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도의 영성을 회복하라
시편 116:1~4
서론
오늘 제목은, "기도의 영성을 회복하라"입니다. 기도에 열심하자! 기도생활에 힘쓰자! 는 단순한 말을 놓아두고 왜 기도+영성이 들어갔을까요? 여기에는 바른 기도관을 세우고 바른 기도에 힘써서 바른 믿음, 바른 생활로 나아가고자 하는 저의 바람이 들어있습니다.
또 하나, 기도가 우리 시대에 끊겨 버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습니다. 지난 세월 한국교회의 기도는 얼마나 정열적입니까?
종종 사람들이 옛날 다니던 교회를 못 잊어합니다. 정말 한 형제처럼 지내던 믿음의 사람들이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의 사람들은 왜 형제 같은 교회였을까요,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의 결정적인 것이 철야기도입니다. 남녀 노소를 물론하고 철야기도회에 참석해서 밤새도록 기도하고 간식을 나누고 그러다 보니 한 형제와 같았습니다. 이런 기도의 열정이 식어집니다. 사랑도 식어져 버렸습니다. 우리 시대에 기도의 대가 끊기고 있음을 봅니다. 사람의 대만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의 대도 끊어지고 기도의 대도 끊어집니다.
우리 늘빛교회가 기도의 3대, 기도의 4대가 나란히 앉아서, 철야기도에 참석해서 뜨겁게 기도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기를 기대합니다. 장로님 권사님 세대가 1세대라면 집사님 세대가 2세대이고 새댁들과 청년들이 3세대라면 학생 세대가 4세대입니다. 설교나 찬양은 세대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시간에는 세대간의 차이가 없습니다. 바로 기도시간을 통해서 세대를 극복하고 기도를 배우고 기도를 전수해 주는 아름다운 한국교회의 전통을 회복시켰으면 하는 바람으로 금년도의 주제를 “기도의 영성을 회복하자!”로 정한 것입니다.
기도하는 일은 교회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미신이라고 하는 샤머니즘에도 기도가 있고 이슬람교는 하루에 다섯 번을 기도합니다. 불교에도 기도가 있고 현실 종교, 조상 숭배종교라는 유교에도 나름대로 기도가 있습니다.
여러 종교의 기도관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기도를 소원 성취로 보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민족에게 “기도 드린다”는 “신에게 부탁드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들, 마음 속의 불안과 초조함 등을 신(神)이라고 하는 초월자에게 잘되게 해달라 간청, 간구, 부탁하는 것입니다.
부탁드리는 기도들은 나름대로 원리가 있습니다.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길어야 합니다. 가락이 있어야 합니다. 울어야 합니다. 그래야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 같고 응답 받고 소원성취를 이루는 것 같습니다.
이런 기도의 유형이 교회 안에 고스란히 들어왔습니다. 기도를 시작했다면 하면 마지막까지 말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말이 끊어지면 안 되는 줄 알고 계속 주저 댑니다. 길수록 좋은 기도이고 하나님께서 좋아서 들으시는 기도입니다.
어느 분이 책을 보니까 하루에 일곱 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시간에 홀딱 넘어가서 그 책이 엄청 많이 팔렸습니다. 오래 기도하면 더 많이 들어주신다는, 기도관이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톤이 있습니다. 노래도 아니고 흥얼거리는 것도 아니고 나름대로의 톤이 있습니다.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좋아하시는 기도는 울어야 좋은 기도로 생각합니다. 실컷 울고 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 줄 마음에 확신이 듭니다.
이런 기도들은 장점이 있습니다. 끝장을 보자는 기도입니다. 응답 받기 전에는 기도원을 내려가지 않겠다는, 나무 뿌리를 뽑는 힘으로 기도하면 응답을 주시지 않겠냐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야성(野性)의 기도입니다
우리에게 야성(野性)이 필요합니다. 교인들이 예수를 믿어도 좀 거칠게 믿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때로는 기도를 해도 좀 거칠게, 찬송을 해도 좀 씩씩하게 해야 합니다. 스님들 염불 외우듯이 공자님 천자문 읽는 듯 하는 기도생활은 원래 우리의 기도가 아닙니다. 기약없는 기도!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하겠다는 다부진 마음, 그것이 바로 야성의 기도입니다. 우리 선배들에게는 물불을 가리지 않고 기도에 열중하는 야성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런 기도의 강점은 열정이자 단점이 되었습니다. 단점이란, 기도에는 열심이었지만 윤리 부재를 가져왔습니다. 열심히 기도했지만 기도를 통해서 무엇이 변했나? 오래 기도했지만 얼마나 달라졌나? 를 따지지 않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무엇을 얻었나? 소원 성취에만 연연하다보니 사회성, 윤리성의 부재를 가져왔습니다. 기도에 열심하는 분들이 도덕적 윤리적으로 인간됨됨이가 더 나아야 하는데 아쉽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것은 지나치게 기도를 소원성취, 그것도 방법과 수단을 물론하고 소원을 이루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기도의 유형은 유교적 기도관입니다. 유교적 기도관은 자기 성찰로 시작합니다. 눈을 감고 명상하면서 자기의 행위를 조상님들 앞에, 신 앞에 반성합니다.
