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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가 맛있다] (성찬예식) 하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울라(요한복음13:21~3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6.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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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어깨에 기대어 울라

요한복음13장 21~30절

 

2007,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라크 침공의 이유가 됐던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비판에 시달리던 임기 말입니다. 언론인 존 드레이퍼와 나눈 대담집 ‘Dead Certain(절대적 확신)’에서 부시는 이런 질문을 받습니다.

대통령으로서 기대고 울 만한 사람이 있는가.”

임기 말에 인기가 있는 대통령은 거의 없습니다. 믿었던 측근들이 제 살길을 찾아 떠납니다. 그래서 어깨를 기대고 울만한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부시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어깨에 기대어 나는 당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이 울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내일도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이다.”

 

부시 대통령의 토로는 계속 이어집니다.

대통령직이라는 임무 자체만을 놓고 보면 자기 연민을 가질 수밖에 없도록 하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자기 연민은 대통령에게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것이다.”

 

대통령은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 특히 우는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참 고독한 직책입니다. 그래서 초강대국 미국의 절대적 권력도 사람들 앞에서는 강하지만 하나님의 어깨에는 기대어 울고 싶은 연약한 남자에 불과함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기대는 요한

본문은 십자가행() 전날에 있던 내용입니다. 예수님은 성만찬을 준비시켰습니다. 성만찬은 준비되었는데 누구도 발을 씻어주는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팔레스타인은 먼지투성이고 샌들을 신고 다닙니다. 유대인의 주식(主食)은 떡이요 손으로 먹습니다. 음식을 대하기 전에는 손을 씻어야 합니다.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기에 발도 씻는 것이 관습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은 성민(聖民)-거룩한 민족으로 외적 거룩에 공을 들였습니다. 집집마다 물동이가 있고 하인들이 발을 씻겨줍니다. 하인이 없다면 주인의 몫입니다. 이날 어떤 일인지 주인도 하인도 발을 씻겨주지 않았습니다. 제자 중의 누구라도 봉사해야 했지만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타이밍 때문입니다. 그들은 열렬한 환영을 받고 예루살렘에 입성합니다. 발을 씻는 일을 자청한다면 자리 배분에서 멀어집니다. 그래서 꼼짝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수님, 슬프셨습니다. 제자 하나는 배신할 기회만 엿보고 남은 제자는 누가 높은가, 재고 있습니다. 스승의 마음을 알아주는 이가 없어 고독하고 외롭고 허전합니다. 3년 동안 공들여 교육했지만 머리는 커지는데 겸손은 자라지 못하고 생활에서는 진보가 없습니다. 정말 울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기에 특별한 장면이 있습니다. 23, 요한이 예수님 품에 기댄 채 누워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요한을 편애하셨을까? 아닙니다. 요한이 예수님을 사랑했고 사랑을 느꼈습니다. 성만찬에서 끝까지 제자들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1). 성만찬에서 피를 흘릴 희생의 주님을 느꼈습니다. 예수님의 비장한 얼굴에서는 뭔가 긴장감이 돌았습니다. 그래서 더 친근하게 예수님에게 굴고 있습니다. 무언의 격려요 응원이요 위로입니다. 예수님도 요한의 어깨가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성찬은 내가 기댈 어깨를 찾는 것입니다. 누구의 어깨에 기대고 싶은가요? 누구의 어깨에 기대어 울고 싶은가요? 예수님의 어깨에 기대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던 그 어깨에 우리의 슬픔을 올려놓고 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과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어깨에 더욱 기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어깨는 따듯하고 든든합니다. 거기서 우리는 진정 큰 위로와 소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올려놓을 수 있습니다.

요한의 어깨에 기대는 예수님

겉모습만 보면 요한이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의 어깨에 기대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예수님도 요한의 어깨에 기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요한이 예수님의 품에 안겨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여러 번 등장합니다. 21장 부활하신 이후에도 같은 장면이 나옵니다.

