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으라 이스라엘아
신명기 6장 4~9절
서론
서기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여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예루살렘은 로마군의 공격에 멸망당하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는 요하난 벤 자카이라는 위대한 스승이 있었습니다. 요하난은 아무도 모르게 성문을 빠져나가 로마의 장군을 만났습니다.
"마을에 작은 집 한 채가 있는 데 그 집만큼은 파괴하지 말아주시오. 그러면 성문을 열어주겠소"
"무슨 집이오?"
"도서관입니다"
장군은 허락을 했고 요하난은 돌아가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이 울고불고 소동을 부렸을 때 요하난은 말했습니다.
"울지 마시오. 로마군대는 모든 것은 다 약탈하지만 저 오두막의 책은 건드리지 않겠다고 했소. 우리 아이들은 오두막 책을 통해 하나님을 배워갈 것이며 그들은 조국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이오"
탈무드에 나오는 교훈적인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은 한 사회를 지키는 사람은 교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육이 바로 서 있고 존경받을만한 스승이 있는 사회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오늘 교사주일을 맞습니다. 교사주일은 어린이주일이나 어버이주일처럼 한국교회가 공통으로 지키는 주일은 아닙니다. 교사주일로 지키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대부분의 교회는 그냥 넘어갑니다.
그럼에도 오늘 우리 교회가 교사주일로 지키는 데에는 교육, 기독교교육만이 우리 한국교회, 늘빛교회를 바르게 세워갈 것이라는 믿음과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교사주일을 지키며 우리 교회가 교육이 바로 서 있기를 원하며 그래서 건강한 교회로 21세기를 맞이할 수 있게되기를 바랍니다.
1. 하나님은 부모에게 교사의 직분을 맡기셨습니다.
"들으라!"로 시작되는 오늘의 본문은 신명기의 대 법전을 요약한 것이며 이스라엘의 대헌장입니다.
이스라엘은 교육적 사명을 하나님에게 허락 받았습니다.
7절 "부지런히 가르치며" "강론할 것이며"
가르치고 강론하는 이 일을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말합니다. 7절 "네 자녀에게"라고 했으니 교육 사명의 일차적인 수임자는 부모입니다. 이스라엘의 부모들은 책임지고 자녀를 하나님의 자녀로, 조국 이스라엘이 원하는 사람으로 키워내야 합니다.
히브리어로 부모를 "호림" 말씀은 "토라"라고 하는데 호림과 토라는 "야라"에서 유래. 그래서 "부모"와 "교육"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같습니다. 부모는 "가르치는 자" "교훈하는 자' "어떤 모양으로 만드는 자"의 뜻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이스라엘에게 토라를 주었고 이스라엘의 부모는 자녀에게 토라를 가르치는 사명을 띕니다. 그래서 부모란 말은 토라를 가르친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정은 단순히 집이라는 뜻보다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가정은 집이요 회당이요 학교요 배움의 터전입니다. 집에서 먼저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되며 집에서 예배행위를 배우게 되는 곳이 이스라엘 가정생활입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자녀들은 가정에서 부모를 통해서 글을 배우고 하나님을 알게되며 토라, 성경을 배우고 회당을 알게됩니다. 그 일을 부모들이 감당합니다.
이스라엘에서 훌륭한 부모는 훌륭한 교사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며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명령받았습니다. 자기 자녀들은 자신들이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스라엘에는 전도가 없습니다. 내가 낳은 아이들은 내가 책임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일차적인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먹고 입히고 학교에 다니게 하는 것을 부모의 1차적인 목표로 생각하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스라엘 자식들은 부모 이전에 먼저 스승으로 대합니다.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는 은혜만이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게 해주신 부모님으로 항상 존경을 표합니다.
그들은 자기의 부모님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스승이셨던 나의 아버지는…" 만약에 "나의 아버지는..." 말했다가는 유대사회에서는 버릇없는 사람으로 업신당합니다.
"나의 스승이셨던…"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정치가들의 당리당략, 공무원들의 부정부패, 청소년들의 비행, 전국민의 사치행각…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가정, 가정교육이 무너져 있습니다.
내 자녀는 누가 키워주는 것입니까? 내가 키워야 합니다. 바른 국가관을 키워주고 시민의식을 심어주고 조국애와 어른 공경을 누가? 부모들이 책임지고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들의 역할은 제켜두고 교사들만 나무란다면 이 나라에는 소망이 없습니다.
