회의 길이 있습니다. 교회는 왕의 대로를 가면 안 됩니다. 교회는 고지식한 면이 있어야 합니다. 고지식하게 예수를 믿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두 길이 놓여있습니다. 왕의 대로, 족장로-우리는 어느 길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까? 이왕 좁은 문에 들어왔으니 좁은 길을 걸어 큰 상급을 얻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큰 사람이 됩시다!(요한복음 1:19~28) (0) | 2023.08.06 |
---|---|
점점 좋아지는 인생(요한복음 2:1~11) (0) | 2023.08.06 |
어느 마음 밭입니까?(마태복음 13:1~9) (0) | 2023.08.06 |
은혜의 사람이 되자!(사도행전 16:11~15) (0) | 2023.08.06 |
참 제자로 살려면?(마태복음 4:18~22) (0) | 2023.0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