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물은 피다!
사무엘하 23:13~17
서론
지난 1천년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지도자가 누구였을까요? <워싱턴 포스트>와 <뉴욕 타임스>는 몽골제국의 초대 왕 테무친 칭기즈칸(1162~1227)을 선정했습니다. 세계 기업가들이 애독하는 미국의 <포춘>지도 500대 기업 CEO들의 투표를 통해 칭기즈칸을 선정했습니다. 65세 나이로 세상을 떠난 칭기즈칸은 중국의 금나라에서 헝가리까지… 동양과 서양 40여 개국을 정복했고 그가 다스리던 나라의 총인구는 1억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중국 금나라와의 전투에서는 10만 명의 몽골군사로 100만 대군을 물리쳤다고 합니다.
주전 1천년, 근동의 최고지도자를 뽑으라면 다윗입니다. 칭기즈칸만큼 동서양의 제국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강렬한 카리스마, 따뜻한 카리스마, 영성의 카리스마를 소유했던 왕입니다.
본문은 다윗이 예루살렘을 두고 블레셋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상황입니다. 다윗은 아둘람 근처 산성에 진을 치고 예루살렘 탈환에 나섭니다.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죽고 베들레헴까지 빼앗겼던 것입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을 지척에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15절,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다윗은 베들레헴 사람입니다. 고향 가까이 왔는데 어려서 먹던 우물의 생수가 생각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마시고 자란 시원하고 깨끗한 냉수였습니다. 그래서 새끼를 밴 암사슴이 샘물을 찾아 헐떡이듯이 고향 우물에 대한 향수와 갈증을 애타는 마음으로 호소한 것입니다.
이를 누가 귀담아 들었는가,
16절, 세 용사가 들었습니다.
다윗에게는 600명 군사에 30명 장군들이 있었는데 요셉밧세벳(8절), 엘르아살(9절), 삼마(11절)가 선두그룹 3인 대장군이고
18절 아비새,
20절 사자까지도 때려죽이는 용맹한 장수 브나야, 익명의 또 한 장수가 두 번째 그룹 3인 중장군입니다. 둘째그룹 3인 장군은 23절, 능력 면에서는 첫째 3인 장군에게 미치지 못하였지만 충성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랬기에 다윗이 하는 말을 지나가는 말로 듣지 않고 주군(主君)이 고향에 대한 향수로 받아들였습니다.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으면 저럴까.
16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우물물을 길어 다윗에게로 왔으나…”
블레셋군대를 정면으로 돌파하려면 실력이 있어야지요, 용기가 있어야지요! 충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희생을 각오해야 합니다. 목숨을 걸고 희생을 각오하면서까지 블레셋군대를 돌파하고 생수를 가져왔던 3인 용사들, 처음부터 용사였나요? 처음부터 실력과 용기, 충성심이 있던 사람입니까? 처음 다윗을 찾아왔을 때는 용사가 아니라 형편없던 사람들입니다.
삼상 22장 2절,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어떤 자들이라고요? 환난당한 자…. 학정(虐政)으로 고통당하던 사람들… 빚진 자…. 경제적으로 억눌리던 사람들… 마음이 원통한 자…. 어떤 사정과 사연 때문에 억울하고 한(恨)이 맺힌 사람들… 결국 승리자 위너가 아니라 패배자 루저였습니다. 이들이 다윗에게로 스스로 모여들었는데 400명이 된 것입니다. 얼마 안 가서 600명으로 불어납니다.