2차대전을 영국의 승리로 이끈 처칠 수상의 이야기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 그를 위대한 수상으로 만들어 낸 스승들로 특집을 꾸몄습니다. 그 특집을 보고 처칠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내 스승 중에 빠진 사람이 있다"
"누구냐?"
"우리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큰 스승입니다. 우리들이 기독교교육의 큰 스승이 되어야 아이들은 믿음 안에서 자라날 수가 있습니다. 가정이 주일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들은 교사가 되어야 합니다. 아이들을 교회로 보내는 것만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 교육이 살아나고 나라가 살아납니다.
2. 부모보다 교사들을 더 존경합니다.
이스라엘은 회당(작은 학교)을 중심으로 사회를 구성해 나갑니다. 그들은 어느 나라에 가 있던지 열 가정만 모이면 회당학교를 만듭니다. 회당학교의 교사는 가장 똑똑하고 진실한 사람, 유능한 사람을 택합니다.
우리나라에도 지난날은 그랬습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교사가 되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이 있기에 우리 사회는 밝고 건강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교사 직분은 별로 존경받지 못하는 직분이 되었습니다.
여자들에게 교사라는 직분이 얼마나 좋은 신랑감인가? 했더니 아주 낮은 점수를 받았습니다. 교사는 고리타분한 월급쟁이로 우리 사회가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니 교육은 낙후될 수밖에 없고 스승은 점점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교사들에게 최고의 경의를 표합니다. 교사들 앞에서는 누구든 깍듯합니다. 남자들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심지어는 아버지와 스승이 물에 빠져 떠내려갈 때에도 스승을 먼저 구하라고 가르칩니다.
예루살렘에는 랍비 양성학교가 있습니다. `예시바'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정도에 해당될 것입니다. 그들은 머리에는 둥근 모자를 씁니다. 이들은 절대로 모자를 벗지 않습니다. 이유는 내 머리에 모자가 있듯 내 위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상의 표현입니다. 아울러 하나님 외에는 아무에게도 함부로 고개 숙이지 않겠다는 랍비로서의 권위, 자존심이 있습니다.
그러니 무슨 촌지가 있겠으며 비굴함이 있습니까? 수상 앞에서도 모자를 벗지 않은 선생의 권위, 스승이 바로 서 있는 사회, 그런 사회가 있기에 그들은 2천년 동안 나라를 잃고 유랑하면서도 제 나라의 민족성을 지켜나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교사들에 대한 존경심을 버렸습니다. 그것은 교사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권위를 떨어뜨려 버렸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촌지를 밝히고, 편애하고, 사회에서 본이 되지 못합니다.
부모들이 교사 흉을 아랑곳하지 않고 봅니다. 교사들의 부끄러운 모습이 그냥 텔레비전에 나갑니다. 그래도 한때는 존경받았던 전직교수출신인 총리에게 학생들이 밀가루 뒤집어씌우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교수의 머리를 깎아대는 학생들이 있는 나라가 어디 있습니까? 뇌물을 받기는 했어도 교육감의 수갑 찬 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나라가 있을까요?
교육현장이 회복되어야 나라가 살아납니다. 우리 한국교회의 힘은 교육에 있습니다. 잘 가르쳐야, 바르게 가르치는 스승이 있어야 21세기에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스승은 가장 존경받아야 하고 높이 우러러 경의를 표해야 합니다.
고대의 어떤 왕이 나라 안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을 찾아내 상을 주기로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추천되었습니다. 재력가, 의술을 갖춘 사람, 법률가, 또 다른 후보는 경제 분야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후보가 왕 앞에 나타났습니다. 백발의 할머니였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그녀의 눈은 지혜와 이해심과 사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왕이 물었습니다.
"이 사람은 누구인가? 이곳에 잘못 온 것 아닌가?"
왕의 신하가 대답했습니다.
"왕께서는 지금까지 모든 훌륭한 사람들의 이력을 보고 들으셨습니다. 이 여성이 그들 모두를 가르친 학교의 교사입니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쳤고 왕은 일어나서 자신의 왕관을 그녀에게 씌워주었습니다.
사람을 키우는 일처럼 귀한 일이 어디 있는가? 우리 늘빛교회는 교사들을 알아주는, 항상 고마움을 갖는 사람들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3.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이스라엘의 교육은 성공하고 출세하는 교육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교육입니다.
