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야곱, 130년과 17년의 생애
창세기 49:28~33
서론
새 강단을 들여놓고 처음 하는 오늘의 설교는 조금은 불편하게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인천초등학교 여자아이 살해범 17세 김모양 재판으로 충격에 빠져 있습니다. 김양은 지난 3월에 한 공원에서 8세 여아를 유인해 목을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훼손한 혐의로 재판 중입니다.
지금까지 이만한 살인사건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번 경우는 많이 달라요! 여자 아이 시실을 훼손하고 동성애를 하는 여자인지 공범인지⋯ 폐도 잘라주고 손가락도 전달했답니다.
김양은 아이큐가 143, 당연히 공부는 상위권, 머리는 좋았지만 수치심이나 도덕 감정은 거의 제로, 틈만 나면 거울보고 유치장에서 피자 주문하고 감호소 3주간에 5㎏ 늘었답니다.
동료 수감생이 "피해자 부모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나도 지금 힘든데 내가 왜 지금 피해자 부모한테 미안해해야 하느냐"고 답했습니다.
김양은 자신이 다중인격장애라 주장합니다. 일종의 '해리성(解離性) 장애'입니다. 해리성 장애를 겪는 사람들은 끔찍한 일을 저질렀을 때 그런 사실 자체를 모릅니다. 나중에 기억이 나면 몸서리칩니다. 자신도 모르던 '자기 안의 괴물'을 발견한 거니까.
김양은 자기 안에 A(좋은 인격)와 J(나쁜 인격)라는 두 개의 인격이 있어 서로 왔다 갔다 했다고 주장합니다. 두 개의 인격체가 바뀌는 걸 알고 있다는 얘기에요. 그러니 다중인격장애와는 다릅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정신장애보다는 사이코패스 성향이 강하다고 결론을 짓습니다.
오늘 야곱을 정해놓고 왜 다중인격장애를 논하는가? 다중인격은 내 안에 두 개 이상의 다른 사람이 공생하는 정신장애입니다. 지금까지 가장 많은 다중인격은 1955년 생, 빌리 밀리건입니다. 대니얼 키스의 <빌리 밀리건>을 읽어보니 끔찍해요! 5살 되던 해 최초로 제2인격 '크리스틴'이 생겨났고, 9살 즈음 양부로부터 성(性)학대 당하며 24개의 인격이 나타납니다. 나도 모르는 사람이 내 안에 살면서 내 행세를 하면서 여러 행동을 일으킨다면 불행한 일입니다.
정신병으로서 다중인격이 있다면 성격적으로 다중행동이 있습니다. 김양은 자기 안에 좋은 인격 A와 나쁜 인격 J가 있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다중적 인물이 야곱입니다. 야곱은 지금 종말에 이르렀습니다. 그의 나이 147세! 많이 살았지요! 야곱의 인생을 둘로 나눈다면 130세와 17세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야곱의 130년, 에서로 살다!
야곱은 성경에서 부모에게 사기를 친 첫 번째 인물입니다. 장남에게 상속되는 축복권을 얻으려고 눈 먼 아버지를 속입니다. 털이 많은 에서처럼 손목에 털로 위장하고 목소리를 에서처럼 가장합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눈 먼 이삭이 묻습니다.
“⋯너는 누구냐?”(창 27:18)
야곱이 대답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 에서로서이다.”(19절)
에서는 사냥꾼입니다. 그래서 들 사람입니다. 사냥꾼이나 들사람은 남들이 보기에는 재미있고 신나는 삶이지만 사실은 거칠고 피곤하고 힘듭니다. 장막에서 조용하게 지내던 집토끼 야곱이 그날 이후로 에서를 가장하고 산토끼로 삽니다. 평생을 떠들이 생활로 객지생활을 합니다.
