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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배워야 성장한다!(마태복음 11:29, 3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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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워야 성장한다!

마태복음 11장 29, 30절

서론

대한민국의 현행 연령관련법은 55세 이상을 고령자라고 합니다. 백내장 수술을 하는데 환자 명찰에 보니 노환(老患)이라고 적혀있어요. 기분이 묘했습니다. 내년부터는 50~65세 이하를 장년이라 명칭을 조정하기로 했습니다. 원래 장년(壯年)은 일생 중에서 한창 기운이 왕성하고 활발한 서른에서 마흔 안팎의 나이를 말합니다. 이게 장수시대에 뒤떨어진 개념이 되다보니 이제는 50~65세를 장년이라, 장년 나이를 상향조정한 것입니다.

 

미국의 여류작가 도티 빌링턴은 <멋지게 나이 드는 법>에서 나이 드는 것 늙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고 합니다. 나이 드는 것을 또 다른 성장으로 봅니다. 무엇인가를 배우고 활동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를 갖는다면 늙는 게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랠프 윌도 에머슨도 우리는 성장할 뿐 늙지 않는다. 다만 성장을 멈추면 비로소 늙게 된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평생 성장하는 반면 어떤 사람은 일찍 성장을 멈춥니다. 심리학자들은 어린애들만 성장하고 20세쯤에는 성장이 멈춘다고 했습니다

 

뇌는 자꾸 쓰면 기능이 발달하고 안 쓰면 기능이 쇠합니다. 뇌를 열심히 쓰면 80세에도 30세 두뇌로 살 수 있습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톤은 80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창조적이고도 위대한 생각을 계속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결국 우리가 늙거나 성장은 교육에 달려있습니다. 노인도 계속 배우면 성장하고 젊은이도 배움을 놓아버리면 늙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교육은 노후의 최선책이다라고 말합니다.

 

문제는 배움도 나름입니다. 어떤 분은 90세에 영어를 배우고 대학에 다닙니다. 배움 자체는 참 좋지만 좀 아쉬워요. 꼭 그래야만 하나, 배움의 투자에 비해 효과가 너무 적습니다. 젊었을 때는 학문과 예술과 자신을 성장시키는 배움이 많아야 하지만 늙어서까지 자기지식과 정신과 사회활동을 위한 배움으로 제한시켜 버린다면 지식성장은 될 수 있어도 인격성장이나 내세 준비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철도 안 드는 것이지요!   

1. 교육의 내용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1) 하나님을 배우면서 성장해야 합니다.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라, 힘써 여호와를 알라! 고 합니다( 6:3). 여기서 힘써 '추적'을 뜻합니다. 여호와의 일거수일투족을 샅샅이 추적하라는 것입니다. ‘알라는 경험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결국 나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하나님을 알면 나를 알게 되고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삶이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바뀌게 되고 살수록 영적이 되고 내세에 더 깊은 관심과 친밀함을 느끼며 살게 됩니다. 이러면 늙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 가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자기전문 분야에서 은퇴하고 하던 일을 놓게 됩니다. 일종의 제대입니다. 은퇴는 새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보너스인생입니다. 은퇴이후는 자기분야가 아니라 하나님 분야에 대해 헌신하고 투자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산다는 것은 더 많이 성숙하고 하나님의 일을 많이 할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단지 장수무대는 자식들에게 짐이 될 뿐입니다.

 

이런 짐들 때문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할 때 너무 세속적인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는 부모들 때문에 인생이 무거워하는 자식들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2) 구원을 배워야 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무엇 때문에 수고하고

무엇 때문에 무거워하고 있을까요? 죄의 짐들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 죄사함을 누리고 의()의 길을 찾으려 했기에 오히려 착한 사람들이 사는 것이 더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라! 나를 알면 죄의 짐이 벗겨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공식을 아는 것이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육에 속한 사람-자연인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나이는 장년이거나 노년이어도 영적으로는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죄에서의 자유함을 누리는 성숙된 인생을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3) 성품에서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해 주시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죄사함을 얻지만 죄의 성향에서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도 겉사람이 나를 힘들게 합니다.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나이고 더딘 성화(聖化)와 나의 인격성숙의 걸림돌은 바로 나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노년의 특징은 분별력과 시야가 좁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고집으로 나타납니다. 젊어서는 내 열정이 너무 강해서 성령의 역사가 약하고 노년이 되면 고집이 나를 주장해서 성령의 통치가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굳어지는 것-석화(石化)되는 것입니다. 뼈가 석화되고 분별력이 석화되고 성격이 돌덩이가 됩니다. 석화가 되는 곳에 성령의 역사가 강력하게 나타나지 못합니다. 거역의 삶을 살게됩니다.  