 

미국 작가 댄 브라운은 추리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예수의 가슴에 머리를 묻고 있는 요한을 막달라 마리아라고 바꿔치기해 기묘한 추리를 만들어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연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화와 책이 나왔을 때 세상이 발칵 뒤집히고 기독교가 몰락할 것 같았는데 언제 그런 영화와 책이 있었던가요? 거짓은 잠시만 진리를 가릴 뿐입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기댄 이는 요한입니다. 그러나 요한의 어깨에 기대는 예수님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육신의 동생들이 있었음에도 십자가에서 운명하기 직전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부탁합니다. 너의 십자가를 내 어깨에 올려 멨으니 너는 네 어깨에 내 육신의 어머니를 올려 메라는 것입니다. 얼마나 요한을 신뢰했으면 요한의 어깨에 모친을 부탁했을까요? 그게 바로 요한의 어깨에 기대시는 예수님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요한의 총명함과 거리낌이 없는 소통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품에 머리를 기대고 말씀을 듣는 착하고 순진한 제자, 어머니를 맡기는 스승. 이런 신뢰와 소통의 모습이야말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어려움 속에서 더욱 간직해야 할 덕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중에 누구의 어깨에 기대고 싶을까요? 이제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어깨를 기대도 좋을 만큼 우리 어깨의 근육을 더 키워야 합니다. 우리의 품을 더 따듯하게 만들고 넓혀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어머니를 부탁하듯이 우리에게도 고난당하는 형제, 실패한 이웃들, 희망을 잃었던 사람들을 우리 어깨에 부탁할 것입니다.

 

결론

1992년 스페인 바르셀로나 올림픽 400m 육상경기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데렉 레드몬드는 경기 도중 150m 지점에서 오른쪽 다리 힘줄이 끊어졌습니다. 남들 앞에서 넘어진 것도 창피한데 훈련된 육상선수가 올림픽대회에서 넘어졌다는 것은 메달도 날아가지만 정말 창피한 일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창피하지 않습니다. 넘어진 것이 창피한 것이 아니라 일어나지 않고 불평하는 아들이 오히려 부끄러운 일입니다. 아들은 절뚝거리며 일어납니다. 혼자 뛰기에는 너무 무리입니다. 수많은 관중들이 박수만으로는 뛸 수가 없습니다. 지금 아들에게는 누군가의 어깨가 필요합니다.

아버지는 운동장으로 달려갑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어깨를 빌려주기 위해 운동장으로 달려 나왔고 아버지의 어깨에 의지해 아들은 완주했습니다. 데렉은 꼴찌를 했지만 아버지가 있어 완주했고 육상역사에 아름다운 꼴찌로 남을 명장면을 보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 해의 금메달리스트는 잊어버렸지만 아버지와 어깨동무를 하고 달리던 선수의 이름과 감동적인 부자의 동행은 오래 기억하는 것입니다.

 

시국(時局)이 어지럽고 사는 게 힘들 때입니다. 아직도 한국교회는 코로나의 터널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의 종들이 엘리야처럼 쓰러져 있습니다. 어려운 때일수록 하나님의 어깨에 기대는 것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어깨는 지금도 우리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어깨에 기댈 수 있는 사람들이 세상을 위해 어깨를 내놓습니다. 어깨를 내놓으십시오! 그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울도록 어깨를 빌려주십시오! 그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연출해야 할 명()장면입니다.

아버지는 누구일까요? 아버지는 어깨를 기대고 싶을 때 어깨를 빌려줄 분입니다. 울고 싶을 때 나이와 관계없이 품에 안겨 울 수 있는 존재가 아버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를 의지합니다. 아버지의 어깨에 기대는 심정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지금은 누구든 힘들거든 내 어깨에 기대어 울라! 어깨를 빌려주시는 우리 친구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어깨의 힘을 아는 사람들만이 거듭난 그리스도인이요, 용기가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성찬예식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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