그렇게 가나안과 밧단아람을 중심으로 130세를 삽니다. 그 세월은 에서처럼 살았고 죄의 지배를 받았던 세월입니다. 물론 야곱에게 죄의 지배를 받았다면 펄쩍 뛸 것입니다. 내가 왜 죄의 지배를 받았느냐, 나는 하나님의 축복에 열심을 냈고 객지생활에 죽을 고생하고 돈벌었다, 내가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 있느냐, 오히려 내가 피해를 당했다! 야곱은 억울해 할 것입니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야곱은 남의 것을 도둑질한 적이 없습니다. 형의 축복권, 장자상속권은 형에게 팥죽 한 그릇에 당당히 구매한 것입니다. 눈먼 아버지 속여 축복권을 훔친 것 아니냐, 한다면 그건 형에게 장자권을 샀기에 방법상의 문제일 뿐이라고 항변할 것입니다!
살인한 것도 아닙니다. 두 자식은 살인자들이지만 야곱 자신은 누구를 살인한 적이 없습니다. 부인이 넷이나 되지만 바람피운 것도 없습니다. 두 부인은 장인의 술수였고 두 여종출신 부인은 정실부인이 만든 작품입니다. 그러니 내가 그들에게 속았고 오히려 피해자라는 것입니다.
그런가요? 그렇다고 죄의 지배를 받지 않고 살았다 할 수 있나요? 그렇다면 왜 가나안 땅의 130년을 마감하면서 바로 왕 앞에서 험한 세월, 험악한 세월을 살았다고 할까요?(창 47:9)
야곱에게 죄의 지배는 어떤 모양으로 나타났을까요? 자기중심, 이기심입니다. 이기심은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이 내 본질을 이루어버리면 이기주의가 됩니다. 이기주의는 자기만의 이익을 중심에 두고, 다른 사람이나 사회의 이익은 고려하지 않는 입장을 말합니다. 나이와 관계없이 사회적인 철이 들지 않고 나 밖에 모르는 개인주의입니다.
죄의 열매는 살인죄, 도둑, 간통⋯ 이간질⋯ 등으로 나타나지만 그 중심에는 이기주의가 들어있습니다. 이기주의는 ‘나’입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내 안에 내가 있을 뿐입니다. 내가 나를 통치하니 매사에 내 중심으로 생각하고 선택하고 판단합니다.
이기심은 우월감으로 무장합니다. 나는 실력이 있고 능력이 있다, 나는 나대로 노력했고 저들은 노력을 하지 않았으니 누구 잘못이냐, 남을 이해해줄 필요도 없고 사정 봐 줄 것도 없다, 남에게만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나는 괜찮은 사람이다, 그리 생각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야곱을 보세요. 특히 그의 이기심⋯.
형을 속임. 그, 일로 콩가루집안이 되었습니다.
부인들-남편이라는 사람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자식들, 아버지 때문에 너무 힘들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한 번도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에 이삭에 대한 죄송함이 없습니다. 그걸 하나님께서 주신 요행이라 생각합니다. 시므온과 레위가 디나의 강간사건에 보복하고 원주민들이 동맹해서 공격해올 기미가 보이지 야곱은 오히려 그들을 탓합니다.
“⋯너희가 나에게 화를 끼쳐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창 35:30)
딸이 강간을 당해도, 자기 안위가 더 걱정입니다. 내 목숨 부지에만 목숨을 겁니다. 딸의 불행은 그의 인생에 큰 장애물이 아닙니다. 축복의 조상이 된다면 딸의 아픔은 눈감을 있습니다.
나밖에 모르는 이기심에 지배를 당한 것입니다. 결국은 죄에 지배를 받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니 오랫동안 함께 동거하다보니 죄가 나쁜 것이 아니라 편한 것이 되고 즐거운 것이 됩니다. 때로는 그게 실력과 능력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험악한 세월을 보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렇게 130년을 살았습니다. 그는 성공했지만 홍익인간이 아니라 홍해인간입니다.
