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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그루터기 신앙으로 살라!(이사야 6:11-13)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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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터기 신앙으로 살라!

이사야 6장 11-13절

서론

지금은 종영했지만 <맥가이버>라는 텔레비전 프로를 좋아했습니다. 그 TV 영화의 묘미는 극한 상황에서 주머니 뒤지고 헤쳐 나갈 방법을 강구하고 멋지게 위기를 모면하는 맥가이버의 능동적 삶은 많은 시청자들에게 즐거움과 용기를 주었습니다.

사실 맥가이버는 잘 생긴 남자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참새꽁지처럼 생겼어요. 그럼에도 얼마나 인기가 있는 지 맥가이버 머리가 있어요.

사람들이 왜 잘 생기지도 못한 맥가이버에게 매력을 느끼는가, 시련을 만났지만 결코 좌절하거나 서둘지 않는 삶의 자세 때문입니다.   

 

인생은 누구나 위기를 만날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위기, 건강의 위기, 사업의 위기, 실연의 위기… 이런 위기를 만났을 때 어떤 이들은 위기가 위험이 되지만 어떤 이들은 그 위기가 기회가 되어 개인의 삶을 더 풍성하게 하고 한 시대를 하나님의 품안으로 나아가게 만들기도 합니다.

 

인생의 위기도 맥가이버와 같은 방식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위기와 어려움을 당했을 때 지금 내 손에 있는 것, 내가 최선을 다해 할 수 있는 것을 통하여 어려움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 또 한 분을 여러분들에게 소개합니다.

1. 이사야는 기대가 무너지자 절망합니다.

6장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로 시작됩니다. 웃시야 왕은 선정을 베풂으로 백성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았습니다.

16세에 왕위에 오른 웃시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하게 백성을 다스렸습니다. 블레셋, 암몬을 공격하여 영토를 넓혔고 망대를 세우고 우물을 파서 국가를 번영케 했습니다. 그가 이처럼 크게 성공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가며 선정을 베풀었고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졌다"(역대하17:15)고 했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이사야는 왕족출신으로 왕과는 사촌간이라고 합니다. 이사야도 왕자였기에 웃시야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가까이했고 왕위에 올라 선정을 베푸는 것을 흠모했고 새 역사를 기대했던 꿈 많던 청년입니다.

그러나 웃시야 왕의 말로가 좋지 못했습니다. 저가 강성하여지매 그 마음이 교만하였고 악을 행하게 됩니다. 교만은 정신적인 질병 중에서도 거의 치료불가능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불가사의한 병이기도 합니다. 이 병에 걸린 사람만 빼고 모든 사람을 아프게 하며, 자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불행케 합니다.

웃시야는 제사장만이 분향할 수 있는 향단의 불을 주재하려다가 나병환

자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별궁에 고립되어 살다가 쓸쓸하게 죽어갑니다. 백성들은 완고함과 우상 숭배에 빠져들고 이사야는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 역시도 시대적으로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지난 날, 물질적으로 풍요를 구가했습니다. 마이카시대, 도시마다 빌딩과 아파트 숲을 이루었고 해외여행과 유학 붐이 일었습니다. 세계선진국클럽에 가입했다고 좋아했습니다. 모든 게 흥청망청 이었고 쓸만한 가구들이 중고품으로 취급되었습니다.

 

그러다 아이엠에프를 만났습니다. 환율은 치솟고 구조조정이라는 처방으로 대량해직과 실업과 파산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그 와중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개인의 기대가 무너지고 현실에서는 더 이상 바라볼 게 없는 암담함이 엄습합니다. 모든 꿈이 죽어버리고 삶의 희망은 사라져 버렸습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작년 한 해, 우리의 꿈이 죽던 해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사업장이 풍지박산 되어버린 해로 기록될 수 있습니다. 나의 희망과 사랑이 사라져버린 해로 남을 수도 있습니다.

