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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모든 위로의 하나님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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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위로의 하나님

고린도후서 1:3~7

서론

우리 하늘꿈도서관 독서 강좌에 다녀갔던 <연탄길>의 저자 이철환씨가 <위로>라는 책을 냈습니다. 우리의 삶은 강물 같은 거라고, 강물이 바다로 가는 동안 벼랑을 만나고, 치욕을 만나고, 더러운 물을 만나고 그래서 수많은 상처를 받으며 흘러가는 동안에는 위로가 필요하다는 에세이 성격의 동화소설입니다.

 

이런 이야기는 배우자의 죽음이나 가난, 실패나 상실에 대한 불안 경쟁사회에서 밀리고 실패하고 자존심이 상하고 질투할 것들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다양한 상황과 맞닥뜨리며 깊은 상처를 받는 현대인에게 공감이 되고 위로의 메시지가 됩니다.

 

대통령을 비롯해서 국민 모두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그래서 요즘에는 위로에 관련된 책들이 많이 팔린다고 합니다. 문제는 위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엉뚱한 대상에서 위로 받으려 합니다. 나도 남도 함께 위로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만 상처 받았다고 나만 위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의 기관실은 맨날 화재로 부글부글 끓습니다. 이런 영성에서 제대로 된 위로가 나올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바울이 말하는 진정한 위로를 본문으로 택했습니다.

위로자-하나님만이 참 위로자가 됩니다.

한글사전에서 위로(慰勞) 따뜻한 말이나 행동으로 괴로움을 덜어 주거나 슬픔을 달래 주는 일입니다. 흔히 인생 고해(苦海), 하지 않습니까? 고해(苦海) 고통의 세계라는 뜻으로, 괴로움이 끝이 없는 인간 세상을 이르는 말입니다.

끝없는 괴로움 스스로 위로 할 수 있는 상황은 자위(自慰)라고 합니다. 내 마음을 내가 위로하는 것입니다. 이런 정도의 괴로움이라면 견딜 만 합니다. 더 나아질 거야 좋아질 거야 그 사람이 변할 거야 이런 위로가 스스로를 위로하는 자위(自慰)입니다.

 

남을 통해 오는 위로가 있습니다. 부모나 친구나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위로를 받습니다. 제가 목회하면서 기쁠 때는, 제 설교를 듣고 위로를 받았다, 힘든 인생길에서 주일말씀을 통해 충전 받는다, 슬플 때 위로가 되어주심에 감사하다, 이런 문자를 받을 때 힘이 됩니다. 이런 문자는 지우지 않고 얼마동안 놔둡니다. 그러면서 나도 위로를 받습니다.

 

그러나 타인의 위로가 내게는 위로가 못되는 일들이 종종 일어납니다. 죽음에서, 부도에서, 중병이 선고될 때 사람의 말로는 위로가 안 됩니다. 그래서 장례식장에서, 입관할 때도 누가 위로하려면 말립니다. 그때 울지 않고 언제 웁니까? 그때는 위로가 필요한 시간이 아니라 울어야 할 시간입니다. 그때 눈물을 다 쏟지 않으면 그게 마음에 병이 됩니다. 지금은 울도록 놔두고 위로는 나중에 하면 됩니다. 그걸 모르고 억지로 위로 하다보면 그 사람들에게 섭섭한 마음을 줍니다. 내 입장이 되어봐라, 너희도 그런 말이 나오겠나

 

위로가 되지 않을 영역을 인간의 말로 위로하려다 친구지간에 의()만 상한 사람이 욥의 친구들입니다. 욥은 아들 일곱 딸 셋, 열 자녀가 동시에 죽었습니다, 재산이 폭삭 망했습니다. 몸은 죽을병에 걸렸습니다. 여기에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욥의 친구들은 위로하려고 합니다( 5).

사람은 고생을 위하여 났으니 불꽃이 위로 날아가는 것 같으니라”(7)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8)

 

그야말로 속이 터지고 환장할 노릇이지요! 환장(換腸)은 환심장(換心腸)의 준말로 심장이 뒤집어질 정도로 놀라고, 미칠 만큼 마음이 쇼크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식들이 죽고 재산이 망가지니 환장할 노릇인데 친구들은 사람은 고생을 위해 났다, 나 같으면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교과서적 말을 해대니 속이 뒤집히고 결국, 욥의 불평을 더 끌어내는 나쁜 사이가 됩니다. 사람이 위로할 고통이 있고 위로할 수 없는 범주가 있는데 내가 위로하려 들었다가 상처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위로에 맡기는 것이 최선입니다.

 

신약성경에서 위로라는 헬라어는 두 단어가 합쳐 있습니다. “곁으로” “부른다.”입니다. 위로는 위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을 곁으로 불러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따듯하게 안아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곁으로 할 때 누구 곁입니까? 넉넉히 위로해 줄 분, 하나님입니다. 하나님 곁으로 불러내는 것이 진정한 위로입니다. 그래서 성령님을 보혜사, 위로자라고 합니다.