다윗의 고향 생수를 먹고 싶다는 말에 블레셋의 진지를 돌파하고 물을 떠온 용사들도 다윗을 만나기 전에는 환난 당하고 빚지고 원통한 자들입니다. 다윗을 만나지 않았다면 속병 들고 화병으로 죽고 술주정뱅이가 되고 자살하고 패인(敗因) 될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다윗을 만나 장군이 되고 적진에서 물을 떠옵니다.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교회가 할 일입니다. 처음 우리교회에 올 때는 환난 당한 자… 빚진 자… 마음이 원통한 자로 모였습니다. 우리교회에 와서 맨날 정부를 욕하고 대통령을 욕하고 부모들을 원망하고… 교회에 대해 불평하고… 남들 잘 되는 꼴을 못 보고… 잘못된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믿어도 달라지지 않는 졸장부로 살고 말 것입니까? 아니면 용사로 성장할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실 때 조건이나 능력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냥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제대로 나를 따라오게 되면 제대로 사람을 만들고 지도자를 만들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갈릴리의 조약돌입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약돌… 그러나 나를 따라오면… 따른다는 것은 베끼는 것입니다. 훈련을 받는 것입니다. 노력하고 수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페트로가 되리라! 페트로는 반석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하나님의 교회를 세울 수 있는 단단한 고백의 반석… 베드로는 그 부르심에 아멘! 했습니다. 버리고 무너지고 부서지고 실수하고 때로는 남들 앞에서 모욕당하고… 그러면서 견디고 성장했습니다.
베드로는 점점 제자가 되고 베드로 야고보 요한… 선두그룹의 3인 제자가 됩니다. 저절로 용사가 되고 선두그룹이 된 것이 아닙니다. 노력했고 배우고 훈련을 마다하지 않았고 자신을 내려놓았습니다. 그래서 선두그룹이 되고 소위 수제자 복음의 용사가 된 것입니다.
그러면 3인 용사들! 400명의 이름이 없던 루저들… 마냥 환난 당한 자로…, 마냥 빚진 모든 자로…, 마냥 마음이 원통한 자로 끝나고 말았을 세 사람이 어떻게 3인용사가 된 것입니까? 여기에 칭기즈칸의 리더십이 있고 다윗의 리더십이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사람을 목표로 삼은 리더입니다.
다윗이 자기에게로 온 400명을 왕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부하들이 믿음 안에서 제대로 된 사람들로 성장하는 것을 원했고 하나님의 법도 아래에서 바르게 행복하게 사는 믿음을 최우선으로 삼았습니다.
아둘람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 왕이 들어와 용변을 보았습니다. 뒤를 보이며 용변을 보고 있었기에 왕을 죽일 찬스입니다. 장수들이 죽이자고 합니다. 다윗은, 왕은 허물이 있어도 기름을 부음 받은 왕이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왕은 왕이요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군이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을 마음대로 공격하거나 처치하지 못한다고 거절합니다.
용사들이 그 모습을 보았고 그 말을 들었습니다. 현장에 없던 용사들도 처음에는 아쉽게 생각했지만 다윗의 태도에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원수에게조차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다윗의 인격, 신앙인품 앞에 조무래기들이 믿음의 용사로 변화되었습니다.
다윗의 비전. 400명 용사들, 처음에는 다윗을 피난처로 생각해서 몰려왔습니다.
다윗과 함께 세력을 키워 이 세상을 뒤집어놓을 생각입니다. 다윗과 함께 하면서 비전을 공유하게 됩니다. 다윗의 비전은 단순히 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왕국을 이 땅에 이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말씀을 정치의 중심에 세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도를 지키고 우상을 버리고 모두에게 정의와 공평을 이루는 것입니다. 무고하게 환난 당하는 자, 힘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빚을 지고 사는 자, 정치적이건 출신성분이건 어떤 명분으로든 억울한 사람이 없는 세상… 그런 메시아 왕국을 만드는 것이 다윗의 비전입니다.
그런 비전을 품으니 졸개들이 점점 600명 용사가 되고 400명 용사가 되고 30명 용사가 되고 지금은 제2그룹의 3인 용사가 된 것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포진해 있는 베들레헴으로 잠입해서 우물의 생수를 길어올 정도로 민첩하고 용기가 있는 용장들이 된 것입니다.