꿈과 희망이 사라져버린 사람들, 그래서 하루아침에 길거리로 쫓겨난 사람들, 바로 이사야의 심정이 그런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2.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는 귀족 출신이기에 궁전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신분입니다. 그는 왕에게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왕궁은 그에게 늘 즐거움이었고 풍요로움입니다. 한창 국가가 강성해가고 있었기에 왕궁에 앉아있으면 군대들이 오가고, 승전 소식이 들어오고 뒤를 이어서 조공의 행렬이 들어오고… 좋은 시절에 태어난 이사야는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렸고 걱정없는 세월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종교적 둘러리였고 삶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없이는 뭔가 허전했지만 "하나님 없이는 못살아!" 정도의 열렬한 신앙인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희망은 웃시야였고 부강하는 왕궁에서도 희망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왕이 죽었습니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으면 이사야는 더욱 열렬한 웃시야 숭배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이사야는 절망에 빠집니다. 왕에 대한 개인적인 아쉬움과 앞날에 대한 절망입니다.

당시 로마제국이 건국되고 앗수르 제국이 점점 강성케 되며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속국들이 조공을 거절하고 신흥국인 로마나 강대국인 앗수르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백성들은 국가의 기운이 다하고 있음을 느꼈고 그래서 여론은 흉흉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대가 어그러지면 낙심하며 절망합니다. 세속주의에 빠지거나 신비주의로 기울어지거나 아니면 자포자기가 됩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성전을 찾았습니다. 사람과 세상이 더 이상 희망이 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이제 더 이상 사람을 숭배하거나 국가의 번영에 마음을 두지 않기로 작정했습니다.

그가 이와 같은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의 바른 마음입니다. 그는 균형 잡힌 삶을 살았습니다. 건전한 판단을 했습니다.

  

아이엠에프가 오면서 교회에 남성들이 몰려오고 있다는 것은 반가운 일입니다. 기도원마다 남성들의 기도하는 소리가 우렁차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두들 성전을 찾는 것은 아닙니다. 작년 술 소비량이 그렇게 높다고 합니다. 별의별 흉측한 사건과 범죄가 일어나고 희망 없는 사람들은 공격적이 되어갑니다. 사이비종말론이 더 극성을 떱니다.

교회를 찾았다고 모두들 희망을 발견하고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을 발견하지 못하고 절망합니다.

아직도 체면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인생의 고난 때문에 왔지만 예배에 참석해 가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가며 깨우쳐가며 영생을 확인하려는 강한 의지가 없기에 교회 안에서도 그저 그런 것입니다.

 

이사야는 성전을 찾았습니다. 성전에서 그는 보았습니다.

 

1절,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성전에서 그는 들었습니다.

 

3절, "거룩하다…"

성전에서 만나게 된 하나님!  그분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인간 왕은 언제 범죄할런지, 실망을 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비록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그래서 나라는 흔들리고 외세의 침략이 가까워오고 있지만 이사야는 하나님의 보좌를 보았습니다.

 

그 보좌는 높이 들려있는 보좌입니다. 나라는 왕이 주관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심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왜 어려움이 왔는가, 그 이유를 알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바로 신뢰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실망하고 국가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결국 하나님께로 돌아서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디서? 성전에서!

어디서? 예배하다가!

 

바로 우리의 성전은 하나님을 보여주는 곳이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으로 뜨거워지며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곳이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하는 최선의 정답이 무엇인가를 알아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만남이요, 하나님과 다이얼을 맞추라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곳에는 돌을 짊어지고 가야만 건널 수 있는 얕은 강이 있습니다. 강의 물결이 워낙 세어서 그냥 건너가면 떠내려 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들지만 돌을 짊어지고 건넙니다. 그 돌이 그들의 생명을 지켜줍니다.

인생에 위기가 고난이 왔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이런 돌을 짊어지게 하시는 지 바르게 해석하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떠내려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세속의 물결에 너무 떠내려가다가 인생에 파산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한번씩 위기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중의 누가 무거운 짊을 지고 가고 있다면 그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를 먼저 기도하십시오. 그들을 격려하십시오. 그 돌을 내려놓게 되기만을 바랄 것이 아니라 돌을 짊어지고 바르게 무사히 인생의 강을 건너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오늘 그들이 짊어진 돌로 그들은 더 성숙해지고 강을 제대로 건너는 법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3. 이사야는 그루터기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에게서 미래의 일들을 통고 받습니다. 앞으로 상황은 비극적이 된다고 합니다.