영국 리즈대학교 존 다이어는 '변화의 5% 법칙'을 말합니다. 5%만 달라져도 인생이 변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5% 턱을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5%의 변화! 그게 그렇게 어려운가요? 미소 한 번만 보여주어도 5%의 변화 아닌가요? 공중목욕탕에서 수건 3장을 쓰던 사람이 주인을 생각하고 두 장만 쓰는 5%의 변화가 우리들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닌가요? 변화는 큰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5%에서 시작됩니다.
2. 야곱의 17년, 이스라엘로 살다!
야곱은 단 1%의 변화도 없이 자기중심적 이기심으로 똘똘 뭉쳐진 130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이야 울던 말든, 자기 때문에 누군가 상처를 입든 말든 상관없이 홍해인간으로 삽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세요! 완전히 100% 달라진 야곱입니다. 죽음 직전에 12아들을 불러놓고 예언적 축복기도를 하는데 대단한 영감이자 영성입니다. 28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라 이와 같이 그들의 아버지가 그들에게 말하고 그들에게 축복하였으니 곧 그들 각 사람의 분량대로 축복하였더라”
분량대로⋯. 야곱은 12아들을 모두 알았습니다. 야곱의 예언축복은 아들들의 행적을 토대로 그들이 향후 구속사의 전개 과정에서 감당할 수 있는 사명에 맞춘 내용입니다.
아버지가 자식들을 알았다는 것은 어떤 의미입니까? 더 이상 자기중심이 아니라 타인중심, 아들 중심입니다. 아들들을 보았고 아들들의 고통과 시련과 연약함을 보았습니다.
언제 변한 것입니까? 얍복강 나루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씨름기도 한 후에, 엉덩이뼈가 망가진 후에 두려움과 감사와 안도함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갑니다. 이번에도 하나님이 묻습니다.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창 32:27)
하나님께서 이름을 개명해 주십니다.
28절,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스라엘~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이겼나요? 사실은 하나님의 인내가 이긴 것입니다. 야곱이 그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눈물 콧물을 다 쏟으며 회개한 후 다음 날 형님 에서를 만났을 때 입에서 나오는 말이 놀랍습니다. 33장을 볼까요?
5절,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들이니이다
8절, ⋯야곱이 이르되 내 주께 은혜를 입으려 함이니이다
10절, ⋯내가 형님의 눈앞에서 은혜를 입었사오면⋯
11절,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15절, ⋯나로 내 주께 은혜를 얻게 하소서 하매
야곱은 한 번도 은혜를 입에 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속임과 변명과 거짓으로 일관돤 생애입니다. 남에게 철저히 피해와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 이기심, 그는 죄의 지배를 받은 것입니다.
지금은 달라집니다. 입만 열었다 하면 은혜⋯ 은혜⋯입니다. 그렇다고 은혜가 그를 지배했습니까? 아닙니다. 아멘! 은 있었지만 아멘 이후가 없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은혜를 부르짖었지만 은혜가 그를 지배하도록 하나님에게 이기심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이후에도 오랜 세월 그렇게 살았습니다. 죄 짓고 욕심 부리고 자기밖에 몰랐습니다. 나이 값을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변하지 않았을까요? 얍복강 나루터 이후에 그는 5%의 변화를 시작합니다. 다음 장에서 외동딸 디나의 성폭행 사건은 결정적으로 그에게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가져옵니다. 35장에서 그는 처음 하나님을 만났던 벧엘로 올라 단을 쌓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에서 야곱이 성자의 모습으로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그의 변화는 입(入)애굽 이후입니다. 애굽으로 이주해서 17년을 더 살았습니다. 그 17년을 주목하세요! 야곱의 17년이 130년이 세월보다 더 많은 변화와 의미와 성화의 시간을 주었습니다.
야곱의 성화는 이외로 자식들을 통해 왔다고 생각됩니다. 처음에는 자식들을 생각하면 버겁습니다. 제 동생 요셉도 제대로 지켜주지 못한 못난 형들, 시므온과 레위의 집단 살상, 아버지의 침상에 올라 집안명예를 더럽힌 큰아들⋯ 나중에 알았더니 아들들이 작당해서 요셉을 유기하고 아버지에게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 사실에 대노했지만 얍복강 나루에서의 5%의 은혜의 변화가 자기 눈으로 보지 않고 자식들의 마음으로 자식들을 보게됩니다.
