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믿음의 주체
누가복음 15장 17-24절
서론
설교학 교수들은 웬만하면 탕자의 비유를 본문으로 하는 설교는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만큼 잘 알려진 이야기이고 잘 알고 있기에 은혜 받기 힘든 내용이 될 것입니다.
본문은, 구원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 비유의 주체는 아버지입니다.
집을 떠나갔던 탕자가 눈물을 질질 흘리며 "아버지, 저, 왔어요"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탕자를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러브스토리입니다.
둘째 아들은 억지로 재산을 분배받아 멀리 나갔습니다. 그는 허랑 방탕하여 재산을 탕진했습니다. 그는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문득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용납을 믿었습니다. 아버지는 품꾼으로라도 자신을 받아주신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염치 불구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면 집으로 돌아오도록 한 것은 누구입니까? 분명 탕자 자신이 돌아왔습니다. 집으로 돌아가기로 생각한 것도 그였고 돌아오도록 한 것도 그였고 돌아온 것도 둘째 아들 자신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조금만 더 관심 있게 살펴보면 아들이 돌아오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용납. 아버지의 기다림. 만약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확신이 없었다면 그는 돌아오지를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끌어준 것은 바로 아버지 자신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탕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은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평양에 이기풍이라고 깡패가 있었습니다. 얼마나 못된 깡패인지, 아버지가 좇아오면 얼른 금을 긋고 "이 금을 넘어오면 내 아들이다!"라고 할만한 망나니였습니다. 평양에 교회를 지을 때 다 때려 부순 사람입니다. 그가 주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초대교회 7인 목사 중의 한 분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은 것은 이기풍입니다. 그러나 배후에 믿을 수 있도록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모든 죄인을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품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 없었다면 어찌 이 망나니가 하나님께 돌아왔겠습니까?
그렇다면 이기풍은 내가 하나님을 믿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불러주시고 구원해 주셨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성경은 바로 이런 이야기입니다. 성경의 사람은 형편없습니다. 아브라함-비열. 야곱-인간적 열심. 요셉-정직의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믿음을 주시고 선한 열심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무엇을 했는가를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무슨 일을 하셨나를 말해주고 있는 책입니다.
구원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에게 달려있습니다. 그래서 탕자의 이야기는 바로 아버지의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나의 인생은 하나님의 사랑의 스토리입니다.
하나님의 본성을 잘 이해할 때 복이 있는 것이며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2. 아버지의 주권에 달려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행복할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집은 간섭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품을 떠났습니다.
그가 얻은 것은 무엇입니까? 만신창이였습니다. 인간에 대한 실망, 허무함. 그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그가 돌아온 것은 아버지의 품입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안식이 아니라 "껄끄러움"입니다. 교회를 다니면 제재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하지 말라!" 간섭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의 심방. 그래서 그들은 신앙을 갖지 않고 신앙을 가지려면 간섭이 덜한 로마 가톨릭을 택하고 대형교회를 택해서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은 채 편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큰 교회이든 작은 교회이든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학과 앎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 어느 교회이든 아버지의 안식의 품이요 어떤 일을 당했다 해도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믿고 믿음으로 견딜 수 있게됩니다.
그러므로 간섭이 없다고 해서 좋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를 제대로 알려주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인생의 길은 자기에게 있지 않습니다. 사람이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음을 늘 의식하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인생에 늘 행복이 있고 평화가 있습니다.
1902년, 한 영국소년이 아침 식사를 하려 내려왔다가 신문을 읽고 계시는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신문에서는 영국에서 64년 만에 처음인 대관식 준비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그의 아버지가 말을 꺼내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기사를 써서는 안 되는 데 말이야"
어머니가 대꾸했습니다.
"뭘 말이에요?"
"여기 말이오. 며칠 날 에드워드 왕자가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즉위식을 가진다는 성명이 있는데 글쎄 `하나님의 뜻이라면'이라는 단서가 없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말이 소년의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대관식을 거행하기로 되어있던 바로 그 날, 에드워드 왕자의 맹장염으로 인해 식을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야고보도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들으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약 4:13-15)
탕자는, 자기의 인생을 자기의 힘으로 이루어나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돈만 있으면 모든 게 해결될 줄로 알고 그는 억지로 집을 나갔습니다. 돈은 모든 행복을 갖다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는 성공하고 금의환향할 줄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 것도 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불행은 "주의 뜻이면"이라는 단서를 생략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주권은 우리의 눈에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이 없이는 우리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매사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할 때 오히려 우리의 믿음은 강화될 것이며 믿음의 힘으로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종교개혁가이며 장로교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는 칼빈의 결혼생활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허약했습니다. 아내는 결혼 9년 만에 병사했습니다. 죽기 전, 칼빈은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아이들을 걱정하지 말아요. 내가 아이들을 책임지고 잘 키우겠소"
그때 부인이 대답했습니다.
