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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은 교회의 미래이다!
에베소서 4장 13~16절
서론
유대랍비가 북쪽마을의 사정을 알아보려 두 시찰관을 보냈습니다. 북쪽 나라는 언제나 주변국의 위협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시찰관은 촌장을 찾아서 마을을 지키는 사람을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촌장은 경찰서장을 데려왔습니다. 시찰관은, 아니라며 다른 사람을 데려오라 했습니다.
촌장은 국경 경비대장을 데려왔습니다. 시찰관은 이번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마음이 갑갑해진 촌장은, 마을을 지키는 자가 경찰관도, 경비대장도 아니라면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요? 누구를 데려오란 말인가요? 물었습니다.
시찰관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마을을 지키는 자는 교사입니다.교사들에게서 마을의 사정을 알고 싶소.”
적어도 유대인들에게는 마을을 지키는 자는 교사입니다. 마을의 경비는 경비대장이 하고,치안은 경찰이 담당하지만 마을의 정신을 지키고, 미래를 지키는 것은 교사입니다.
오늘 교회교육주일입니다. 우리교회는 교회 규모에 비해 주일학교 교사들이 많습니다. 일반교사들도 11분이나 됩니다. 이런 교육적인 분위기 속에서 목회를 하게 되니 참 기쁩니다.
1. 학교교육은 인성교육입니다.
“교육”(敎育)은 영어로“education”입니다. 라틴어의“educatio”에서 유래한 것으로 “빼낸다”, “끌어 올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속에 있는 내부적 능력을 개발시키고 미숙한 상태를 성숙한 상태로 만드는 과정이 교육입니다.
그러면 교육은 무엇을 끄집어내고 무엇을 끌어올립니까? 속의 것을 끄집어낸다고 교육이 아닙니다. 교육은“인간의 가치를 높이는 과정”입니다. 사람의 가치와 인격을 높여주는 것이 교육의 원래 임무였습니다.
지금 학교교육은 어떤가요? 경쟁사회가 되다보니 자꾸 지식만을 끄집어냅니다. 성적을 올리고, 좋은 대학을 나와서 돈 많이 벌고 연봉 억대로 높여주고…그래서 성공하고 출세하고…이런 일은 교육이 아니면 안 될까요?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돈 많이 법니다.
교육은 돈을 벌고 성공 출세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문지식과 함께 속에 있는 인격을 끌어서 올려주는 인격형성 과정입니다.그러니 인성(人性)교육을 해야합니다.인성은 무엇입니까?인성(寅城)은 포항시로 편입된 영일군의 다른 이름입니까?인성(人性)은 개인의 성격을 뜻합니다.교육을 많이 받을수록 성품이 좋아야 하고 품격이 훌륭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한민국에 배운 사람들이 제대로 살고 있습니까? 오히려 사기 치고 높은 자리에서 부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수십억대의 재산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보다는 배운 사람들입니다. 배우기는 배웠는데 무엇을 배웠어요? 돈을 버는 법,남을 제치고 성공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정작 인성은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배운 사람들이 더 나쁘게 행동하기에 우리 사회가 공정사회가 되지 못하고 이 모양이 되고 만 것입니다.
학교에서 인성을 가르친다고 해도 심성(心性)이라는 게 뻔합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사람의 악한 심성을 말합니다. 사람 속에, 불의, 추악, 탐욕,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 수군수군 거림, 비방, 교만, 자랑, 악을 도모함, 부모 거역, 하나님을 미워함, 배약, 무정함, 무자비함(롬1:29~31)…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인성은 부패와 타락한 속성입니다.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렘17:9). 이런 심성에 교육으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은 숯덩이를 걸레로 닦아 깨끗한 무늬목으로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인간 인성이 본래 그러니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인간 인성을 넘어서지 못합니다.
돌고래는 교육으로 별의별 묘기를 연출합니다. 서커스단원들은 교육을 통해,탄성이 절로 나오는 묘기를 연출합니다. 그러나 인성은 안 돼요! 사람의 성격은 가르치고 훈계하는 교육 갖고 안 되는 사람들이 절대 다수입니다.