유대교 기도관도 이런 경우입니다. 유대인들에게 기도는 무엇인가? 신에게 자신의 행위를 달아보는 시간입니다. 하루 동안 자신의 행위가 얼마나 옳았는가, 얼마나 정직했는가? 하나님의 저울에 달아보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가 나오는데 바리새인이 기도하면서 나는 저 사람들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는 것은 곧 기도를 소원 성취라는 의미보다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해석한 것입니다.
이런 윤리성 기도는 자신을 점점 나아지게 하는 강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나와서 기도합니다. 하루를 반성하고 하루의 삶을 주님께로 맡깁니다. 정직을 달라고 진실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점점 자신의 행동이 변화됩니다. 참 좋은 기도의 자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에는 야성(野性)의 기도, 야성(野性)의 열정이 없습니다. 이런 기도는 신에게 몰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몰입하게 만듭니다. 뜨거운 기도의 열정이 없습니다. 기도를 하고 나면 기쁨이 있어야 하고 저 깊은 곳에서 나오는 힘의 공급이 있어야 하지만 그런 게 없습니다. 자기 중심적인 기도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울며+불며 기도하는 사람들의 기도생활이 우습게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일은 내 힘으로 하고, 기도는 점잖은 자기 성찰의 시간으로 끝냈습니다.
샤머니즘의 기도처럼 열정은 있지만 윤리성․사회성은 없는 소원성취형의 기도, 유교나 유대교처럼 윤리성은 있지만 뜨거운 열정은 사라져 버린 자기 성찰의 기도생활-이런 기도의 유형이 예수님 당시에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의 기도에는 열정이 있었습니다. 기도할 때마다 울고불고 야단이 났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거칠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른 신학이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기도에는 바른 신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누구신가? 그분께서 무엇을 요구하시는가? 율법을 알았고 바른 삶을 알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열정이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편향된 기도생활, 예배생활을 하고 있던 사마리아인, 유대인 모두에게 기도관을 수정하라고 하셨습니다. 즉 신령+진정으로 예배하라고 하셨습니다.
“진정”은 앎입니다. 바른 지식, 기도의 대상, 기도가 무엇인지,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이루어야 하는 게 무엇인가를 바르게 아는 것이 진정의 예배, 제사입니다.
“신령”은 “영으로”입니다. 진정한 기도는 영으로 하는 기도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영성의 기도를 회복하자! 는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영성이라고 할 때의 영성의 뜻은? 어떤 이들은 무아지경의 깊은 세계, 어떤 이들은 은사계발을 말합니다. 물론 영성이라는 말의 어느 한 부분에 그런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영성은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성품을 뜻합니다. 하나님과 같은 성품이 되는 것,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인격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영성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흙의 존재들은 육체의 본성만 있을 뿐 영성이 없습니다. 짐승들은 본성으로 살아나갑니다. 하나님의 지혜도 없기에 아직도 불 하나 만들 줄 모르고 낚싯대 하나 만들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성인 지식의 영이 없기 때문입니다.
짐승들은 사람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영성이 없기에 기도할 줄 모르고 예배할 줄을 모릅니다. 돼지가 예배하고 강아지가 기도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창조 연도는 인간과 같은데 왜 그들에게는 아직도 그런 영적인 부분들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는 영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그 속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생기는 하나님의 기운, 즉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지식이 있는 하나님을 닮아 지식이 있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닮아 의로움이 있고 영이신 하나님을 닮아 영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인간은 영적 존재이기에 영이신 하나님을 섬길 줄을 알고 영혼의 존재와 사후세계를 믿는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 존재이다! 영성을 지닌 존재이다! 라는 사실은, 우리가 왜 기도를 해야하는가? 기도할 때 어떤 자세로 해야할 것인가? 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왜 기도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영을 공급받기 위해서 기도합니다.