아버지의 편견으로 12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사랑을 받지 못했던 레아의 아들들로 여섯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여종의 아들로 네 명의 아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일찍 엄마를 잃었던 요셉과 베냐민은 얼마나 삶이 고단했을까?
요셉에게 인질로 잡히는 과정에서 아들들은 모두 아버지의 안위를 걱정합니다. 44장입니다.
22절, ⋯그 아이는 그의 아버지를 떠나지 못할지니 떠나면 그의 아버지가 죽겠나이다
31절, 아버지가 아이의 없음을 보고 죽으리니 이같이 되면 종들이 주의 종 우리 아버지가 흰 머리로 슬퍼하며 스올로 내려가게 함이니이다
34절, 그 아이가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면 내가 어찌 내 아버지에게로 올라갈 수 있으리이까 두렵건대 재해가 내 아버지에게 미침을 보리이다
아버지 야곱이 훗날 그 모든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를 위한 아들들의 희생, 요셉이 조건 없이 형님들을 용서하는 모습에서 야곱은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합니다. 얍복강 나루에서 자기를 살려준 하나님의 은혜를 제 아들들에게서 다시 보고 감동을 받습니다. 아들의 삶이 제 아버지를 변화시켜 나간 것입니다.
유진 피터슨은 부임한 교회의 성도들이 변화되지 않음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몇 번을 교회를 옮길까 결심했다가 주저앉고 또 주저앉고⋯를 반복합니다. 결국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변화되었다. 변화되지 않는 그 사람들 때문에 내가 변화되었다”
야곱은 변화되지 않는 아들들 때문에 변화된 것이 아니라 제 아버지보다 열 번 스무 번도 더 은혜의 모습을 보이고 용서와 관용을 보이는 아들의 삶을 17년 동안 보며 죄의 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은혜의 법에 들어오게 되고 은혜의 원리를 받으면서 5%에서 95%가 변화되고 이제는 성화의 자리 성자의 예언적 축복을 하는 존경의 아버지가 된 것입니다. 드디어 타인에게 이로움을 주는 홍익인간이 된 것입니다. 은혜의 법칙이 만들어 낸 야곱의 성공적 모습입니다.
결론
130년의 가나안에서의 야곱! 이기심이라는 죄가 만들어 경제괴물입니다. 그가 아무리 성공하고 거부가 되었어도 누구에게도 존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스스로의 130년을 정의하기를 험악한 세월이라고 합니다. 성공했어도 그것은 에서의 삶, 홍해인생입니다.
17년의 애굽에서의 야곱! 달리던 걸음을 멈추고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했던 세월입니다. 달려가는 대신에 무릎을 꿇었고 묵상하고 자기를 성찰합니다. 자기 속에 자기가 너무 많았습니다. 그것은 이기심과 개인주의로 가득 찬 동물원입니다.
야곱은 17년동안 자기 속에 있는 죄의 법을 하나님의 은혜의 법안으로 가져가면서 변합니다. 죄를 짓기에 열심했던 사람이기에 회개하기에도 열심이고 성화도 남달리 빠르게 성장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야곱이 된 것입니다. 드디어 홍익인간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그래요! 사람은 두 원리 중의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갑니다. 죄의 지배와 은혜의 지배! 은혜의 지배를 받으면 죄인이 성자되고 죄의 지배를 받으면 성자가 죄인이 됩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래 살면서 죄의 법, 이기심의 지배를 받으며 살 것인가, 오래살고 짧게 살고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아래에서 살 것이냐, 그런 관점이 아니라면 오래 사는 것이 오히려 죄가 늘어나는 것이고 이기심으로 더욱 뭉쳐지는 것입니다. 이 여름에 하나님의 은혜의 법 안으로 들어가며 그 통치 하에 남은 생애를 살아가는 우리 늘빛가족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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