아무리 인간이 위로해도 위로가 되는 영역이 있고 위로가 되지 못하는 현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 위로의 한계입니다. 함부로 하나님의 위로를 대신하려고 해선 안 됩니다. 그래서 위로에도 지혜가 필요하고 시기와 기회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참된 위로자가 될까요? 5, ‘자비의 아버지입니다! 자비(慈悲), 혹은 긍휼(矜恤)이라는 히브리어는 여자의 자궁(子宮)에서 유래합니다. 자궁(子宮)은 모든 것을 받아들입니다. 아이가 잘났다고 받아들이고 아기가 못났다고 안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때로는 강간범의 씨조차 받아들입니다. 더러운 강간범의 씨가 떨어지고 임신이 되었습니다. 내 정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너무 치욕적이고 분하고 돌아버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궁은 자비롭습니다. 내 심리는 거절해도 자궁은 말없이 받아들입니다. 그 씨를 뿌린 놈이 잘못이지 아기씨가 무슨 잘못이 있냐고 아기씨에게 체온을, 양식을, 감성을 정성껏 공급합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이것이 자비입니다. 이런 자비가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慰勞)합니다. 위로는 하나님 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아담아 어디 있느냐? 하갈아 어디 있느냐? 집을 나간 탕자를 부르는 것입니다. 따뜻한 자궁 속에 품기 위해서. 그것이 친정어머니의 품입니다. 그 품에서 누구나 위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궁처럼 받아주시고 품어주는 것-이것이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하나님의 자비만이 제대로 된 위로이며 그러기에 슬픔과 실패한 사람들이 하나님 곁으로 다가설 수 있도록 하나님 쪽으로 비켜서야 합니다. 그럴 때에 제대로 된 위로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위로의 대상-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입니다.

4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여기 환난은 예수님을 믿으면서 생기는 환란들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모든 재산을 빼앗겼거나 집안에서 파문당하거나 남편이 순교당한 것입니다. 이런 환란들은 거의 위로가 안 되는 수준입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무슨 위로가 있겠습니까? 파문당했는데 누가 위로합니까?

 

그럼에도 하나님은 모든 환난에서 위로해 주신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모든 환난은 하나님의 위로가 미치지 못할 고통과 슬픔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하나님의 위로가 미치지 않습니다. 자식을 앞세우는 부모에게 무슨 위로가 있습니까?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 어린 자식들을 두고 떠난 아내를 잃은 남자에게 무슨 말로 어떻게 위로가 됩니까?

 

이런 슬픔은 하나님조차도 당장에 위로하려 하지 않습니다. 지금 이 때는 위로의 때가 아니라 슬픔의 시간입니다. 슬픔의 시간에는 그냥 슬퍼하도록 두는 것이 오히려 위로입니다.

 

친정집의 위로는 어디에서 나옵니까? 친정어머니가 좋은 말로 위로해서 시댁에서 받은 상처가 치료를 받고 회복되어 다시 살아납니까? 친정어머니는 심리학자도 아닙니다. 딸의 속상한 사연을 들으면서 다들 그렇게 사는 것이라고 엄마는 그보다 더한 세월을 살았노라고 또박또박 가르쳐 들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도 감당 못하냐고 자식을 책망하지도 않습니다.

 

친정어머니는 그냥 들어줍니다. 들으면서 울어줍니다. 그러면 그 분노, 슬픔 원한이 눈이 녹듯 사라집니다. 친정어머니 없는 사람이 왜 서러운지 아시지요? 내 심정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친정어머니와 언니가 다르고 동생이 다르고 내 딸이 다릅니다. 친정어머니는 영원한 나의 자궁(子宮)입니다. 자비의 자궁(子宮)입니다. 그래서 그 앞에서 딸들이 눈물을 쏟고 분노를 터트리고 그래서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어머니는 묵묵히 들어주고 함께 울어준 것밖에 없는데 딸은 위로를 받는 것입니다.

 

닐 앤더슨이라고 탈봇신학교에서 실천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인데 상담심리학 쪽에 오히려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는 교수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라는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자식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다고, 와서 기도해 달라고 급한 전화를 받은 앤더슨은 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교우의 아들은 이내 목숨을 잃었습니다.

 

앤더슨은 상담전문가입니다. 얼마든지 심리적으로 위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앤더슨은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그들은 감정적인 반응을 기대하는 것이지 지적인 대답을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앤더슨은 울기만 했습니다.

