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절기도회2]
위에서 본 십자가;하나님의 공의
마가복음 15장 33-37절
이번 주간에는 “내가 본 십자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지난번에는 “밑에서 본 십자가”였고 오늘은 두 번째 시간으로 “위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밑에서 본 십자가”가 사람들의 시선으로 보는 역발상의 십자가라면 “위에서 본 십자가”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본 공의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리 독생자를 독하게 대하실까’,
‘십자가 없이도 구속사역을 할 수 있는 방법과 방식이 있을 텐데…’
이리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십자가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갈라디아에서 바울은 “때가 차매”(4:4)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고 말합니다.
때가 찼다고 할 때, 때가 무르익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 때, 시기는 여러 상황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 중심이 로마가 제국화되는 것입니다.
로마가 제국화가 됨으로 세계가 상당히 교류 교제 교통이 활발했습니다. 여러 나라들을 점령하다보니 도로가 좋아졌습니다. 헬라어, 라틴어가 곳곳에서 공용어로 쓰였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십자가 형틀입니다.
십자가의 형벌은 인간의 잔인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여줍니다. 십자가는
-육체적 고통
17절,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20절, “희롱을 다 한 후 자색 옷을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히고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정신적 고통
18절, “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고”
19절,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영적인 고통
34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십자가의 고통은 이처럼 고통의 삼박자가 두루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얼마나 단호하고 분노하시고 죄에 대한 독한 심판을 준비하시는가, 보여주는 형벌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페르시아에서 시행되던 십자가 형틀을 로마로 가져온 것입니다.
인간의 죄는
-34절에서 독생자조차도 외면하실 정도입니다. 독생자를 알면서도 죄를 덮어 씌었기에 외면하고 나 몰라라, 할 정도입니다.
사람들은 혐오스럽다고 조롱하고 하나님께서는 죄를 심판하다보니 십자가에 달린 독생자에 대해 시선을 돌리고 절규를 외면해야 했습니다.
여기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납니다. 죄를 향하신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대속적인 십자가 죽음을 당하지 않으셨다면, 십자가에 달리지 않으셨다면 우리가 하나님의 공의의 처벌과 심판을 당해야 합니다. 누가 이런 공의를 견디어 낼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처벌을 감내하심으로 우리가 벌을 받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얻게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메시야 전문사역자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 오시기 수백 년 전에 예언한 바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입니다.
4절,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5절,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6절,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여기에서 교환(交換)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몹쓸 죄인이고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 놓여있었지만 예수님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는 의인과 영생의 삶으로 교환되었습니다. 그 분이 죄인이 되시고 우리는 의인으로 교환된 것입니다. 아! 십자가는 교환의 장소입니다.
그래요! 기독교는 교환의 종교입니다. 징계를 받을 사람들이 평화를 누리는 삶으로 교환되는 곳입니다. 채찍에 맞아야 할 사람들이 오히려 어루만져줌을 받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죄인의 몸으로 들어왔다가 의인의 신분으로 교환됩니다. 집을 나갔던 탕자가 아버지의 사랑하는 아들로 인생이 교환되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실 물물교환이라는 것이 가격대가 비슷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는 교환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기에 하나님의 가격표에 조금도 교환이 될 수가 없을 정도로 미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보는 하나님의 관점은 공의에서 긍휼과 사랑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를 가격으로 환산하지 않고 독생자의 희생의 산물로 보시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위에서 내려다 보셨기에 가능한 셈법입니다.
우리가 구원문제에서 걸리는 부분이 여기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보혈로 값없이 사람을 받고 구원을 받았다 말을 하고 고백하지만 머릿속에는 “행위구원”이 들어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을 통한 행위 의인처럼, 우리도 선행을 해야 의인이 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게 완벽하게 됩니까? 안 되니까 구원이 왔다 갔다 합니다.
이제 눈을 들어 십자가를 위에서 내려다 보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위에서 보면 백번 천번 죽어도 쌉니다. 하나님의 공의에서는 심판 외에는 타협점이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 위에서 보았기에 십자가에 모아진 죄들을 모두 보았습니다. 우리가 한 달만 때를 밀지 않거나 머리를 깎지 않는다면, 한국인들, 세계인들이 때와 깎인 머리가 한 군데로 모아놓는다면 그 크기, 넓이는 어마어마합니다. 어떤 땅도, 창고도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한 자리에 모인 죄들을 공의로 대하시면 한 방으로 심판하신 것입니다.
죄가 처리된 곳에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임하게 되고 우리의 죄, 인류의 죄는 하나님께서 기억도 아니하실 정도로 도말해 주십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공의의 무서움이자 공의로운 처리입니다.
“밑에서 보는 십자가”,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까지 보지 못했기에 자기들의 수준에서 조롱하고 비웃고 학대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광경을 보시며, 어찌 나를 버리십니까? 라는 독생자의 절규를 들으면서도 공의의 심판을 감행하신 것은 바로 죄를 척결하기 위한 하나님의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때로는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나를 배려다 보는 시간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죄가 얼마나 악하고 우리의 성결을 좀 먹는 것인가, 알게 되고 자성을 통해 더욱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 십자가의 사람들이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모두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 설교는 라원기 목사님께서 쓰신 《다시 보는 십자가》(생명의말씀사)를 참고해서 작성되었습니다. 특히 제목들은 그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뼈대만 올려놓았기에 여러분이 살을 붙이고 다듬어서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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