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 격려하며 삽시다!
사도행전 4장 36, 37절
서론
레이건 대통령 시절에 프랜시스 그린이라는 83세의 노파가 살았습니다. 그는 레이건 지지자였습니다. 정부 보조금을 받고 살았지만 매월 1불씩 공화당을 위해 헌금을 했습니다.
어느 날 백악관에서 초청장이 왔습니다. 그 초청장은 모금 파티를 위한 것입니다. 그 할머니는 그 사실을 모르고 돈도 없이 그냥 갔다가 백악관에서 제지당했습니다.
"명단에 없다. 기부금을 안 냈다?"
"무슨 말이냐? 나는 매월 1불씩 낸다"
옥신각신하고 있는 데 비서가 지나가다가 들었습니다. 대통령의 허락을 받아 안내했습니다. 놀랍게도 레이건은 그녀와 40분을 함께 했습니다. 기라성 같은 재벌들이 와 있는 데 대통령은 나오지 않자 초비상. 40분 후, 대통령이 웃으며 나왔습니다.
비서실장 : "사람들이 이렇게 기다리는 데 노파를 격려하는 것도 좋지만 어쩌자고 40분씩이나 걸려서 격려하는가?"
대통령 : "격려를 하다니? 내가 격려를 받았소. 선거를 바로 앞에 두고 나를 향해서 쇼를 한다느니 배우나 하라느니 별소리 다하는데 이 할머니의 순수한 사랑을 듣고 나니 신바람이 났소. 나는 선거에서 이길 것이오"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한 사람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다 위로가 필요하고 격려가 필요합니다.
일국의 대통령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위로가 필요 없는 사람이 누구라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 격려는 꼭 큰 것이 아니라도 좋습니다. 그 위로는 1불의 사랑이면 됩니다. 아주 하찮은 것에서 사람은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습니다.
1. 바나바는 사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초대교회가 시작되던 때는 초라했습니다. 그들은 사회적인 지위도 없었고 건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요주의 인물들이었습니다.
이런 때 요셉이라는 사람이 사도들 앞에 나왔습니다. 그는 자기의 밭을 팔아 교회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 일은 사도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사도들을 인정해 주는 것도 감사한 데 재산을 가져왔습니다.
사도들은 그의 믿음 앞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자기들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자기들은 주님을 좇을 때 빈손으로 좇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온 것입니다. 사도들은 너무도 큰 격려를 받았습니다.
사도들은 요셉의 이름을 "권위자"라는 뜻의 "바나바"로 명명해 주었습니다. 바나바는 사도들을 위로한 사람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위로를 받기 원했습니다. 도움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거꾸로 사도들에게 힘이 되었고 사도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는 진정한 위로자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위로의 주님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한쪽 강도를 위로했습니다. 어머니를 위로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모두 격려자입니다. 우리는 격려자로 거듭난 것입니다. 위로 받기보다는 위로하고 격려 받기 보다는 격려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개척하면서 위로에 목표를 두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거꾸로 되어 제가 위로를 받고 삽니다. 교인들이 보여주는 그 깊은 사랑 앞에 저는 많은 위로를 받으며 인생의 크고 작은 산들을 넘어왔습니다.
남을 위로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천사의 말을 하고 산을 옮길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보다도 더 세상을 유익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2. 바나바는 바울을 격려했습니다.
바나바가 초대교회의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교회가 부흥되었습니다.
비결은? 그는 큰 교사도 아니고 행정가도 아닙니다. 능력을 행사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평범한 목회자입니다. 그럼에도 그의 명성은 초대교회에 점점 높아갔습니다. 그는 위로에 능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왔습니다.
그때 초대교회에 미묘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사울이라는 사람이 개종한 것입니다. 사울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스데반이 처형당할 때 그는 현장에 있었습니다. 그런 사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고 개종했다는 것입니다. 모두들 그의 개종이 음모일 것이라고 의혹의 눈길을 보였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그야말로 "뜨거운 감자"였습니다.
사울 입장에서는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이겠습니까? 이런 때 누가 보증을 서 준다면? 그러나 그가 강성인물이고 유대교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컸기에 아무도 그의 진실성을 믿지 않았습니다. 잘못 편들다가는 같이 망신당합니다.
