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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설교가 맛있다] (고난주간기도회1) 밑에서 본 십자가;하나님의 역발상(마가복음 15:29-32)

by 강정훈말씀닷컴 2026. 3.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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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기도회]

밑에서 본 십자가;하나님의 역발상

마가복음 15장 29-32절

 

고난주간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희생을 통한 대속의 죽음으로 인류 구원이라는 영광으로 나아간 주간입니다.

기독교의 양대 산맥은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면 다른 성경지식에서 조금 부족해도 얼마든지 구원의 은총과 기쁨을 누릴 수 있고 확신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특히 십자가에 대해 어떤 시각, 관점을 갖고 있느냐로 그 사람의 신앙관, 생활관이 달라집니다.

 

이번 주간에는 내가 본 십자가를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겠습니다. 이 시리즈 설교는 라원기 목사님께서 쓰신 다시 보는 십자가(생명의말씀사)를 참고해서 작성되었습니다.

 

오늘은 그 첫 시간으로 밑에서 본 십자가에 대해 묵상합니다.

본문을 봅니다.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26, “그 위에 있는 죄패에 유대인의 왕이라 썼고

27, “강도 둘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니 하나는 그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십자가는 로마의 최고의 형틀입니다. 십자가는 원래 페르시아, 애굽, 앗수르에서 고문 형틀, 사형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어떤 중범자들은 광장에서, 그것도 죽은 시신으로 2,3일을 전시해 놓음으로 경고장이 됩니다. 십자가에 형틀에는 죄목이 있습니다. 이런저런 죄를 범하면 너도 같은 신세다! 라는 경고장입니다. 이런 경고를 통해 그런 죄를 짓지 않으면 나름대로 좋은 용도입니다.

 

로마제국이 십자가 형틀을 도입하면서 처형대상이 달라졌습니다. 이걸 사회질서를 위한 처벌보다는 권력에 대한 도전, 특히 로마제국에 반항하는 반역자들을 위한 사형틀이 되었습니다. 처형 형태가 잔인했던 만큼 로마시민에게는 사용하지 않고 이방인 반역자들이나 노예들이 죄를 지었을 때 본보기로 처형하게 되면서 로마제국의 권력을 지탱하는 힘이 되었습니다.

로마제국 하에서 십자가형을 받았다면 연좌죄가 적용되어 가문이 싹쓸이 당하고 집안이 풍비박산됩니다. 이처럼 십자가는 끔찍한 형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심판의 도구가 되어 있는 십자가를 오히려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역발상입니다.

 

그렇지만 당시에는 모든 것이 수면 위로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여전히 무서운, 끔찍한 형틀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십자가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골고다 언덕에 세 개의 십자가가 세워졌습니다. 특히 사람들은 가운데 십자가에 주목합니다.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어떤 마음으로 올려다봅니까?

 

우선 행인들입니다.

2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아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다는 자여

행인들은 사기꾼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네가 진짜라면,

30, “네가 너를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적을 이 때 행해보라는 것입니다.

 

31절은 종교교권주의자들입니다. 한 마디로 종교로 밥벌어 먹는 사람들입니다.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들 역시도 행인들처럼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기적을 요구합니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우리가 보고 믿게 할지어다 하며

 

여기에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욕합니다.

32,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들도 예수를 욕하더라

 

당시에는 십자가의 의미가 고정되어 있습니다. 십자가==처형=패가망신. 그러니 예수님의 언행이 이해가 되지 않고 철저히 사기꾼으로 몰아기고 있습니다.

특히 행인과 대제사장 서기관 교권주의자들은 십자가 현장에서 밑에서 올려다보면서 내린 주장입니다.

아래에서 십자가를 올려다보니 사기꾼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래서 빈정대고 조롱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이렇게 흉측한 것이기에 달린 사람도 흉측하고 십자가는 이렇게 끔찍했기에 달린 사람도 끔찍하고 십자가는 이렇게 초라했기에 달린 사람도 초라했습니다. 아래에서 십자가와 십자가를 올려다 볼 때 구세주의 면모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만이 진정한 구원자로 외쳤습니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이렇게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통해 이루어진 구원을 외쳤을 때 사람들 역시도 십자가 밑에 있었던 사람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좀 더 구체적으로 정리합니다.