 

이걸 약화시키는 법을 평생에 걸쳐서 배우고 실행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의 배움이 없다면 육에 속한 사람이거나 육신에 속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3. 교육 교사

그러면 누가 영적으로 우리를 성숙시켜줍니까? 신학교에서 배워줍니까? 물론 가르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성숙으로 그 배움을 연결하지 못하는 신학생들이 많습니다. 그러기에 목회자가 되었으면서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고 무서운 줄 모릅니다. 아직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성품의 휘둘림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지도자가 되고 선생이 됩니다. 인격에 숙성의 맛이 없고 감동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은 것을 배웠고 배움에 굶주려 따라다녔는데 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이 되었나요? 교사를 잘못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수고에서 벗어나는 길, 무거운 짐, 뭔가 눌린 것 같은 느낌에서 벗어나는 길을 잘못 제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이 그들에게 자유함을 주는 줄로 알았습니다. 목마른 사람에게 소금물을 주면 어떨까요? 웅덩이 물을 마시면 어떨까요? 더 목마릅니다.

 

유대 교사들이 이런 그릇된 방법을 보인 것입니다.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면 자유롭다, 의인이 된다. 이런 잘못된 교사들을 보이며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들어도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합니다. 잘못된 교사를 따랐기에 더 수고했고 더 무거운 짐에 허덕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진정한 교사는 누구여야 합니까?

 

1) 성경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지혜의 기초입니다. 바른 지식을 갖게 되면 바른 지혜를 터득하게 됩니다. 잠언에서 말하는 지혜 살아가는 기술입니다. 살아가는 기술이 있기에 인격이 형성되고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최고의 교과서입니다. 최고의 교과서를 갖고 다니면서도 성숙하지 못하고 바르게 성장하지 못하는 것은 지식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많이 아는 것은 오히려 인간을 더 번뇌하게 만든다고 말합니다.

 

연세가 많으신 분이 침상에서 성경만 읽고 있었습니다. 신문도 보시고 텔레비전도 보시지요, 했더니 이제 내가 들어갈 천국에 대해 열심을 내야지 두고 떠날 세상에 내가 왜 관심을 보이냐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숙된 자세입니다. 성경과 함께 하시는 성령님이 내 인생에 교사입니다.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 우리를 맡길 때 우리에게 성숙이 있습니다.

 

2) 예수님이 교사입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하니 옳도다 내가 선생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3:13). 내가 선생이다, 라는 말은 참 스승이라는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들을 것은 있어도 배울 것은 없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따르려 하다 보니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더 허덕이게 됩니다. 이단교주들의 가르침에 속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무거운 짐에 허덕입니까? 마치 악독 사채업자와 같습니다. 200만원을 빌렸는데 수천만 원으로 불어나 유흥업소에 몸까지 팔렸습니다. 얼마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에 시달린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까? 감언이설(甘言利說)에 속고 만 것입니다.

 

율법 교사들도 처음에는 그럴듯했는데 점점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부과했습니다. 그럼에도 율법의 짐을 벗어놓지 못하는 사람들을 볼 때 예수님께서는 불쌍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배우지 말고 내게 배우라고 합니다. 이 말은 초보 송아지에게 노련한 황소가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밭을 가는 법을 배우라는 주문입니다. 그러면 쉽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멘토가 되십니다. 항상 멘토를 눈 여겨 보십시오! 교회생활을 할 때 자기를 보지 말고 남을 보지 말고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분은 우리를 온전하게 하신다고 합니다. 제대로 반듯하게 밭을 갈고 바른 인생을 걷게 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3) 고난이 교사입니다. 