이때 바나바가 나섰습니다. 바나바는 그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바나바가 그들 앞에 사울을 소개했습니다(행9:26-30). 베드로를 비롯한 초대교회 신자들이 모두들 사울의 개종을 인정했습니다.
그의 신뢰는 사울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의 격려를 받은 사울은 믿음생활 잘하고 초대교회의 거목으로 성장하고 13권의 성경을 집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나바라는 한 사람의 격려가 없었다면 사울은 다시 유대교로 돌아갔을 것이며 초대교회는 큰 손실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큰 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말 한마디를 따뜻하게 해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려움에 처해있는 사람에게는 자신을 믿어주는 그 한 마디가 그 어떤 도움보다도 큰 격려가 됩니다.
3, 4년 전, 제가 어려움을 당할 때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목사님, 요즘 힘드시지요. 힘내세요!"하는 그 한마디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삭개오, 향유를 부은 여인, 간음하다 현장에서 들킨 여자… 이들을 격려했습니다. 남을 인정하고 말 한마디라도 남에게 잘 해준다는 것은 큰 격려입니다.
설교하고 나면 얼마나 곤고한지 모릅니다. 그 반응에 신경이 곤두섭니다. 이런 때의 말 한마디 "오늘의 설교는 저를 위한 것이었어요. 고맙습니다"라는 말은 큰 격려가 됩니다.
말 한마디는 하찮은 것입니다.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는 지나놓고 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 한마디는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는 생명 줄이 됩니다. 격려 한 마디로 걱정을 잃어 버립니다..
그러나 때로는 말 한마디로 사람을 크게 낙심케 합니다. 우리는 남을 인정해주는 말을 하며 삽시다.
우리의 커트라인을 낮추면 격려의 말이 나올 수 있습니다.
3. 바나바는 여러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바나바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의 사역은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역입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행 13:43)고 권면을 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사람들, 시험 당한 사람들, 자기의 욕심에 끌리어 사욕을 좇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 그의 권면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권면과 조언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침체상태에 있는 자들의 조언은 오히려 일을 더 그르칩니다.
바나바는 참으로 좋은 권면을 했습니다. 그의 권면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입니다.
*믿음의 길에서 떠나려는 사람들
*자기의 욕심대로 살려는 사람들
*성질대로 해결하려는 사람들
그의 격려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에 붙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권면은 은사입니다(롬 12:8). 바울은 위로의 은사를 상당히 강조합니다. 가르치는 은사 다음으로 위로의 은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나바에게서, 예수님에게서 위로를 살펴보면, 그분들은 무조건 감싸는 게 아닙니다.
사울에게는 진실이 있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에게는 그들의 죄들을 지적했습니다.
이것이 진짜 위로입니다. 잘못한 사람을 공연히 추켜세우고 잘한다는 것은 오히려 그 사람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은사는 성령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을 "보혜사"라 합니다. 보혜사라는 뜻은 "위로자" "상담자" "격려자"입니다. 성령은 격려하시는 분입니다. 성령 충만은 위로하는 마음으로 충만한 사람입니다.
결론
미국의 유명 연예인 중에 지미 듀란테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제 2차 세계대전의 참전 용사들을 위한 쇼에 출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습니다. 그는 너무 바빠서 시간을 낼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하도 사정하길래 짤막한 원맨쇼를 하고 내려오도록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그 날이 되니까 원맨쇼를 하고서도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10분, 20분, 30분이 흘러갔다. 마침내 듀란테는 인사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습니다.
쇼 기획자가 그를 붙잡고 물었습니다.
"나는 당신이 몇 분만 설 줄 알았는데 어쩐 일입니까?"
"나도 그럴 계획이었소, 그러나 결코 그럴 수가 없었소. 저기를 보시오"
기획자는 무대 틈 사이로 관객석을 바라보았습니다. 무대 맨 앞에 참전 용사가 앉아있는 데 둘 다 전쟁에서 한쪽 손을 잃은 사람들이었습니다. 한 사람은 오른팔을, 한 사람은 왼팔을 잃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의 팔을 마주쳐가며 지금도 박수를 치고 있었습니다.
위로라는 것은 큰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따뜻한 말 한마디, 박수 한번, 설교를 경청하는 그 눈길, 진지함. 그것은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시절, 서로 격려하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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