"나는 벌써 그 아이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우리 장로교회의 중심 교리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입니다.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계획 속에서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교리는 성경의 것을 칼빈이 체계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칼빈조차도 인생에 비극이 왔을 때 그 사실을 잠깐 잠깐 잊어버렸습니다. 그는 현명한 아내를 통해 그 사실을 다시 깨달았고 그것을 교리로 체계화시켜 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주도하십니다. 아버지는 두 아들에 대해 나름대로 다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너무 성급했습니다. 때가 되면 아버지는 그에게 재산을 분배해 줄 것입니다. 그때에 집을 나가도 될 것이고 자기의 일을 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 성급했습니다. 아버지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큰아들도 성급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염소새끼 한 마리라도 내어놓으면서 친구들과 잔치를 베풀어준 적이 없다고 항의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소유가 자기의 것이 아닙니까?
자기가 마음대로 잔치를 베풀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이라도 그 잔치에 참여하면 벗들과 즐거이 지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두 사람은 기다리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계획을 다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실패한 몸으로 돌아왔고 타인의 즐거움에 인색했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알게 모르게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좇아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일이 잘 풀린다 하여 교만하거나 어려운 일을 당하였다 하여 지나치게 슬픔에 빠져서도 안됩니다.
우리 하나님의 걸음은 일정합니다. 그분은 항상 자신의 길을 걸어갑니다. 결코 늦거나 성급하게 굴지 않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도 항상 일정합니다.
아버지와 함께 농사를 짓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1년에 몇 차례 농작물을 소달구지에 싣고 근처 도시로 나가서 팔았습니다. 부자는 성격이 판이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사를 천천히, 순리를 좇아 살았고 아들은 성급했습니다.
어느 날, 그들은 소달구지에 농작물을 싣고 집을 나섰습니다. 아들은 빨리 걸으면 다음 날 시장에 내다팔 수 있다는 계산을 하고 재촉했습니다. 그때마다 노인이 말했습니다.
"천천히 가자. 오래 걸어야하니까"
"우리가 일찍 도착하면 더 좋은 값을 받을 수 있어요"
아버지는 대답 대신 모자를 눌러 쓰고 달구지에 누워 잠을 청했습니다.
네 시간쯤 갔을 때 아버지가 다시 말했습니다.
"네 삼촌댁에 둘러서 인사나 하고 가자"
아들은 화가 났지만 꾹 참고 들렸습니다. 삼촌 집에서 나온 아버지는 지름길을 마다하고 경치 좋은, 돌아가는 곳을 택했습니다. 초원이 나오자 "자고 가자"는 게 아닌가요?
다음 날 길을 걸어가다가 수레가 웅덩이에 빠진 농부를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여덟 시가 다 되었습니다. 도시 쪽에서 섬광이 일었습니다.
"도시에 벼락이 떨어졌나보다"
아들이 불평했습니다.
"아버지, 우리가 서둘렀다면 지금쯤 농작물을 다 팔았을 거예요"
"마음을 편히 가져라. 한 두 해 농사짓고 말일이 아니잖니? 네 인생을 더 많이 즐기는 게 중요하다"
오후 늦게 서야 그들은 산등성이에 올라 도시를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멈춰 서서 오래도록 도시를 내려다보았습니다. 도시는 잿더미가 되어있었습니다.
마침내 청년이 아버지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존경스러운 눈으로 말했습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의 의미를 이제 알겠어요."
그들은 히로시마를 등 뒤로 돌아섰다. 히로시마는 아침에 원자탄을 맞고 잿더미가 된 것입니다. 만약 그들이 서둘렀다면 그들도 잿더미가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도 우리 인생에 대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그분은 나의 인생의 전 레이스를 알고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매사에 그분의 인도하심을 믿고 기다리며 감사하며 따라가야 합니다. 성급하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결론
열 살 된 아들이 함께 놀아달라고 요청하자 아버지는 세계지도를 갈기갈기 찢어 던지면서 "세계지도를 다 맞춰놓으면 놀아주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세계지도를 짜 맞추려면 다섯 시간은 족히 걸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5분도 못되어 맞춘 지도를 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가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맞추었니?"
아이는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간단해요"
아이는 그림을 뒤집었습니다. 그림 뒤에는 큰 얼굴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 얼굴을 보며 지도를 맞혔습니다.
우리는 이따금 세계지도처럼 복잡한 문제로 행복과 기쁨, 건강과 평안이 찢어져 `도저히 맞춰지지 않을 것' 같은 절망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일이 틀어질 때, 예기치 않는 일들이 발생할 때 심히 노여워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우리는 이 불행도 견디어야 합니다. 이 불행은 우리의 영혼을 부드럽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믿는 그 믿음이 있는 사람은 자살하지 않고 꿋꿋이 견디며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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