다윗의 따뜻한 성품. 다윗은 약자를 우대하는 리더는 아니었지만 약자를 배려하는 리더였습니다.
시글락에서 아말렉군대에게 가족들이 포로로 끌려갔을 때 다윗은 600명 군사를 끌고 추격합니다. 이 과정에서 200명이 지쳐서 떨어집니다. 그들은 나루터에서 쉬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전투에 참여했던 400명은 전리품을 낙오병 200명과 분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다윗은 600명 모두에게 고루고루 분배해 주었습니다. 낙오병 200명이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400명도 처음에는 공동분배를 거부했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언제 자기들도 그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때 자기들을 제외하면 얼마나 사는 것이 힘들고 단합과 통합이 깨어지겠습니까? 다윗이 옳은 것입니다. 그러니 배움이 컸습니다.
몽골제국 칭기즈칸이 불과 20년 만에 40개국을 정복한 리더십은 무엇인가요? 규칙과 규율, 의리를 중시 여기고 철저히 능력 위주의 승진, 조직이 비결입니다. 특히 같이 희생하고 전리품은 공평하게 나누고…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한 리더십으로 1천년 최고의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그보다 2천 년 전에 앞서 살아갔던 다윗에게 배웠던 리더십이 아닌가 싶습니다. 약자(弱者)들을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 그래서 용사들은 목숨을 바친 것입니다.
이게 충성심입니다. 충성이라는 원래 의미는, ‘설득을 당하다’입니다. 하나님께 충성한다는 것은 하나님에게 설득을 당하는 것입니다. 세 용사가 다윗에게 충성을 한 것은 다윗에게 설득을 당한 것입니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을 때 다윗은 받아주었습니다. 환난당하고 빚지고 마음이 원통해서 화병으로 견딜 수 없을 때 다윗은 가족들까지 받아주었습니다.
세상에 이런 지도자가 어디 있습니까? 조무래기들이 다윗의 배려에 인생이 설득되어 목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래서 죽기를 각오하고 물을 떠온 것입니다. 다윗을 위해서는 죽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의 인격, 다윗의 비전, 나를 소중히 여기는 다윗의 마음… 세 용사는 여기에 설득이 되어 목숨을 내놓은 것입니다.
충성은 논리도 있지만 많은 경우 비논리입니다. 자식 사랑이나 효도와 같은 성질입니다. 자식사랑에 논리가 있습니까? 남을 죽인 살인자를 사랑하고 아끼는 것이 부모의 심정입니다. 아버지에게 버림을 받았지만 평생 그 아버지를 모시고 수발을 드는 것이 효도입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이렇게 비논리가 존재합니다.
용사들 입장에는 왕이 철딱서니 없습니다. 지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시간에 고향의 우물물을 거론하는 왕이 무슨 지도자입니까? 자기는 말 한 마디로 끝나지만 용사들은 못 들은 척 할 수가 없습니다. 냉수 한 그릇에 세 용사의 목숨을 거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세 용사는 충성합니다. 충성은 논리에 맞을 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간에 충성의 대명사(?) 장세동씨, 전두환 장군의 처세가 논리적이어서 충성한 것입니까? 남들은 뭐래도 전두환 장군에게 설득된 것입니다. 그래서 세간의 눈에는 잘못된 의리요 충성이지만 언제부터 설득당한 저는 끝까지 충성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충성의 힘입니다. 다윗이 이걸 압니다.
16절,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다윗은 베들레헴 생수를 보는 순간, 아하~ 자기가 잘못했음을 알았습니다. 자기는 무심하게 말했지만 용사들은 목숨을 걸었습니다. 이 물이 용사들이 죽어서 피가 되어 돌아올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건 너무도 경솔한 일이었고 그럼에도 충성심을 보여준 세 용사들을 생각하면서 고마움과 미안한 심정으로 하나님께 제단을 만들고 떠온 물을 부어드리며 말합니다.