 

11절, "성읍들은…"

 

12절, 사람들은 하나님에게서 멀리 옮기어지고 토지들은 전폐되고 십분의 일 정도만 남게 됩니다. 십분의 일만 남겨진다는 예언 앞에 이사야는 가슴이 철렁! 합니다. 10만 명 중의 9만이 죽고, 100만 중의 90만이 죽는 참상… 그나마 13절, 십분의 일도 삼키운바 된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은 망해도 너무 망했구나...'

하나님은 이사야의 심정을 알았던 것 같습니다.

"이사야야! 삼키운 자들이 그루터기가 된다. 그루터기, 알지?"

그루터기! 죽었던 것 같지만 아주 죽지 않고 되살아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그루터기. 하나님은 그루터기의 역사를 이루어 왔습니다.

 

아벨이 가인에게 죽임을 당해 하나님의 의로움은 끝난 것 같았지만 아벨의 그루터기에서 셋이 나왔고 경건한 일가족을 이루었습니다. 대홍수에서 노아를 남겨주셨고 노아 통해 경건한 계보를 이루게 했습니다.

엘리야 시대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천명을 남겨주셨고 그들로 새 역사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황폐 가운데서도 그루터기와 같은 사람들을 남겨주시고 그들로 이스라엘은 다시 일어선다는 희망의 말씀을 이사야에게 주셨습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런 희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왕족이 되어 부족함이 없는 풍요로운 생활을 보냈지만 이제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고 백성들은 절망에 빠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요청했습니다.

 

8절 하반절,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희망을 전하는 전령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과감히 왕족의 옷을 벗어버렸고 특권을 버렸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전령사로 자처하고 나선 것입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망하고 남방 유다는 바벨론에 망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찌꺼기밖에 남지 않을 것입니다. 외국에 끌려간 포로들은 비참하게 될 것입니다. 가옥은 황폐하고 사람들은 10분의 9가 죽임을 당합니다. 남아있는 자들도 국가 재건에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약자들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룬다"(사 60:22)고 전하는 위대한 선지자가 됩니다.

 

작은 것이라고 멸시하지 말라고 합니다. 너의 손에 있는 작은 것을 찾아보고 그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시작하면 하나님은 천을 이루시고 강국으로 회복시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서 만민의 구세주 메시아가 탄생하실 것임을 전하는 위대한 선지자 됩니다.

 

대형빌딩 위의 간판작업이 마무리되어 일하던 사람들은 보조작업대를 철거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들 철수한 줄 알고 밧줄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한 사람이 내려가려고 하는 데 밧줄이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밧줄을 던져보았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개미처럼 아득하게 보이는 그 광고판 앞에서 마지막 남은 사람은 두려움에 떨었습니다. 그 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친구가 소리 질렀습니다. 친구도 그런 경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무개! 양말을 벗어 첫 실오라기를 풀어보게"

실오라기가 내려오자 거기에 밧줄을 묶었고 끌어올리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는 끌어올린 밧줄을 붙잡고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습니다. 보잘것없는 한 오라기의 실로 살 수 있었습니다.

 

절망해 본 사람만이 절망 중에 있는 사람을 격려할 수 있습니다. 절망의 쓴맛을 아는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에게 위로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사야 같은 경우입니다.

결론

나무가 잘려도 그루터기는 있습니다. 그루터기가 남겨있으면 소망이 있습니다. 보잘것없는 그루터기에서 싹이 나고 가지들이 뻗어나고 열매가 맺으며 벌거숭이산은 푸른 산이 될 것입니다.

자기 손에 있는 것은 항상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도구들입니다.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항상 내게 무엇이 있는가, 살펴보며 해결의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배를 통해 이런 환상을 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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