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증명(證明)한다
고린도전서 15장 12~19절
서론
박근혜 정부가 시작하면서 장차관들이 낙마(駱馬) 중입니다. 특히 법무부차관은 성(性) 접대 동영상에 연루되어 자진사퇴했습니다. 나는 잘못이 없다, 문제의 인물과는 일면식도 없다며 발뺌하지만 동영상에 얼굴이 나오면 꼼짝 못합니다. 이것이 증거물의 힘입니다. 그래서 사건이 터지면 경찰이나 피의자들은 자기에게 유리한 증거물을 찾느라 애를 씁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살아나신 날이며 그 날을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부활은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한 사람의 개인적 사건을 넘어 온 인류에게 인간의 부활을 예고하는 쇼킹한 증거물입니다. 부활은 무엇을 증명할까요?
1. 부활은 예수님이 참(진리)이심을 증명합니다.
예수님이 진짜냐 가짜냐? 부활은 그 증거물입니다. 부활을 목격한 사람은 513명 이상입니다. 그래도 초대교회에는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반문합니다.
12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어떤 분들은 그래요, 부활이 뭐가 그렇게 중요한가? 예수님의 교훈-이웃을 사랑하라, 원수조차 사랑하라, 약한 자들과 친구가 되라… 그런 교훈만으로도 예수는 인류에게 크게 공헌을 한다, 그러니 너무 부활에 연연하지 마라… 기독교 안에서도 이런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부활을 예고하셨습니다. 그래놓고 부활하지 못했다면 사기꾼입니다. 사기꾼이라도 교훈이 좋으니 좋은 분이라고 인정하겠습니까? 장관이 능력만 있으면 거짓말이나 거짓된 행동을 해도 무엇이 그리 잘못이냐고 두둔한다면 정상적인 사고가 아닙니다. 아무리 논문이 훌륭해도 베낀 것이고 대필이면 박사학위는 취소되고 논문은 사라지게 됩니다.
옛날 성모 권사라고 냉동실에 들어갔다가 3일 만에 살아났다면서 순복음교회를 비롯, 대형교회 간증집회를 휩쓸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지어낸 사기꾼입니다. 하는 말이, 내 간증을 듣고 신앙생활 잘 하면 되는 것이 아니냐고, 항변했습니다. 옳은 말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 자신이 참이었고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누구든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까지도 진리가 됨을 증명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거든 예수님의 신분, 예수님은 하나님 자신이요 하나님 아들이심을 믿어야 하고 구세주가 되심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과 예수님의 신분, 예수님의 주장은 도매금으로 함께 믿어야 합니다. 왜냐? 부활은 이 모든 것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터키의 옛 수도 이스탄불 1700년 된 성(聖) 소피아 사원에서 비밀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문서 제목은 <예수의 체포와 심문 및 처형에 관하여 가이사에게 보내는 빌라도의 보고서>입니다. 로마황제 티베리우스에게 보낸 빌라도 총독의 보고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각하께 문안드립니다.
제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최근 수년 동안 일어난 사건은 나라의 운명까지도 변하게 할지 모르는 일이기에,
각하께 소상히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폭동이 걱정되어 희생양으로 예수라는 청년을 십자가에 처형했습니다.
그리고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더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유는 그가 부활했기 때문입니다.
무덤은 텅 비었고 제자들은 예수의 부활을 전파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생애는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 손에 있듯, 모든 것이 그의 손에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저는 그의 주장이 사실일 수밖에 없다고 감히 말씀드립니다.-본디오 빌라도”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빌라도 총독이 거짓문서를 남길 이유가 없습니다. 부활 자체는 자기의 판단 미스이고 불명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진실을 남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영국 옥스포드대학의 유명한 역사학교수 토마스 아놀드는 부활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여러 시대의 역사를 연구하고 저자와 기록들의 증거를 고찰해 보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위대한 기적,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보다 더 완전히 증명될 수 있는 사실들이 인류 역사에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살아있을 때 스승을 버리고 뺑소니 쳤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전파하기 위해 전원 순고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활의 큰 증거가 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참이었고 그 분의 주장이 참이었음을 증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주장하신 대로 하나님이셨고 인류의 구세주입니다. 부활은 이걸 증명하고, 우리는 이걸 믿어야 합니다!
2. 부활은 온 인류가 부활한다는 것의 증명입니다.
