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지팡이와 막대기
시편 23편 1-6
서론
기습 폭우로 70여명 가까운 인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되었습니다. 이만한 인명피해라면 전쟁을 방불케 합니다. 자다가 물에 휩쓸어 죽었고 전기에 감전되어 죽기도 했습니다. 비단 이번의 폭우만이 아니라 교통사고로 한 해 죽어 가는 사람들이 수백 명이고 질병으로 죽는 사람들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지금은 생명을 담보 받을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전혀 예기치 않는 곳에서 죽음은 우리를 공격하고 미처 공격에 대비치 않았던 사람들은 생명의 위경 속에서 사라져 갑니다. 그야말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이럴 때에 시편 23편은 우리에게 무한한 위로와 안위를 주는 평안의 말씀이 됩니다.
1.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까?
본문은 다윗의 시편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양떼들을 데리고 항상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녔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골짜기에는 적의 공격이 있고 맹수의 공격이 있습니다. 함정도 있고 발을 헛디디어 절벽으로 떨어져 낙상하고 죽기도 합니다.
양떼들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나약하고 힘이 없습니다. 공격자에게 대항할 힘이 자신들에게 없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윗 역시 무섭고 두려웠습니다. 그에게는 일생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시편 23편의 시편을 만들어 암송하며 두려움을 견디어 내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언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누구에게 사망이 공격해 올지 모르는 음침한 골짜기를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젊은 사람들이 죽어 나갑니다. 영적으로 이단들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노회의 어느 장로님 사모님께서 이상한 교회에 나가면서 “왜 이렇게 좋은 곳을 몰랐던고!” 하더랍니다. 우리 주변에는 영혼을 노리는 이단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그들에 의히새 해를 당한 사람들만 해도 150만 명 이상이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사망의 골짜기에서 누가 우리들을 보호해 줍니까?
2. 주의 막대기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막대기”를 경상도 사람들은 “몽디”라, 전라도 사람들은 “몽뎅이”, 제주도 사람들은 “덩두렁 막개”라고 합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의 목자들은 항상 막대기를 가지고 다닙니다. 막대기는 지팡이와 함께 원시 목자들의 보편적인 장비였습니다. 다윗은 여기에 돌을 던지는 물매를 하나 더 추가하여 휴대했습니다.
목자들은 아버지의 양떼를 처음 돌보기 시작할 때부터 자기의 체격과 힘에 꼭 맞는 막대기를 골라 가지는 일에 긍지를 가집니다. 그는 숲에서 적당해 보이는 나무를 골라 캐냅니다. 인내심을 갖고 정성을 들여 깎아내고 다듬습니다. 끝은 뭉툭한 머리 모양을 이루게 됩니다.
목자는 이걸로 목표물을 맞추는 연습을 오랜 동안 단련합니다. 원주민 목동들은 누가 자기 막대기로 가장 먼 거리에서 가장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출 수 있는가 시합하기도 합니다. 노련한 목자들의 손에 들려진 이 원시적인 막대기의 위력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전율마저 느끼게 할만한 위력적인 힘을 소유합니다.
*막대기는 바로 주인의 오른팔의 연장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떠한 심각한 상황에서도 그의 힘과 능력과 권세를 나타내는 하나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 막대기는 위험에 처할 때 자기 자신과 그의 양떼를 완전히 지키기 위해 그가 의존하는 무기였습니다. 도둑의 공격을 받거나 맹수들의 공격을 받을 때 목자는 막대기로 양떼들을 지켜냅니다.
목자들의 손에 들려져 있는 막대기를 보는 게 양들에게는 안위와 위로가 되었습니다. 양들은 소심하고 겁이 많기에 주인이 없으면, “몽디” 막대기의 권위가 없으면 누우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손에 들려져 있는 막대기를 보면 안심이 되어서 편히 눕게됩니다. 2절에서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라는 말은 바로 그런 경우를 뜻합니다.
*목자들의 막대기는 권징할 때 사용되기도 합니다.
잘못된 양떼들을 다스릴 때에는 막대기가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양떼들이 무리에서 이탈하거나 절벽으로 나가거나 독초에 접근할 때 막대기가 가차없이 날라 갑니다.
말을 듣지 않는 양떼들에게는 목자는 일부러 막대기로 다리를 분질러 놓습니다. 걷지 못하고 꼼짝하지 못한 상태에서 목자는 양떼들을 보살핍니다. 목자와의 교감을 통해, 어루만져 주는 그 사랑을 통해 양들은 목자의 사랑을 알고 자신이 얼마나 그 동안 못되게 행동했는가를 깨닫게 됩니다.
*목자들의 막대기는 양떼들의 수를 검사하고 양털을 살펴보고 병균이 생기지 않았나 검사하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양털은 병균이 기생하기가 쉽습니다. 더운 지방이기에 기생충들이 많습니다. 목자들은 막대기로 양털을 헤집으며 병균이 옮지는 않는가,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막대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경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헤아리게 되고 우리 앞에 일어나고 있는 두려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권세를 확신하며 견디는 힘을 공급받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41:10)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 가운데서 일어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효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협력하여 선을 이룰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본심은 항상 우리를 걱정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선한 것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잘못된 길로 나가게 될 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양심을 후빌 것이며 칼처럼 찌를 것입니다. 우리는 잘못된 방향에서 길을 돌릴 것이며 사망의 길에서 빠져 나오게 될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복잡한 상황에서 우리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성경을 알고 성경에 대한 확신이 있다면 그만큼 목자의 막대기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3. 주님의 지팡이가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목자는 막대기만 아니라 지팡이를 소지합니다. “지팡이”는 경상도나 전라도나 “짝대기”라고 하데요. 이 짝대기, 지팡이는 그가 목자임을 알려주는 장비입니다. 지팡이는 오직 양들만을 보살피고 관리하는 일에 사용되는 독특한 도구입니다. 그것은 오직 양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사용되었습니다.
