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사도행전 2장 1~4절
서론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 운동을 할 때 그가 싸운 대상은 둘입니다. 하나는 이성주의입니다. 이성주의는 인간이 세운 공로로 하나님께 나아가고자 하는 것인데 가톨릭교회가 바로 이 바탕 위에 서 있었습니다.
두 번째의 적은 신비주의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의 신비의 체험에 집착해서 주관적인 신앙을 강조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바로 이런 것들에서 교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신 날을 성탄일이라 하고 성령님께서 강림하신 날을 성령강림일이라 합니다. 육신으로 오셨던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다시 오셨는데 성령강림절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성령님에 대한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늘은 성령님이 임했을 때 어떤 현상들이 일어났는가를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경건이 나타났습니다.
여기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이들은 경건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비롯하여 평소에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경건의 대명사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은 금식을 했고 음식을 구별했으며 기도생활을 했습니다. 대단히 경건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평소에 예수님의 친구로서 마리아, 창기, 세리들과 이방인들입니다. 경건과는 관계과 없는 이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분부를 받들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열심히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며 방안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 뭔가 뜨거운 불덩이 하나가 들어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 순간, 그들은 하나님을 강하게 의식했습니다.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그들은 하나님 면전에 나와 앉은 것 같았습니다. 그들은 자세를 고쳐 앉았고 그분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경건이 나타났습니다. 두려움이 그들을 경건케 한 것입니다.
로마 정부에 대한 두려움은 겁을 낳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은 염려와 걱정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은 경건을 가져왔습니다.
우리 주변에서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무속적인 영향을 받아서 그렀습니다.
무속 종교에서는 "강신" 즉 `신이 내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단 신이 내려 접신케 되면 정신이 몽롱해지고 무아지경에 몰입하게 되는 황홀상태, 즉 엑스터시라고 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자기의 의지, 생각이 없이 행동합니다.
기독교의 신자들 중에서도 성령의 역사를 이런 신접의 상태로 잘못 오해하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받았다면 온갖 해괴한 일들을 자행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오히려 성령이 임하게 되면 자의식이 뚜렷해집니다. 하나님과 자기 자신의 관계를 명확하게 알게되며 성경말씀과 이웃을 좀 더 잘 받아들이게 됩니다. 성령충만은 방종이나 무질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인식함으로 경건으로 나아갑니다.
2. 언어가 변화되었습니다.
성령이 강하게 임하는 순간, 그들은 엄청나게 뜨거운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마음속에 뜨거움이 있었기에 그들이 기도하자 혀가 말려 올라가고 방언을 했습니다.
그곳에는 15개국 이상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로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동시통역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소통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어떤 말로 했느냐가 아닙니다. 혀가 말아 올라갔다거나 신기한 말들을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의사소통이었고 복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들은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느꼈던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예수님을 본적이 없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신기한 언어를 통해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예수님께서 대속의 죽음을 하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기뻤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예수 안에서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서로 부둥켜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찬미를 했을 것입니다.
한국교회는 혀가 말라지고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을 자랑으로 알았고 그렇게 되면 무슨 남들이 하지 못하는 신비한 체험이라도 하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해서 방언을 학습시켰습니다.
방언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 방언은 복음을 알아듣게 하는 데 있습니다. 의사소통에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의사가 소통이 되고 있습니까? 오늘의 교회가 방언을 받았다고 하면서 마음의 소통이 끊어지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가 그만큼 약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허물어뜨리실 바벨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3. 기사와 표적이 일어났습니다.
사도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귀신이 쫓겨 가고 병든 자들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권능이었고 능력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었을 때 그들에게는 아무런 능력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귀신들렸던 자에게 망신을 당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았을 때 이적의 권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역사는 그보다 더 큰 것에 있었습니다. "함께 나눔"입니다.
2:44, 45 "믿는 사람이…"
그들은 자기의 것을 모두 가져왔습니다. 바나바 같은 이는 자기의 밭을 바쳤습니다. 서로에 대한 뜨거움이 결국은 자기의 것을 자기의 것이라 하지 않고 서로를 위해 아낌없이 내어놓았습니다.
이것은 기적이었습니다. 진정한 기적은 사랑입니다. 사랑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한국교회는 기적, 병고침 만을 외쳐왔습니다. 감기 하나만 걸려도 안수기도를 원했습니다.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있습니다. 나눔입니다. 천만 기독교인이 있는 데 입양이 이렇게 많은 것은 우리가 성령을 충분히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눔이 없는 것도 성령의 나눠줌의 역사가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죽어갈 때 그것은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사랑이 내부로 파고들면 사랑이 죽습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교회도 적절한 기후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사랑과 용납입니다. 성령충만 받으면 교회는 사랑을 나누게 됩니다. 넓게.
4.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랐습니다.
우리들은 성령님의 역사가 마술적인 것으로 오해합니다. 성령 받으면 하루아침에 기도를 잘하게 되고 능력을 얻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성령의 역사는 가르침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2: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사도들은 배움이 없습니다. 그들에게는 남을 가르칠 수 있는 지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에 대해서는 잘 아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는 전문가입니다. 중생을 압니다. 예수님의 본체를 압니다.
그들의 교실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모여듭니다. 그들은 성령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세상적인 지식을 꺾었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배움의 교실에 들어섰습니다. 배우게 되고 실천했을 때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받았습니다.
이런 역사가 성령의 역사입니다. 한국교회에는 이런 역사가 약합니다. 성령을 받았다는 사람들은 배우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가르침의 범주에서 벗어나려 합니다.
*혼자서 산을 찾아갑니다.
*은사주의자들을 쫓아다닙니다.
*남의 은사는 멸시합니다.
그것은 성령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코 유익하지 않습니다.
5. 그들은 증거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를 지나치게 신비한 은사 중심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는 바울서신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영적인 은사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는 이적과 예언과 방언을 사모하라고 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은 한 축입니다.
또 다른 한 축은 사도행전입니다. 사도행전의 성령의 역사는 증거의 역사였습니다. 그것은 말씀을 증거하는 데 필요한 권능입니다.
성령을 받았을 때 베드로를 비롯한 사도들은 담대해졌고 그들은 복음을 들고 거리로 뛰어나갔습니다. 속에 계신 성령님께서 그들을 가만있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받기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성령을 받으라고 한 것입니까?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증인이 된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역사는 증거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그분을 위해 내 자신이 손해를 감수하고자 하는 마음이 성령충만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도하지 않으면 식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론
어느 알콜중독자가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술을 끊게 되었습니다. 술집 앞을 지날 때에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반대편 상점에 25센트면 마음껏 우유를 마실 수 있다는 팻말을 보았습니다. 우유를 마셨더니 술 생각이 싹 가셨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성령의 강림을 고대하십시오. 성령의 충만을 원하십시오. 우리에게서 예수 충만이 나타날 것입니다. 그리고 세속적인 욕망들이 사라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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