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난절 기도회4]
옆에서 본 십자가;하나님의 은혜
누가복음 23장 39-43절
이번 고난주간에는 “십자가의 영성”에 관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내가 바라본 십자가”라는 큰 제목 하에,
제1일에는 “밑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워진 중앙의 십자가, 예수 그리스도가 달린 십자가를 밑에서 내려다보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십자가로 보였을까요? 죄인의 십자가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좀 더 주의 깊게 올려다본다면 하나님의 역발상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지요!
제2일에는 “위에서 내려다본 십자가”입니다. 이 십자가에는 하나님의 공의가 들어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드리기 위해 죄없는 신분이면서 죄인으로 자처하시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이루어 드리려고 달려있는 십자가입니다.
제3일에는 “매달려서 본 십자가”입니다. 이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보는 십자가입니다. 여기에는 외면서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십자가입니다.
오늘 제4일에는 “옆에서 본 십자가”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좌우에 달렸던 강도들이 보고 있는 십자가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기독교의 상징에 대해 사랑의 종교다, 십자가의 종교다, 희생의 종교다… 라고 말합니다. 모두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 상징들은 어느 한 쪽만을 보여줍니다.
구약시대 성도들에게 여호와의 종교는 “사랑의 종교다” 한다면 고개를 갸우뚱했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종교라면 발칙한 말이라고 고함을 질렀을 것입니다. 희생종교다 하면, 짐승제사를 드리기에 어느 정도 수긍했겠지요.
기독교의 진정한 정체성은 은혜입니다. 은혜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 개념으로 기독교는 은혜의 종교입니다.
아담 이후의 모든 죄를 덮고 죄에서의 사함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일에는 첫째도 은혜요 둘째도 은혜로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은혜가 있었기에 하나님의 사랑도 우리에게 흘러왔고 십자가 사건도 은혜의 사건입니다.
은혜는, 자격 없는 자에게 거저 주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호의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는 대상에게 내리는 무조건적인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이 공의를 집행하는 십자가에서 나타난다는 것을 보면 은혜가 더욱 강렬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1. 십자가의 한 강도에게는 심판이 나타났습니다. 공의에 의한 심판입니다.
당시의 십자가 처형은 가장 악독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본보기로 죽이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이 아니더라도 두 강도는 천국은 감히 바라보지도 못할 사람입니다.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까지 달려 있다가 새와 짐승에게 다 뜯기고 비참하게 죽어갈 악명 높은 강도들입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같이 달리셨습니다.
주님께서 탄생하셨을 때 마구간의 짐승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제 죽으실 때마저 짐승 같은 강도들에게 둘러싸여 있습니다. 주님은 강도 취급을 받으시며 살아왔습니다. 강도처럼 밤에 잡히시고 강도 바라바 대신에 십자가 형틀에 달리시고 강도들과 함께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선지자는 53:12에서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으며 돌아가신다”고 예언한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마땅히 우리가 서야할 입장과 마땅히 우리가 당해야 할 일들, 곧 사형선고가 내려진 범죄자의 자리, 행악 자의 자리, 수치의 자리에 서시사 우리를 대신하여 수모와 고통과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들에게마저 조롱 당하셨습니다. 한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욕보이고 저주했습니다.
39절. “달린 행악 자 중 하나는 비방하여 가로되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는 십자가에 달렸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아래서의 삶이야 어떻든, 마지막 죽어 가는 그 순간만큼은 진실해야 하고 남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하는 데도 그는 남을 비방하며 자기의 고집을 버리지 않고 있습니다.
조금 전, 그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감동어린 기도를 들었잖습니까? 남을 위한 용서의 기도. 자기를 조롱하여 못박은 사람들을 위해 용서해 달라는 기도. 그 기도를 들었으면 마음이 녹아지고 그 사람에 대한 존경심이라도 일어남직한 데도 한쪽 강도는 예수님을 같이 조롱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자신의 죄는 더 큰데도 죄가 없는 척 남을 비판하고 죄인 취급하는 경우 말입니다.
한쪽 강도는 어떤 구원도 받지 못했습니다. 자기의 죄 값으로 죽어간 것입니다. 그보다는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 더 큰 죄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실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중 범죄 했을 때 하나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죽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놋뱀을 장대에 달아 구원해 주셨습니다. 보기만 하면 고침 받을 것을, 바로 그 옆에 있었으면서도 고집으로, 인간의 지성으로 판단하여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멸망해 갑니다. 단순히 죄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거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인정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변호사도 없이 서게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변호할 것입니다.
“내가 무슨 죄가 있소?”
“나는 양심껏 살았소!”