창세후로 인류는 부활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말랐던 대지가 봄이 되면 싹이 돋아나고 앙상한 나무들도 푸르고 큰 나무가 되듯이 죽은 사람도 다시 살 수 있지 않겠나… 기대했지만 아쉽게도 죽음의 문을 들어가면 누구도 돌아 나오지 못했습니다. 죽음의 대문은 처음부터 열쇠가 없게 제작된 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으로 들어간 후 되돌아 나온 사람은 인류역사상 한명도 없고 죽음의 방호벽을 뚫은 해커도 한 명도 없었습니다.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시왕은 불사약을 구하러 3천 군사를 풀었고 이집트인들은 영생불사 수단으로 미라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나 한번 들어간 죽음의 문에서 살아난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은 후의 부활은 온 인류가 막연히 기대만 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살아난 1호 부활체가 되셨습니다. 죽음의 권세가 엄청 나서 모두를 가두고 이겼는데 예수님만은 영영히 가두는데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죽음의 문을 여는 열쇠가 없이도 무덤 문을 열어 제치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20절).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세상은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그러니 인본주의 영생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러나 수명은 늘리고 장기를 갈아 끼우며 괴물 모양으로 장수 할 수 있지만 부활을 통한 영생은 줄 수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가장 아름다운 몸으로의 부활과 영생을 증명해 줍니다. 사람은 영생할 수 있다! 이것을 부활의 1호가 되는 예수님께서 증명해 보이신 것입니다.
미국의 명문인 템플대학의 창시자 코넬은 무신론자에다 회의주의자였습니다. 남북전쟁 당시 대령계급으로 후퇴하다 지휘봉을 놓고 왔습니다. 당황하는 대령을 보고 링이라는 소년병사가 적진으로 뛰어 들어 지휘봉을 찾아옵니다. 막 빠져나오는 순간 총을 맞은 소년 병사는 지휘봉을 바치고 죽어갑니다. 코넬 대령은 소년을 살리려고 했지만 이미 늦은 줄 알고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자 소년병사가 대령에게 말했습니다.
“대령님,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코넬 대령은 죽은 소년의 시체를 끌어안으며 외쳤습니다.
“오, 하나님! 이 어린 소년 병사 앞에서 내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생명을 젊은이들을 위하는 일에 바치겠습니다.”
러셀 코넬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믿었고 제대 후에 신학을 하고 골든코넬신학교와 템플대학교를 세웠습니다. 한 어린 소년의 부활신앙이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수많은 목회자와 신앙인들을 양성, 배출하는 큰 영향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인생에 부활이 있음을 믿었던 한 소년 병사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으로 어떤 이론으로도 마음 문을 열지 않았던 직업 군인의 단단한 마음을 열었습니다. 오늘 교회가 영향력을 잃고 무력증에 빠진 것은 우리가 부활을 제대로 삶으로 살아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믿고 사는 소년병사는 대령의 마음을 움직였는데 우리는 자식들의 믿음 하나 움직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믿지만 부활을 믿는 사람들처럼 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3. 부활은 기독교만이 진리임을 증명합니다.
기독교는 발명된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로 시작된 종교입니다. 나머지 종교들은 영국의 동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말한 ‘만들어진 신’ ‘만들어진 종교’입니다. 만들어진 종교는 삶을 풍성하게 하고 약자들을 돕고… 마음에 평화를 찾는 일에는 어느 정도 기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사함을 통한 부활과 영생은 줄 수 없습니다.
영생과 구원은 기독교만이 줍니다.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 죄들이 사해지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 신분을 얻고 부활과 영생을 누리게 됩니다(롬 4:25).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만약 십자가와 부활을 빼버리고 약자들을 위한 종교, 인권과 윤리와 도덕, 사회발전을 위한 인본종교로 전락한다면 기독교는 존재가치가 없습니다.
부활은 기독교만이 줄 수 있는 선물입니다. 아무리 종교들이 선한 삶을 약속해도 부활과 영생의 구원이 없으면 마취약에 불과합니다. 그 말은 기독교가 아무리 인류발전에 공헌을 해도 부활이 없는 기독교를 말한다면 종교 중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지 진리, 복음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피자 파이 여덟 조각 중의 하나가 아닙니다.
종교의 교주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불교는 부처님이 남긴 교훈을 따라 선행을 쌓고 유교는 공자님의 가르침을 따릅니다. 기독교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기독교는 교훈이 아니라 살아있는 분과의 교제로 살아가며 힘을 얻습니다. 부활로 달라진 것입니다.