 

고린도전서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십자가에 못 박힌 구세주를 전했더니 유대인들에게는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요? “거리끼는 것이요”, 한 마디로 자존심 상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아는 다윗의 혈통에 난 왕가 자손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나사렛 목수를 메시아로 떠 받드니까 어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가 거리끼어, 즉 장애물이 되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어떤 반을 보였나요? 다시 23,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어떤 것이다? 미련한 것이다.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죄수를 구세주라 숭배하니 얼마나 비상식적이고 몰상식적이고 미련하게 보입니까. 우리가 아무개 이단들을 구세주로 믿는 이들을 한심스럽다, 미련하다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현대인들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입니까? 기독교가 유럽에 들어가면서 악령들을 내쫓거나 집안에 우환이 생기지 않게 하는 부적(符籍)으로 사용했습니다. 우리 중에도 부적으로, 액서서리로 달고 다니기도 합니다. 영화등에서 보면 조폭이나 유흥업소 종사자들이 목걸이 장식으로 걸고 다닙니다. 특히 왜 그럴까요? 자신들의 죄들을 덮기 위한 장식품일까요, 아니면 내면의 괴로움을 성스런 십자가로 포장하기 위한 행위일까요?

 

이런 잘못된 관점으로 십자가를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들도 십자가 처형의 그 날, 골고다에 모였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참된 구세주를 보면서도 영접의 기회를 놓쳤을 뿐만 아니라 조롱하고 저주했습니다.

 

여기에 십자가를 제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바울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과 지혜를 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고백이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행진하던 막바지에 불뱀에게 물렸습니다. 불뱀은 날아다니면서 사람들을 해치는 치사율이 강한 맹독을 갖고 있습니다. 죽어가던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놋뱀을 만들어 장대 높이 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21:9). 훗날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자신의 죽음과 구원의 원리를 설명하셨습니다.(3:14~15). 놋뱀을 바라본 사람이 구원을 얻었듯이 십자가에 달린 자신을 바라보며 믿으며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저런 유형의 십자가는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의미가 180도 달라집니다. 십자가는 처형의 개념에서 구원의 개념으로 바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십자가의 용도를 다르게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알려면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하필이면 왜 십자가입니까? 가장 숨기고 싶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는 사실을 백만 천만번이라도 숨기고 회피하고 싶을 텐데그 반역의 전자 팔찌를 기독교의 상징으로 내세웠다는 말입니까? 그것이 미련하게 보이는 짓이요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 스캔들, 장애물이 된다는 것은 불을 보듯이 뻔한 일을왜 그렇게도 지혜 없는 일을 했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알았습니다. 십자가 외에는 죄를 처리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련하고 지혜롭지 못한 처사이지만 제자들은 십자가만이 인류의 죄를 해결하시고 처리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이런 방법 외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세상이 불쾌하게 생각하고 불편하게 여길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십자가에 달린 예수를 내 걸고 정면승부를 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다원주의로 흘러가는 이 시대에 십자가의 복음이라는 정면승부의 진검을 포기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구원의 유일한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자들은, 십자가를 앞세우는 정면 돌파를 하면서 주님께서 하셨던 가르침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016절입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뱀처럼 지혜롭게 살라

 

왜 하필이면 뱀을? 뱀은 음흉함의 아이콘이잖습니까? 거룩하고 신실한 제자들에게 왜 뱀같이 지혜로우라고 했을까요?

뱀은 생명력이 강하고 엄청난 번식력이 있습니다. 특이한 뱀 중에는 두 개의 생식기로 1시간~72시간 교미를 통해 많게는 한꺼번에 150개의 알을 깹니다. 알 대신 새끼를 낳기도 합니다. 이 무서운 번식력과 생명력! 그러기에 사람들은 뱀을 혐오하면서도 뱀을 숭배합니다.

자기를 혐오하는 사람들을 숭배의 대상으로 만드는 뱀의 능력초대교회는 이걸 해냈습니다. 뱀이 혐오의 대상에서 강한 생명력과 번식력으로 숭배의 대상을 만들어 버립니다.

 

초대교회 때 십자가는 최악의 형벌이고 혐오의 대상입니다. 십자가와 예수가 유대인에게는 꺼리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초대교회는 구원의 아이콘, 상징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로마인에게 기독교는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구세주로 믿는 우스운 종교였지만 로마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이 구원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제국은 십자가를 혐오하면서 십자가를 숭배하는 기독교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2천년은 십자가를 자랑하고 앞세우는 능력의 역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발상이 만들어 낸 위대한 승리입니다.

고난주간 한 주 동안 십자가의 복음을 끝까지 붙잡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설교는 라원기 목사님께서 쓰신 다시 보는 십자가(생명의말씀사)를 참고해서 작성되었습니다. 특히 제목들은 그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뼈대만 올려놓았기에 여러분이 살을 붙이고 다듬어서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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