“내가 알고 있는 예수쟁이들은 나보다 행동이 훨씬 못했소. 그들이 천국으로 들어가고 나는 못 들어간다면 하나님의 정의는 엉터리요!”
자신 있게 자신을 변호할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십니다. 영광스러우신 하나님, 죄라고는 가까이 접근도 못하실 그분, 그분을 뵙는 순간 그들은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이었음을 압니다. 자신들이 살아온 삶이 얼마나 때묻은 세월이었음을 압니다. 나름대로 양심 껏 살아왔으나 세월이 흐르며 작은 죄들이 쌓여 큰 죄인을 만들어 갑니다. 우리는 그게 죄 인줄 모르고 죄가 쌓여 가는 줄 모르기에 인간이 세워놓은 법을 지켰다고 하여 의인이라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운전하시는 분들, 교통순경에 딱지 뗀 적은 없으나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이 교통법규 어기면서 운전해 왔나요? 누가 몰래 카메라로 우리의 운전했던 것을 찍어놓았다면 누가 법규를 어기지 않았다고 우길 수 있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대 앞에 설 때 아무도 그 심판을 모면할 길이 없습니다.
한쪽 강도는 회개하지 않은 사람,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은 사람, 하나님의 자비로운 구원을 바라보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입니다.
예수님은 두 강도 사이에 달리셔서도 교훈적인 생애를 보려주고 있습니다.
2. 한 강도에게는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한 강도도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조금이라도 덜 완악하지 않았습니다. 그도 처음에는 다른 강도와 함께 욕했다고 했습니다.
마 27장 44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그도 다른 강도처럼 세상을 저주했습니다. 아래의 사람들을 위해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해서도 조금의 동정심이 없었습니다. 함께 예수를 조롱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용서의 기도를 들었습니다.
“저들의 죄를 용서해주소서….”
감히 나올 수 없는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바로 자신을 위한 기도에도 해당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인격에 사로잡혔습니다. 자신들은 모두를 저주하고 온갖 욕설을 퍼붓고 있는 데 예수님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습니다. 원수들을 위하여 용서의 기도를 할 때 한 강도의 마음은 감동으로 가득 찼습니다.
자신은 죄인이며 예수님은 구세주이심을 알았습니다. 그가 다스리고 있는 나라가 실재(實在)함을 알았습니다. 그는 즉시로 뉘우칩니다. 그는 한 강도를 꾸짖으며 자신의 구원을 예수님에게 부탁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용서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강도를 향하여 즉석에서 선포하셨습니다.
42절.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헬라어에서 “진실로” 라는 말은 “확신” “단언”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한쪽 강도의 구원을 단언하신 것입니다.
한쪽 강도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무엇으로? 그의 선한 행위로? 그는 영혼은 구원을 받았으나 육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주님을 위해 냉수 한 그릇 떠드린 적이 없습니다. 그의 손이 못 박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발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한발자국도 옮기지 못했습니다. 그의 두발이 못에 박혀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죽어갔습니다.
선행을 한 것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왜? 자신이 죄인 됨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한 것입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가능한 것입니다.
두 강도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구원은 무엇인가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만 가능합니다. 왜 같은 상황인데도 한 강도는 회개하지 못하고 다른 강도는 즉시 마음을 주님께로 돌렸을까요?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한 강도의 마음에는 자비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는 완악했습니다. 다른 한 강도에게는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로 마음을 열고 하나님의 자비 앞에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우리도 수없이 죄를 짓습니다. 우리는 깨어지기 쉬운 사람들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들을 감싸시며 주님께로 돌아오도록 마음속에 회개의 영을 주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입니다. 위대한 교훈은 십자가 위에서 나왔습니다.
결론
네덜란드의 화가 고흐는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는 벨기에의 탄광에서 일을 하며 전도했습니다. 어느 날 한 노동자가 입고 있는 색다른 옷에 눈이 끌렸습니다. 이 노동자는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있었습니다.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오니 취급에 주의할 것"
그 순간 고흐는 새로운 깨달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그 날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습니다.
"정말 인간이란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구나. 나는 전도사라고 하지만 얼마나 많이 깨어지는가? 하나님의 은혜에 나를 맡겨야 한다."
우리도 언젠가는 세상을 떠날 것입니다.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의 긍휼만을 간청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구원을 믿고 살아가는 모두들 되기를 바랍니다.
[이 설교는 라원기 목사님께서 쓰신 《다시 보는 십자가》(생명의말씀사)를 참고해서 작성되었습니다. 특히 제목들은 그 책에서 가져왔습니다]
[뼈대만 올려놓았기에 여러분이 살을 붙이고 다듬어서 사용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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