고난은 현재에서 과거와 미래를 향해 눈을 돌리게 합니다. 인생의 성취에서 인생의 의미로 방향을 전환하게 합니다. 자신에게 맞추었던 시선의 초점을 하나님에게 돌리게 합니다. 그래서 고난은 우리를 철들게 만들고 영적인 성장을 불러옵니다.

 

흑인 여성이 콩쿠르에서 1등을 했을 때 모두 기립박수를 했습니다. 누구에게 사사 받았느냐는 질문에 나의 스승은 고난입니다. 고난이 나를 성숙시켰습니다!”라고 대답했답니다.

 

고난이야말로 우리를 다듬는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고난 때문에 무너지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고난과 상처가 오히려 인격을 다듬어 냅니다. 그래서 성숙하게 성장시킵니다.

3. 교육의 목표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 발행인 말콤 포브스는 교육의 목적은 비어있는 머리를 열려있는 머리로 바꾸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영국의 철학자 스펜서는 교육의 목적은 인격형성이라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의 교육목표는 홍익인간이라는 말은 지난번에도 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교육목표는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왜 제자들을 부르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배와 그물을 버리고 따라나선 제자들에게 무엇을 내게서 배우라고 합니까?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게 배우라

 

1) 겸손입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 내놓을 것이 없는 위치에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나는 내놓을 의()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입니다, 라는 자기겸허입니다. 자기해체를 가져온 사람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만을 구하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있다고 가르쳤기에 자기의()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정죄하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니 비난당하는 사람도 수고했고 정죄를 하는 사람들도 마음이 무겁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남에게 못되게 해놓고 집에 돌아가서 마음이 편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교육의 목표를 겸손함에 두었습니다. 사단은 교만으로 범죄했고 아담도 교만함으로 죄인이 되었습니다. 교만은 지옥의 형벌을 가져옵니다. 하나님 앞에 겸손해야 구원을 이루고 사람들에게 겸손해야 쓰임을 받는다, 이것이 교육의 목표였습니다.

 

2) 온유입니다. 

온유함은 부드러움입니다. 고집이나 고정관념에서 수용성으로 바뀐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무슨 말에나 귀를 기울이며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해의 그릇이 크고 수용의 용량이 큰 것입니다. 자꾸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유함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드는 것이 예수님의 교육목표였습니다.

 

3) 쉼입니다.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쉼을 얻으리니 쉼은 안식입니다. 얻으리라는 찾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가르침으로는 이런 쉼을 찾을 수 없지만 내게 배우면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과 유전에서 얻을 수 없던 쉼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공부를 잘 하는 아이들이 자살을 하고 가출을 합니까? 공부를 했지만 쉼이 없기 때문입니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빵집기술자가 되고 요리사가 됩니까? 지식이 쉼을 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조차 쉼을 줄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지식이 있고 사람답게 사는데 필요한 지식이 있습니다. 교육이라는 말은 끄집어낸다, 는 것입니다. 성공하는 지식을 끄집어내고 성장하는 잠재력을 끄집어내는 것이 먹고 사는데 필요한 지식이라면 참다운 인격으로 만들어내고 성숙된 생애를 살게 하는 것은 명예와 관계된 지식입니다. 무엇이 참된 명예이고 참된 지식인가, 장년이후는 그런 지식을 파야하고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야 제대로 배우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이런 교육으로 자신을 성장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기독교는 교육종교입니다. 다른 종교들이 개인적인 기원과 정적인 수행생활에 몰두할 때 기독교는 교육을 통해 자기를 성장시켰고 남을 교육함으로 온전함을 세워나갔습니다. 유교는 가르침을 엘리토화() 해버렸고 불교는 대중들을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보니 유교의 가르침은 많이 배운 자들은 교만해졌고 불교는 기복주의와 혼합이 되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다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효과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배우기는 엄청 집어넣는데 선한 행동으로 인격으로 흘러나오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지 못하고 힘을 들게 만드는 것! 이것이 한국교회가 극복해야 할 문제입니다.

   

니체는 제자가 계속 제자로만 남는다면 스승에 대한 고약한 보답이다.”라고 말합니다. 배운 것만큼 실천하고 실행해서 좋은 사람들,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입니다. 그러려면 교육의 소중함을 알아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치고 실행해야 합니다. 교육주일을 맞아 하나님의 은총이 교사 여러분들에게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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