17절,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다윗은 물을 피로 보았기에 마실 수가 없습니다. '피를 먹지 말라'(레 17:10)는 율법의 조항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세 용사가 떠온 물은 생명을 걸고 떠온 것이기에 피로 간주했던 것입니다. 그 모습을 바라볼 때 세 용사는 오히려 더 감동을 받아 천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는 결의를 다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명장이요 성군(聖君)이 된 것입니다.
미국 링컨대통령이 남북전쟁사에서 가장 치열했던 게티즈버그전투 때 남군 명장 리장군의 군대를 공격하라는 명령을 보내면서 북군의 조지 마이드장군에게 다른 편지를 동봉합니다.
<존경하는 마이드 장군! 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모두 당신의 공로입니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 책임은 내게 있습니다. 만약 작전에 실패한다면 장군은 링컨 대통령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십시오. 그리고 이 편지를 모두에게 공개하십시오! 아브라함 링컨, 미국 대통령>
공(公)은 부하장수에게 돌리고 패배는 자기에게로 돌리는 지도자에게 어떤 장수가 충성하지 않겠습니까? 3인 용사가 다윗에게 충성하고 목숨을 걸었던 이유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결론
몽골제국은 13세기 칭기즈칸이 부족을 통일하고 아시아와 러시아, 유럽까지 점령하면서 역사상 최대의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1360년경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원나라가 패주하면서 함께 붕괴합니다. 대단한 제국이 왜 이렇게 쉽게 망하고 말았습니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충성심 약화로 인해 장수들이 몸을 사렸기에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몽골인은 원래 성(城)을 건설하지 않고 무주택입니다. 말을 타고 평원을 활보하면서 용감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성읍을 함락하고 고대광실 집을 짓고 아름다운 부인과 첩을 두자 아까워서 전쟁터에 목숨을 걸 수가 없었습니다. 충성심이 약화되고 비겁하게 된 것입니다.
장수가 전쟁터에서 목숨을 아까지 않고 왕을 위해 싸웠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목숨을 아끼지 않고 내게 충성할 수 있더냐?” “저는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이래죽으나 저래죽으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왕이면 왕을 위해 죽고 싶습니다.” 왕이 의원을 보내 간병해주니까 신하가 살아났고 건강을 회복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더 충성으로 왕을 위해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왕이 보니 게으르고 몸을 사립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아플 때는 목숨을 아끼지 않더니 어째 건강한 몸이 되니 전투가 시원치 않느냐?”
그러자 장수는 울면서 대답했습니다.
“목숨이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먹고살만하니 목숨이 아까워 내놓을 수가 없습니다!”
자기 목숨을 아끼는 충성심 약화가 결국에는 대제국 몽골제국을 무너뜨린 것입니다.
기업용어에 ‘충성고객’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세 가지 질문에 네! 하고 대답하면 충성고객입니다. 우리 제품에 만족하십니까? 앞으로도 우리 제품을 구매하시겠습니까? 남에게 우리 제품을 추천할 의사가 있습니까? 지금 로마가톨릭은 부흥하고 있어도 냉담신자로 걱정입니다. 우리 개혁교회에 있는 충성신자들이 천주교에는 없어 걱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을 위해 생명을 걸고 물을 떠다줄 수 있는 용사들… 이런 용사들 600명이 자기 목숨 자기 안녕만을 걱정하는 수십만 명의 사울 군대를 이길 수 있었고 왕국을 세운 것입니다.
17절 하반절,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충성은 한두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항상! 입니다! 항상 승복합니다. 항상 설득된 마음으로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다윗의 왕국은 이런 사람들 600명이 포진해 있었기에 성공한 왕국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오후에 임직예배를 드립니다. 임직자 여러분은 나를 위해 목숨을 걸고 물을 떠올 수 있습니까? 우리 늘빛교회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도 여러분의 수고와 희생과 충성을 사유화(私有化)하지 않고 온전히 하나님께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요 하나님의 용사들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예비임직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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