4절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하나님만이 유일한 절대 신(神)이시며 그 하나님을 참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유대 교육의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의식, 이것이 그들이 자손들에게 전해주어야 할 목표입니다. 또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생명 있는 관계 유지가 그들의 교육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아무리 세상에서 성공했다고 해도 하나님을 잊어버린 자는 배신자로 여깁니다. 그들과는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 가장 큰 성공이요 축복이라고 여깁니다. 이런 당당함이 결국은 유대인을 1등 국가로 만드는 요인이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더운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랍비들은 검은 옷, 모자를 쓰고 다닙니다. 가방 속에는 말씀이 있습니다. 얼마나 부자유스럽고 불편합니까?
랍비들은 머리가 가장 우수한 사람들입니다. 유대인 출신 노벨상 수상자가 많은데 랍비들은 그들보다 더 우수하다고 합니다. 그래도 그들은 땀흘리며 검은 옷에 검은 모자로 랍비생활을 하며 사람을 키우는 자신의 생애를 만족합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요 행복의 원천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자체가 행복이요 성공입니다.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8절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메어 기호를 삼으며… 네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지니…"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성경구절을 담은 작은 상자(메주자)를 부착합니다.
히브리대학의 모든 교실마다 메주자가 붙어있습니다. 히브리대학은 세계 10위 권 안에 드는 유명대학입니다. 히브리대학의 도서관은 엄청난 장서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수십 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을 배출해 낸 대학입니다.
그런데 그 대학은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을 공경하는 일을 최우선으로 하는 대학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결국은 세계에서 가장 복지시설이 잘 된 국가,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 노벨상 수상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나라를 만들어 냈습니다.
배운 사람들이 바로 서면 나라는 바로 섭니다. 우리나라는 배운 사람들 때문에 나라가 어지러웠습니다. 그 배움을 자기 자신들의 영달을 위해서 악용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배운 사람들을 "먹물!'이라는 말로 표현했을까요?
모세는 백성들에게 8절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이것을 테플린이라고 합니다. 작은 상자입니다.유대인들은 집집마다 이 상자를 부착합니다. 유대인의 좋은 집은 호화주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작은 상자가 잘 부착되어 있는 집을 말합니다.
그들은 집을 나서면서 테플린에 입을 댑니다. 자기 이마의 성경에 손을 댑니다. 하루 종일 어디로 가든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 앞에 입술로든 손으로든 발길로든 부끄러움이 없는 처신을 하겠다는 서약입니다. 그러니 그들은 바른 행동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교육이 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육, 하나님을 인정하는 교육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 건강하고 밝은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성공 위주, 출세 위주의 교육이 이 나라를 이렇게 망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교육만이 좋은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결론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싸움터에서 중상을 입고 죽어 가는 나이 어린 군인 곁에 군목이 엎드려서 묻기를 어머니에게 남길 말이 없냐고 했습니다.
"어머니에게 기쁘게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말씀해 주세요"
"또 없는가?"
"내가 다니던 주일학교의 선생님에게 내 대신 편지를 써서 보내주세요. 나는 크리스천으로 죽었다고요. 그리고 선생님의 가르침을 결코 잊지 않았다고 전해주세요"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군목은 약속을 지켰습니다.
몇 주일 후에 주일학교 선생님으로부터의 답장이 군목실로 배달되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군목님. 나는 바로 지난달에 주일학교 교사직을 사임했습니다. 왜냐하면 교사로서 하는 일이 별로 의미가 없기에 낙심 중 사표를 내고 그만 두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나는 그 동안의 주일학교 교사 직분이 결코 헛되지 않았고 귀한 영혼을 주님께 인도했다는 목사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내일 아침 목사님을 찾아뵙고 교사 직분을 맡겨달라고 부탁할 것이며 앞으로는 최선을 다해 그리스도께 충성하려고 합니다."
교사여러분, 구역장 여러분, 여러분들이 하는 일은 아주 작은 일인지도 모릅니다.
"내 하는 일들이 하도 적어 큰 열매 눈앞에 안 뵈어도"
그러나 교사직은, 구역장직은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입니다. 이 사역은 그 어떤 사역보다 귀중한 것이며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합니다.
그 동안 애써주신 교사 여러분, 구역장 여러분들께 감사드리며 앞으로 우리 늘빛교회가 잘 가르치는 선한 교회가 되기를, 그래서 21세기의 험한 공격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건강한 교회가 되기를 계속 힘써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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