다른 종교들은 좋은 교훈을 남기고 죽었기에 남긴 가르침과 교제하지만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기에 살아있는 분과 교통하면서 그 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은 가르침을 따를 것이냐 가르침을 주신 분을 따르는 것이냐, 차별화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변화의 힘이 강합니다.
불루오션(Blue Ocean)이라는 단어 아시지요? 불루(Blue) 푸른, 오션(Ocean) 바다잖아요? 두 단어가 합쳐 불루오션, 푸른 바다, 고기가 많이 잡힐 수 있는 넓고 깊은 푸른바다가 됩니다. 이게 경제용어가 되면 아직은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 공간, 무경쟁시장을 말합니다.
다른 종교는 기독교의 모든 것을 벤치마킹해요! 그러나 기독교의 부활은 모방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교주의 무덤을 인도, 중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엄청나게 성역화 했기에 이제 와서 새삼스레 무덤을 버리고 부활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참 믿음은 부활을 믿음으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따르고 예수님의 존재는 부인한다면 이상한 기독교입니다. 부활을 통해 살아계신 분과 교제하며 살아가야 제대로 부활을 사는 것입니다.
결론
어느 부활절 무렵, 영국의 한 마을에 젊은 목사가 부임을 했습니다. 교인들은 젊은 목사의 첫 설교, 부활절설교를 기대하며 교회로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는 설교를 합니다.
“어느 바닷가 마을에 어머니를 여읜 소년과 그 소년을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아버지가 살았습니다. 어느 날 소년은 동네 친구와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갔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등대지기였던 소년의 아버지는 보트를 몰고 구하러 갔습니다. 하지만 보트는 2인용이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자기를 먼저 구할 줄 알았고 친구는 포기한 얼굴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손을 내밀었다가 손을 거두고 아들의 친구에게 손을 내밀며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너는 죽어 천국에 갈 수 있지만 네 친구는 아직 주님을 믿지 않잖니…’
아들은 아버지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아빠, 천국에서 만나요!”
아버지는 아들의 친구를 배에 태우고 쏟아지는 눈물을 감추지 못한 채 노를 저어 육지로 갔습니다. 아버지가 다시 돌아왔을 때 아들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목사의 설교는 끝이 났고 눈은 촉촉이 젖어있었습니다. 찬송가가 시작되는 데 모두들 심드렁한 얼굴이었습니다. 너무 흔한 이야기였지요. 교인들 중의 하나가 속삭였습니다.
“저런 이야기야 늘 듣던 부활절 설교잖아? 첫 부활절 설교 치고는 시시하다”
그러자 뒤에서 설교를 듣고 있던 할아버지 교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설교는 늘 듣던 설교와는 다릅니다. 저 목사는 그때 구원받은 아이이고 아들 대신에 저 아이를 구한 아버지가 바로 이 사람이니까요!”
부활은 영생을 약속할 뿐만 아니라 남을 위한 자기희생의 삶을 살아가게 합니다. 부활할 아들이냐 아직은 부활하지 못하는 남의 아들을 건져주는 것이냐? 남의 아들을 건져주고 부활의 기회를 주는 것! 그게 진짜 부활을 살아내는 사람의 진짜 믿음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로 기독교인들을 조롱합니다.
“교인들이 조금만 더 구원받은 사람들처럼 보인다면 나도 그들의 구원을 믿겠소.”
예수님께서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손수 부활하심으로 증명하고 확신시켜 주셨는데 그 길을 따라가는 우리들은 부활을 믿고 사는 사람들의 생명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활을 믿지 못하는 게 문제가 아닙니다. 언젠가는 믿어지는 날이 올 것입니다. 문제는 부활을 믿으면서도 부활할 사람들처럼 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이런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부활을 살라!>
제대로 부활을 살아내는 것! 우리 주변의 작은 일상에서 부활의 의미를 새겨보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주일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경을 풀어주실 때에(누가복음 24:30~35) (1) | 2023.08.04 |
---|---|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갈라디아서 2:20, 21) (0) | 2023.08.04 |
감사가 부르는 축복 (예레미야 30:18~22) (0) | 2023.08.02 |
모든 위로의 하나님 (1) | 2023.08.01 |
콩가루교회 비빔밥교회(에베소서 2:20~23) (0) | 2023.07.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