이것이 인성(人性)에 뿌리를 둔 인간교육의 한계입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인성교육마저 안 되고 있다니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지난번 부산 여중생 살인사건의 주범 김길태.두 살 때 대문 밖에 두고 간 것을 양아버지가 키웠습니다. 길에서 태어났다고 ‘길태’라고 이름을 지었습니다. 키운 보람도 없이 어려서부터 교도소를 제집처럼 드나듭니다. 막노동을 하면서 영치금을 넣어주고 교도소에서 나오면 사람 노릇을 하겠나…실 같은 희망을 품고 기다렸는데 역시나입니다.
그러다가12세 여아를 성폭행하고 살인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양아버지는 “내가 사람을 키운 것이 아니라 짐승을 키웠다”고 통곡합니다. 그러면서도 교도소에 있는 양아들이 배고프지 않나,살려 줄 수는 없나…염치없지만 경찰에 애원해 보는 것이 기른 정(情)의 아버지 마음입니다.
김길태를 사람으로 만드는 것.부모의 사랑이나 교육 갖고 한계가 있습니다.양아버지가 자장면 음식점을 했는데,조서를 꾸미던 경찰이 화가 나서“김길태 너 이 자식 자꾸 이러면 사형이다!”라고 했더니 죄송하다는 말은 없고“그래,사형해봐!근데 경찰아저씨 죽기 전에 자장면 한번만 먹고 죽읍시다.”했답니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힌 것은, 교육국가 대한민국 국민들, 김길태가 자장면을 먹고 싶다고 했더니 그 시간대에 자장면 배달건수가 5만 건을 넘었답니다. 남은 13세 딸이 죽어서 울고 있고 누구는 양아들 때문에 가슴이 미어지고 경찰들은 살인범을 찾아내기 위해 밤잠을 설쳤는데 살인범이 자장면 먹고 싶다는 기사가 떴다고 자장면을 즐기는 인간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입니까? 교육대국(大國)이라는 대한민국의 교육은 이처럼 인간의 가치를 높여주는데 얼마나 공헌을 해주고 있을까요? 이것이 인간교육의 한계입니다.
대한민국 교육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홍익인간 아닙니까? 홍익인간(弘益人間)남에게 이로운 사람!배운 사람이 대한민국을 이롭게 하고 소외된 사람들,가난한 사람들을 이롭게 하고 세상을 이롭게 하라고 교육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대한민국에서는 배운 사람이 남을 더 손해 보게 합니다. ‘이’롭게 하라고 했더니‘해’롭게 합니다. 교육이 인성교육이 되지 않고 성공출세교육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스승이라는 높은 자존감보다는 월급쟁이로 처신할 수밖에 없는 대한민국은 교육이 성공한 국가라 할 수 없습니다.
2. 종교교육은 선민교육입니다.
바울은 인성교육이 고상한 인간을 만들어 내지 못함을 알았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보아야 본성은 변할 리가 없습니다. 교육과 좋은 환경으로 어느 정도 사람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흉내를 내는 거예요.
그러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어떤 상황이 생기면 교육이라는 제어장치가 풀립니다. 그러면 배운 사람이나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교육을 받은 사람이나 교육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나 같습니다.
바울은 종교교육도 인간을 온전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는 율법교육으로 무장한 바리새인입니다. 어려서부터 율법교육을 받았지만 근본적으로 율법교육이 성민을 만들어 낼 수 없음을 선포합니다.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원하지 아니하는 악을 행하는 도다.”(18, 19절),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24절)탄식합니다.
그렇다면 한 차원을 높여 종교교육이 인성(人性)을 잘 계발하면 훌륭한 인품이 될까요?교회 잘 다니면 인성이 발달해서 좋은 인격자가 될까요?그러나 종교교육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거룩을 명하셨습니다(레11:44, 45). 거룩한 백성은 곧 성민입니다. 선민(選民)-성민(聖民)을 원하십니다. 선민-성민이 되기 위해 이스라엘에게 계명을 주셨습니다.
레위기28장의 말씀은 이방인들과의 차별화입니다.이런 계명으로 구별된 선민,성민을 기대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이 되었습니다.그러나 그들 선민교육은 어떤 잘못된 결과를 가져왔습니까?
바리새인들 보세요.바리새인들은 율법의 세목(細目)까지도 철저히 지킨다는 형식적인 순수함을 근거로 자신들을 타인과 우월적(優越的)으로 분리시켜 특수층으로 자처합니다.