우리는 거듭날 때 하나님의 영을 받았습니다. 이 영은 한번 받는 것으로 천국에 갈 때까지 유효하지만 영의 분량은 커지기도 하고 자라기도 합니다. 육의 분량보다 영의 분량이 커지면 영의 사람으로 기도하고 영의 분량이 육신보다 작아지면 육의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영성은 계속 공급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영성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영성을 공급받습니다. 그때 우리는 영의 사람들이 됩니다. 영이 우리의 육을 선도하고 통치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는 왕국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 살다보면 세상은 영적인 분야가 아닙니다. 육이 다스리고 모든 게 육(肉)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우리의 영성은 다운되고 육의 본성이 크게 부흥됩니다. 육의 본성은 하나님을 멀리하고 싫어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다시 영성으로 돌아섭니다. 육이 이끌던 것을 영이 이끌도록 합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입니다. 기도는 우리의 소원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고 그분의 뜻에 우리의 뜻을 복종시키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다보면 참 안타까울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은 학벌이 좋지 않았다면 더 쓰임 받을 수 있는데, 돈만 없어도 믿음이 성장하겠는데, 다양한 경험만 없어도 쓰임 받겠는데… 이런 것들 때문에 육체를 의지하고 영이 그 뒤를 따라갑니다. 그래서 육신에 속한 표현과 행동을 할 때가 많습니다.
영성의 기도는 운전사를 교체하는 것입니다. 육신의 운전사가 뒤에 타고 영의 운전사가 내 인생의 버스를 몰고 가도록 하는 게 영성의 기도입니다.
그러기에 영성 있는 기도는, 오래+울기도+은사가 나타나기도 하지만 영성의 기도를 계속 하게되면 점점 누구를 닮아가게 되는가? 예수의 인격을 닮아갑니다. 예수의 사람, 온유, 거절을 참아내심, 끝없는 용서, 모든 약한 자들에 대한 무한한 이해-이게 바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기도의 영성입니다.
소원 성취는 이중의 하나입니다. 기도하여 문제가 해결되고 응답 받는 것은 한 부분입니다. 더 큰 기도의 열매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본문을 보면 소원성취라는 거래성 기도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성 기도가 함께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다가 포기하게 되는 것은 대부분 기도를 목적성으로만 알기에, 응답받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서 기도하기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래성보다 관계성에 많이 치중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의 자세입니다.
저는 기도의 상처가 큰 사람입니다. 큰 문제를 놓고 금식하며 교인들이 함께 기도했음에도 하나님께서 응답 받지 못했을 때 기도의 분량만큼 상처도 컸습니다. 몇 년 동안 기도의 상처 때문에 기도생활에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지금도 그 후유증이 남아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기도의 상처를 갖고 있습니까? 그래서 그 상처 때문에 기도를 포기하고 말았습니까? 안 되는 것은 기도해도 안 되고 될 것은 기도를 안 해도 된다는 기도무용론자(祈禱無用論者)가 되어버린 것은 아닙니까?
제가 기도의 상처를 조금씩 조금씩 치료 받게된 것은 아이러니 하게도 기도였습니다. 계속 기도를 할 때 하나님과의 나와의 관계가 정상화가 되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의 어떤 식으로 응답해 가고 있는가를 교회를 통해서, 자녀들을 통해서 내 삶의 풍성함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도관을 갖게되니까 응답이 되는가, 안 되는가? 그것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영역임을 알았습니다. 응답해 주시면 감사하고 삶이 편해지는 것이고 응답이 없으면 또 다른 차원에서, 더 좋은 것으로 응답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맡겨버리게 되니까 마음이 편합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시간은 소원성취의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과 영적인 교류를 하는 시간이며 영성 지수가 높아지는 시간, 그래서 기도한 것만큼 영의 찬양, 영의 설교, 영의 삶이 나온다는 것을 믿게되니까 기도시간이 즐겁고 행복합니다. 저는 영성의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
여러분들은 교회의 크기를 무엇으로 평가하십니까? 건물? 교인들의 숫자? 헌금액수? 그렇기도 하겠지요. 그러나 진정한 교회의 크기는, “기도의 크기가 교회의 크기다! 목사의 크기는 기도의 크기이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목사는 기도가 없이는 한 명도 품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기도시간은 자기 믿음의 계기판입니다. 기도시간을 통해서 언제나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점검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느냐? 보다 내가 누구냐? 어떤 사람이냐? 에 더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기대를 기도로 이루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영성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이런 기도를 금년 한 해가 모두가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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