아이를 묻고 부부는 교회를 떠났습니다. 아이가 없는 환경이 견디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5년 후에 부부가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우리 아이가 죽었을 때 목사님께서 해주신 일을 저희는 두고두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제가 무엇을 했는데요? 저는 두 분의 고통을 알면서도 도움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설득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했습니다. 목사님은 옆에서 울어주심으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런데서 욥의 친구들은 실패한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은 장황하게 교리적인 가르침을 전합니다. 이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께서 큰 축복을 주실 것이다. 심지어는 네 시작은 미약했지만 나중은 창대하게 되리라! 는 말을 늘어놓습니다. 우리에게는 참 좋은 말이고 사업을 시작할 때 은혜가 되고 힘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열명 자식을 졸지에 잃은 아버지, 온 몸에 죽을병에 걸린 남자, 재산을 순식간에 날린 사업가에게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를 알려주는 지식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을 함께 나누고 울어줄 감정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당장에 고통의 이유를 알려주지도 않고 고통을 해결해 주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다리십니다. 그냥 기다리실까요? 하나님도 고통 가운데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던 분입니다. 하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그 자체가 모욕이고 굴욕입니다. 33년 동안 사시면서 온갖 고통을 당했습니다. 십자가에서 고통을 당하시며 목숨이 끊어지는 광경을 모두 보셔야 했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을 아십니다. 알면서 때로는 모른 척 외면합니다.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라는 영화에서 잊지 못할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 부르짖을 때 장면을 가득 메우는 물방울이 한 방울 뚝! 떨어집니다. 십자가에 달린 아들의 고통에 하나님은 우셨다는 것을 멜 깁슨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친정어머니의 눈물만큼 확실한 위로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 자신도 우리의 위로에 함부로 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이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결코 손상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도 못 참냐? 눈물 뚝~! 그렇게 눈물을 금지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그냥 울라고 놔두십니다. 고난과 슬픔을 해석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고 아직은 의문부호로 남긴 채 그냥 울도록 기다리십니다. 그리고, 같이 아파합니다.

 

이철환씨가 <위로>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이것입니다.

버티지 않아도 돼, 참지 않아도 돼, 힘들면 그만해도 돼

힘들고 어려운 세상에서 버티지 않아도 된다고 참지 않아도 된다고 힘들면 그만 두어도 된다고 친정어머니의 화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오히려, 조금 더 버텨보라고 참아보라고 힘들더라도 노력해보라고 그런 권면입니다. 그런 권면에서 오히려 위로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는 방법은 오직 그리스도로 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를 통해서 큰 고통을 당하신 분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를 넉넉히 위로해 줍니다. 하나님께 침묵하시며 우리와 함께 하실 때 우리는 인격적으로 성숙해집니다. 이런 사실을 알았기에 바울은 살 소망이 끊어지는 아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위로로 일어납니다. 이것이 제대로 된 위로입니다.

위로사(慰勞師) 자격증-환난을 거친 자들은 자격증이 있습니다.

4, “우리로 하여금 모든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을 위로하시는 위로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위로사의 자격을 부여하십니다. 위로사(慰勞師) 자격증은 그냥 시험을 보고 어떤 단계를 거쳐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고난을 받음으로 그 분야에서 위로사의 자격증을 얻어야 합니다. 병중에 있는 분들을 위로하려면 내가 그런 병을 앓아보아야 합니다.

 

중앙의료병원에서 원목을 보시는 목사님은 12번이나 수술을 받았던 분입니다. 10년 투병하다 죽었습니다. 시신을 안치해야 하는데 장소가 없어서 그냥 밖에 놓아두었습니다. 아침이 되어 시체실에 넣으려니까 꿈틀거리며 살아났습니다. 하나님께 주신 생명,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래서 목사가 되고 원목이 되었습니다. 이분만 가면 위로를 받고 희망을 얻습니다. 이 분은 혹독한 고난을 통해서 위로사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위로>를 읽은 독자가 독후감을 올려놓았습니다. “죽을 만큼 아팠던 사람의 위로이기에 더 찐하게 다가옵니다.” 그래요! 자식을 잃은 사람만이 자식을 잃고 우는 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실패했던 사람만이 실패하고 한숨쉬는 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수술실에 들여보내보았던 사람만이 가족을 수술실로 보내는 이를 위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위로사 자격증이 있기 때문입니다. 큰 보상입니다. 그래서 뜻 없는 고난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

조셉 마셜의 <그래도 계속 가라>에는 아버지를 잃은 슬픔의 청년 제레미와 여든을 훨씬 넘긴 할아버지와의 대화가 나옵니다. 손자는 할아버지에게 묻습니다.

할아버지, 사는 게 왜 이렇게 힘들죠?”

 

할아버지는 라코다족 인디언으로 정규교육을 받은 일이 없는 시골 농부입니다. 할아버지는 인생이 사는 게 힘든 이유를 소박하게 설명합니다.

인생이란 커다란 여행이다. 양지(陽地)를 걸을 때도 있고 음지(陰地)를 걸을 때도 있지. 넘어져 봐야 언제 일어설지 알 수 있고, 굶주려 보지 않으면 풍요로움에 감사할 줄 모른단다. 한번씩, 한순간씩 이겨내다 보면 강해진다. 영웅들도 갈림길에서 갈등을 하지. 그러나 가던 길을 멈추는 일은 없단다. 그러니, 사는 게 힘들어도 계속 가라

 

사는 게 힘들더라도 계속 가라! 여기에 하나님의 위로가 있습니다.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는 사람들만이 사는 게 힘들어도 당당하게 견디며 타인을 위로하는 위로자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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