이들은 율법에 대해 빠삭했어요.그러나 그 율법지식으로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까?예수님에게 가장 많이 비판 받은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입니다.그들의 율법지식이 종교심이 기도가 아까워요!그들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자기 의(義)에 빠졌고 자기 의(義)로 남을 경멸하고 무시했습니다.이것이 잘못된 선민교육이 낳은 인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선민의 대표인물들인 바리새인들을 혹독하게 비난했습니다(마23:27).그들은 자기 의(義)에 빠졌습니다.자기 의(義)는 타인을 무시하고 자기오만에 빠진 자기절대화입니다.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인간인성의 죄악성 때문에 종교의 역기능이 여기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남을 하시보고 스스로를 교만으로 치부하는 이런 종교 선민교육은 일반교육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하나님의 은혜가 빠진 종교교육이 인간의 인성교육의 목표를 찾는다면 자기 의(義)에 빠진 바리새인을 만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얼마나 지식이 많은 사람입니까?최고의 종교지식을 갖춘 사람이 아닙니까?그러나 그에게는 배움이 고정관념으로 굳어 있었습니다.나와‘다름’을‘틀림’으로 처리합니다.그래서 얼마나 초대교회 교인들을 힘들게 했습니까?오죽했으면 예수님께서 너 때문에 내가 힘들다~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믿는 사람들이 당하는 고통을 당신이 당하는 고통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바울이 나중에 이걸 알았습니다.그래서 탄식한 것입니다.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곤고한다는 것은 형편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나부터 문제아인데 남의 문제만 비난했다는 것입니다.무슨 말입니까?헛 교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이것이 종교교육의 한계입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누가 사랑스럽고 효자일까요?한 아들은 공부를 잘 하는데 공부 하지 못하는 형제들을 우습게 알아요!한 아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기도하지 않는 형제들을 우습게 알아요.한 아들은 공부도 충분히 못하고 기도생활도 열심히 못해요!대신 마음을 곱게 쓰고 정직하고 다른 형제들을 잘 대해주어요.이 아이로 집안은 웃음꽃이 핍니다.
부모 입장에서는 어느 아들이 사랑스럽고 훌륭합니까?세 번째 아이입니다.아이가 제대로 배울 바를 배우고 배운 대로 행할 바를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사람 노릇 아들 노릇 형제노릇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 사이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입니다.아이들이 모두 잠을 자고 있는데 한 아이가 열심히 기도합니다.기도하면서도 다른 형제들이 잠을 자고 있는 것이 견딜 수가 없습니다.그래서 아버지에게 가서 분노를 쏘아댑니다.형제들이 모두 신앙심이 없다는 거예요.
그때 아버지가 이런 말을 합니다.
“형제들을 비난하지 말라.기도하면서 형제를 비난하는 것은 기도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나쁜 것이다.형제들이 기도하지 않는 것이 눈에 거슬리거든 차라리 너도 자거라!”
오늘 한국교회는 이런 자기 의(義)에 빠지는 선민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교리적으로 총대처럼 곧고 뻣뻣한데 정작 예수님을 괴롭히는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종교교육조차도 인간의 심성(心性)을 온전히 인격자로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그런 사람들이 저 이슬람의 종교인들이 아닙니까?
유교의 에헴!했던 종교인들이 아닙니까?각목을 들고 싸우는 불교도가 아닙니까?그리고,지금 한국교회의 신뢰도를 추락시키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믿음이 있다는 사람들입니다.성경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경공부를 한 사람들입니다.이것이 종교교육의 한계입니다.
3. 교회교육은 영성교육입니다.
바울은 인간교육의 한계를 알았습니다.종교교육의 한계도 알았습니다.그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교육에서 교육이상의 가능성을 보았습니다.교육(敎育)은 잠재력을 끌어내고…가능성을 끌어내는 것 아닙니까?출세시키는 지식교육만을 끌어내니 사람이 안 됩니다.돈과 명예라면 누구도 몰라보고 예의도 없습니다.인성(人性)을 가르쳐 뭔가 될 것 같은데 인간의 뿌리 깊은 교만성과 기질,부모에게서 받은 성질은 어쩔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끄집어내야 참된 교육이 됩니까?우리 속에 있는 영성을 끄집어 내주어야 합니다.영성이 무엇입니까?하나님의 형상입니다.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성질입니다.이것을 끄집어내는 것이 성경교육입니다.이것을 끄집어 내주는 사람이 목사요 교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끄집어내서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이것이 교회교육이라면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모델이 있어야 하잖습니까?일반교육의 목표가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면 교회교육의 목표는 예수님입니다.예수님을 닮아내도록 하는 것!이것이 교회교육입니다.롤 모델(role model)도 예수님이고 목표도 예수님의 모양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이것이 인성교육,종교교육에 실망한 바울이 발견한 참 교육이었습니다.