목자의 지팡이는 길고 가느다란 막대기로 되어 있고 대개 한 쪽 끝이 갈고리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습니다. 이 지팡이 역시 목자가 신중히 골라서 깎고 휘고 다듬어서 자기 손에서 꼭 들어맞게 만들어집니다.
*지팡이는 양들을 친밀한 관계로 끌어 모으는 역할을 합니다.
목자는 갓 태어난 새끼가 따로 떨어져 있을 경우 지팡이를 사용해서 가만히 끌어 올려 제 어미 곁으로 옮겨다 놓습니다. 새끼에게 목자의 냄새가 묻어있으면 어미는 배척합니다. 아울러 세밀한 검사를 위해서도 어린양이든 늙은 양이든 상관없이 자가에게로 끌어당길 때에 사용됩니다. 수줍고 겁이 많은 양들도 이런 식으로 끌어당깁니다.
*지팡이로는 앞길을 가리킵니다.
원하는 방향으로 양들이 나아가도록 가만히 밀어주는 무언의 압력을 가하기도 합니다. 지팡이로는 양들을 때리지 않습니다. 단순히 접촉하는 것만으로 양떼들에게 감동을 줍니다.
*지팡이로 양들을 건져내고 덤불 속에서 양들을 건져줍니다.
양들은 풀 한 입 더 뜯을 생각에 제 몸이 얽혀 드는 줄도 모르고 가시덤불 속으로 고개를 들이밀고 자꾸만 파고들어 갑니다. 그러다가 가시들이 온통 양털에 엉켜 붙으면 잡아당기고 버둥거려도 헤어날 수 없게 됩니다. 이럴 때 목자의 지팡이는 엉켜진 가시들을 떼어내고 양을 풀어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막대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상징이 된다면 하나님의 지팡이는 하나님의 성령의 상징이 됩니다.
보혜사 성령은 우리의 인도자가 됩니다. 우리를 예수께서 인도해 주십니다. “진리의 성령의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한복음 16:13)라고 하셨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위로자가 됩니다. 그 분은 넉넉히 우리를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은 일치감, 소속감, 안도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안위하십니다. 성령은 내 마음속에서 위로의 영으로 함께 하시며 우리를 선한 곳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시편 23편의 경상도 버전
여호와는 나의 목자 내사 답답할께 없데이...
시-퍼런 풀구디이 내 디비지고
저 쓴한 또랑가로 낼로 이끄신데이...
내 정신 챙기시사 올케 살아라 카심은
다 지 체면 때문이라카네
내 죽을 뻔한 골짜구디 껌껌한 데서도
간띠가 부어 댕길 수 있음은 그 빽이 참말로 여간 아이라!
주의 몽디-와 짝대기가 낼로 지키시고
내 라이벌 죽일 놈 문-디 앞에서 낼로 팔팔 키워 주시네
내 인생이 아무리 복잡다싸케도 저 양반이 맨 날 지키줄끼니까
내사 우짜든가 그 옆에 딱 붙어가 죽어도 안 떠날란다.
시편 23편 전라도 버젼
아따! 여호와가 시방 나의 목자신디 나가 부족함이 있겄냐?
그분이 나를 저 푸러브른 초장으로 뉘어불고
내 뻐친 다리 쪼매 쉬어불게 할라고 물가시로 인도해뿌네!(어쩨스까! 징한 거......)
내 영혼을 겁나게 끌어 땡겨불고 그 분의 이름을 위할라고
올바러븐 길가스로 인도해부네(아따 좋은그......)
나가 산꼬랑가 끔찍한 곳에 있어도 겁나불지 않은 것은
주의 몽뎅이랑 짝데기가 쪼매만한 일에도 나를 지켜준다 이거여!
아따! 주께서 저 싸가지 없는 놈들 앞에서
내게 밥상을 챙겨주시고 내 대그빡에 지름칠해 주싱께로
참말로 나가 기뻐블그마이......
내가 사는 동안 그 분의 착하심과 넓어브른 맴씨가
나를 징하게 따라당깅께로
나가 어찌 그 분의 댁에서 묵고 자고 안하겄냐.... (아따 좋은그.......)
시편 23편 제주도 버젼
여호와는 우리의 목자 아니꽈. 겅허난 양 우리덜에게 부족함이 어서마씸. 알아들엄수광?
그 삼촌이 양 우리들을 퍼렁한 들캐로 인도허여마씸. 겅허곡 퍼렁한 냇창으로 날 인도해부러마씸.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I want nothing"
그거 붙들고 있으면 됩니다.
결론
지금 세상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입니다. 하루 앞에도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과 성령님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의지하는 자들만이 평안을 소유하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에 내 마음을 맡겨야 합니다. 그래야 안전한 곳으로 우리 영혼은 인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들은 넉넉한 위로를 받으며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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