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을 이기는 길
요한복음 14장 1~3절
서론
미국에서 최초로 인공 신장을 이식 받은 사람은 쉴러드라는 환자입니다. 이 사람이 1985년 루이빌 병원을 퇴원하게 되었을 때 수술을 담당했던 렌신 박사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이 사람이 인공 신장을 달고 몇 년을 살 수 있겠습니까?”
렌신 박사는, “기계는 문제가 없다. 다만 환자가 마음에 걱정하지 않고 편안하면 오래 살 수 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의사들 대부분은 병원에서 퇴원하는 환자가 다시 찾아올 것인가, 오지 않을 것인가를 짐작하고 있답니다. 병원에서 나갈 때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건강하게 살겠습니다!” 긍정적인 마음으로 간 환자는 다시 오지 않지만 “재발이 없을까요?” “합병증은 없나요?” “뭘 먹어야 하나요?” “어떻게 해야하나요?” 근심과 걱정이 있는 환자는 2년 내에 대부분 다시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병이라는 것이 마음에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가지면 큰 병도 견디어 낼 수 있지만 마음이 항상 조급하고 초조하면 나을 병도 낫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고별 설교입니다.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열 한 명을 상대로 전하고 있는 설교입니다. 고별 설교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18절 “내 떡을 먹는 자가 내 발꿈치를 들었다!” 21절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팔리라!” 36절에서 “나의 가는 곳에 너희들은 따라 올 수 없다!”고 별세(別世)를, 38절에서는 배신을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이 모든 염려하며 근심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너희는”-열 한 명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그들은 복수이지만 신약성경 헬라어 원문에는 열 한 명의 제자들을 단수 “너는” 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열 한 명이지만 모두의 중심에는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에게도 야고보에게도, 요한에게도 근심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디 제자들뿐이겠습니까? 세상에 근심 없는 자 없습니다. 찬송가 487장에 “시험 걱정 모든 괴롬 없는 사람 누군가!” 걱정 없으면 나와보라는 것입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이 찬송가 작시자는, 약혼녀를 결혼 하루 전날 잃었습니다. 비탄에 빠졌습니다. 캐나다로 이민 가서 평생 독신으로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 살았는데 살다보니 인생 자체가 근심덩어리였다는 것입니다. 자기 혼자만이 걱정하며 괴로워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그러더라는 것이지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근심을 갖고 있습니다. 아주 큰 근심을 할 때는 전기폭풍이 일어나 급사(急死)한다고 합니다. 작은 근심도 자꾸 쌓이면 심장병이 됩니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성인병이 심장병이라고 합니다. 심리학에서는 근심을 “느린 형태의 자살”이라고 합니다. 근심한다는 것은 서서히 자신을 죽여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근심할까요? 근심의 원인과 처방을 함께 제자들의 처신에서 찾아봅시다.
제자들은 미래를 알지 못했기에 근심했습니다.
예수가 왜 죽어야 하는지, 십자가는 왜 굳이 지려고 하는지? 죽은 다음의 세상을 몰랐기에, 미래를 알지 못했기에 근심했습니다.
바울은 우리에게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했습니다. 모든 게 좋은 결과로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합니다.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인생의 결과, 사건의 결과를 압니다. 그 결과는 모든 게 좋게 끝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당하고 있는 모든 환난과 시련이 잘 섞여서 “선”(善)을 이루어낸다는 것을 압니다. 선(善)은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그러기에 근심을 좇아냅니다.
왜 재방송이 인기가 있습니까? 경기 결과를 아니까. 한 꼴 먹어도 괜찮습니다. 결과를 알고 있기에.
성도의 고난은 반드시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 우리가 가는 길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한가지만 알면 됩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끝이 좋을 것이다!”
94년 LA에 지진이 일어났습니다. “지진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느냐?”고 했더니, 그 지역의 목사님께서 “아니야! LA에는 기후 좋고 놀기 좋아서 주일에 나간다! 이번에 어려움이 당하니까 교회에 나왔다, 한번씩 흔들어야 한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작년 미국에서 9.11 테러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해의 추수감사절은 최고의 감사의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 일로 가정의 소중함을 알게되었습니다. 선한 일들을 뒤로 미루지 않고 즉시 실천하는 운동이 일어났습니다. 미국을 새롭게 부흥시켰습니다.
어려움이 있을 때 성도의 고난은 반드시 목적이 있고 하나님의 축복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어려움 속에서도 근심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죽겠다!”를 “주께 있다!”는 마음으로 훈련될 때에 염려를 극복할 수 있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적인 욕망 때문에 근심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욕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영광을 누리려는 욕심입니다. 그 욕망이 무너지니까 마음에 근심이 있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이별이 그들 생애에 위대한 변화-성령을 받고 능력 있는 증인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사함의 은총이 온 인류에게 넘치게 된다는 미래를 알았다면 그들은 공포로 떨지 않았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근심은 미래의 것입니다. 미래를 하나님에게 맡기지 못하고 내 것으로 착각할 때에 같은 사건이라도 남들보다 더 염려하며 “느리게 자살하게” 되는 것입니다.
남미에는 알젠틴에서는 돈을 벌어서 그 나라 돈으로 은행에 넣을 수 없습니다. 1천 만 원이 1년 후에 1백 만원으로 하락합니다. 달러를 바꾸어서 항아리에 담아서 땅속에 묻습니다.