바울은15절에서 말합니다.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라라!그가 누구입니까?예수님입니다. 13절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입니다.여기서 말하는 범사와 장성한 분량은 무엇입니까?예수님의 어떤 면을 배우고 어떤 면까지 자라나야 한다는 것입니까?
2절입니다.
“모든 겸손과 온유,오래 참음,사랑,용납…”
3절,하나 됨…입니다.
주님께서도 직접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와서 내게 배우라…나는 온유하고 겸손하다…나를 배우라”
이걸 배워야 합니다.
이게 진짜 교육입니다.종으로서 남을 섬기는 것!배울수록 남을 섬기게 되는 것!나를 덜 생각하고 남을 많이 생각하는 것!상대방을 대할 때 긍휼한 마음을 갖는 것!이것이 진짜 교육이고 이걸 배울 때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나고 예수님을 닮아낼 수 있는 것입니다.
교육(敎育)이란 한자는,교(敎)는 매를 가지고 아이를 길들인다,육(育)은 갓 태어난 아이를 살찌게 한다는 뜻으로 기른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으로부터 오는 훈계와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며 성장할 때 겸손과 온유의 품격으로 계속 자랍니다.예수님을 푯대로 자라는 사람은 교만할 수 없습니다.자란다는 것은 자신을 완성품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늘 부족해서 배우고 배우만큼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앞에서 일반교육을 한계를 비판했습니다.일반교육은 사람을 진정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뿌리까지 변화시킬 수 없다!인간처럼 지독하게도 변하지 않는 독종이 어디에 있나?그러면 교회교육은 우리를 변화시키고 있습니까?지금 교회마다…노회마다…총회마다…연합사업마다 난리입니다.싸우고 등을 돌리고 고소고발하고…싸우는 사람들이 술기운이 아니라 맨 정신으로 싸웁니다.그러니 더 독하게 싸웁니다.
성경교육을 안 받은 분들입니까?몰라서 그런 것입니까?배운 사람들이고,알만큼 아는 사람들입니다.그럼에도 왜 효과가 없습니까?이유는 한 가지입니다.우리는 예수님을 배운 것이 아니라 종교를 배운 것입니다.설교를 제대로 들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설교는 지키기 위해서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기분 좋게 하려고 듣는 것입니다.은혜는 하나님의 힘이 내게 강력하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내 귀가 즐겁고…지적인 충족이 일어날 때 은혜를 받은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변화가 없습니다.교회교육이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그래서 예수님에게까지 자라지 못하고 자라다만 짝퉁 예수쟁이들만 양산시킵니다.시어머니를 흉보면서 시어머니를 닮아간다고…우리는 바리새인들을 욕하면서 바리새인을 닮아가고 만 것입니다.닮으라는 예수님은 닮아내지 못하고 바리새인들을 닮아내고 만 것입니다.내 설교가 바리새인 교육을 하다니…여기에 설교자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결론
제가 성경에서 좋아하는 사람이 한30명이 되는데 그중의 하나가 갈렙입니다.갈렙은 온전히 하나님을 좇았다고 하나님에게 직접 인정을 들은 사람입니다.갈렙을“성장하는 노인”이라고 합니다.성장과 노인은 합성어가 될 수 없는 단어입니다.그러나 멋진 합성어입니다.
노인의 특징은 성장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하는 것입니다.만약 자라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 믿음은 나이와 관계없이 노쇠하고 있습니다.계속 자라고 있다면 청년입니다.교육은 우리를 계속 자라게 합니다.세상교육은 지식이나 정신적으로 자라게 하고 교회교육은 영성이 자라게 합니다.영성이 자라면 하나님의 형상을 드러내게 됩니다.
기독교는 교육종교입니다.교육을 통해서 성장했고 많은 사람들을 변화시켰습니다.우리 교회교육이 그냥 지식공부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우리의 설교가,성경공부가 삶을 변화시키는 생활 공부가 되기를 바랍니다.활동하는 믿음,봉사하는 믿음,섬기는 믿음이 되기를 바랍니다.그럴 때 영향력이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교사 여러분들에게 고마움과 함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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