자나깨나 땅만 생각합니다. 때로는 자식들이 서로의 집을 번갈아 가며 훔쳐가기도 합니다. 돈이 많을수록 근심이 많습니다.
어느 여 집사가 항상 근심 어린 얼굴을 하고 다니기에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왜 근심이 많은가?” “아들이 하나인데 서울대학교에 들어가야 하는데 공부를 안 한다. 속상하다!” “몇 학년이냐?” “초등학교 5학년이다.“
몇 년을 앞당겨 고민합니다. 얼마나 교만한 인생입니까?
야고보는 인생은 안개와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계획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합니다. 주의 뜻을 앞 세워야 합니다.
과거에도 은혜로 살고 지금도 앞으로도 은혜로 산다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15장의 포도나무 비유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우리는 가지입니다. 가지가 왜 근심하는가? 받는 사람이 왜 고민을 하는가?
여호와가 우리의 기업이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다윗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여호와만이 우리의 미래입니다. 모든 것을 그 분의 주재 하에 맡겨야 합니다. 내 욕심, 내 욕망을 버릴 때에 근심도 함께 떨구어 버리게 됩니다.
“살아있는 순교자”라고 불렸던 안이숙 여사의 <내일 일은 난 몰라요>-그 찬송을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4절을 좋아합니다.
“내일 일은 난 몰라요 가는 길 난 알아요”-가는 곳 난 알아요. 하나님께서 인도하신다는 그 사실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맡길 때에 염려가 떠나가고 하나님께 미래를 맡길 때에 불안을 떨구어 버릴 줄 믿습니다.
마음이 나누이기 때문에 근심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근심”-“나눠진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과 세상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나뉘어 졌습니다. 제자들끼리 나눠졌습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누가 배신할까? 주님과 이별하면 어떻게 되나, 마치 젖을 뗀 아기가 불안한 것처럼 제자들도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면 근심이 없습니다. 나눠지면 근심이 파리 떼처럼 달려옵니다.
마음이 하나님과 나뉘게 됩니다. 그러니 내가 세상의 근심을 대하니 두렵지 않겠어요?
벽지는 약합니다. 그러나 기둥에 붙어있을 때 강해집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붙어 있어야 합니다. 나뉘면 안 됩니다. 아교풀로 붙여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평안할 때는 붙어 있다가 오히려 어려움이 닥치면 나뉘어 집니다. 그러면 불안, 염려, 초조, 걱정이 파리 떼처럼 달려듭니다. 시체를 향하여 까마귀 떼들이 달려드는 것처럼 염려와 근심이 나에게 달려듭니다. 수도 없이 달려들면 마음도 상하고 얼굴도 상하고 믿음도 약해집니다. 그러기에 어려울 대일수록 하나님을 꼭 붙들어야 합니다.
영적인 고아가 될 때에 근심하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의 이별로 고아처럼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없으니, 그들은 근심에 빠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신학 할 때 서울에서 15일 정도를 남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맨 날 쌀밥에 고기반찬이 있었습니다. 냉장고에 과일이 들어있는데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집 아이들은 하나도 사오지 않으면서 한번도 허락 받지 않습니다. 나는 허락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니 늘 안절부절입니다.
왜 이런 차이가? 아버지가 있다! 없다!
우리가 왜 늘 불안합니까? 신앙의 고아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계시는 우리 아버지” 원문에는 “아빠!”
“아버님!”이 듣기 좋은가? “아빠”가 듣기 좋은가? 벌써 “아버님!” 하면 독립심을 뜻합니다. 다 컸다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걱정하고 속에 담아두는 나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하나님과 나 사이가 “아빠”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서 너 살짜리가 근심하나요? “아버님, 경제가 어려운데!” “사업은 어떻습니까?”-기특한가요? 정신병원에 가야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아빠”를 말하는 것입니다. 맡기라는 것입니다. 너희의 미래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여호와 이레의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고 합니다.
결론
인생에 어려움이 많을수록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마음이 최고의 약입니다.
잠 17:22은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하느니라”-마음의 즐거움이 최고의 치료제라는 것입니다.
놀만 카진은, 베스트셀러 제조기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저술가입니다. 오랫동안 집필을 하다보니 척추 관절염에 걸렸습니다. 현대의학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자기를 돌아보았습니다. 집필을 하느라 너무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직장을 포기하고 3개월을 호텔방을 얻어 혼자 지냈습니다. 자고 먹고 폭소 비디오를 빌려다 보면서 웃고-병이 나았습니다. 그는 <질병의 해부>라는 책을 냈습니다.-질병을 해부해보니 결국은 마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스탠포드대학에서 성인 남자들을 대상으로 폭소비디오 1시간을 시청하게 했습니다. 질병이 왔을 때 이겨내는 면역성 호르몬이 평소에 2백 배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즐거움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풍랑이 있는 갈릴리바다-제자들이 아우성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바다를 꾸짖고 이어 제자들을 향하여 “믿음이 어디 있느냐?” 야단치셨습니다. 직역하면, “너희 믿음을 어디 두고 다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믿음을 어디에 두었습니까? 평안한 데 두고 온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만? 갈 때는 놔두고 갑니다.
이제 믿음을 들고 나갑시다.
미래를 아는 믿음
부질없는 근심들
나뉘지 않는 마음
부유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믿음
이런 믿음으로 염려와 근심을 떨구고 돌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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