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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요한복음 1:29~3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5. 2.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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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요한복음 1장 29~34절

서론

미국에서 12년 동안 살다 온 중학생 아이가 학교 영어 시험에서 130 등을 했습니다. 그것도 한국어 질문을 잘못 이해해서 두 개 틀려 92점을 맞았는데 130등을 한 것입니다. 한국 아이들이 얼마나 공부를 잘한다는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학자 지망생이 아닌 일반인들의 경우, 영어의 생명은 회화입니다. 단어암기보다 문법보다 대화할 수 있는 회화 영어가 중요한 것인데 한국의 영어공부는 외우고 베끼고 시험 보는 것 중심이기에 정작 외국인들을 만나면 영어 지식은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영어공부 6년으로 한국학생들은 날밤 새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이 잘못된 것입니다.

 

저는 신앙이 이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구원과 함께생활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을 읽어 구원을 얻음과 아울러 구원받은 자들의 삶을 위해 있는 것인데 지금 우리의 신앙은 상당히 지식 중심의, 성경단어 이해 중심의 신앙생활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읽고"얼마나 삶이 변화되었는가?"라는 것보다는"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가?"그걸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기도를 하고"얼마나 변화되었는가?"보다는"기도를 얼마나 오래하는가?""기도를 얼마나 듣기 좋게 유창하게 하는가"그런 면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영어공부와 무엇이 다를 바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본문에서도 그와 같은 사실의 일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어머니 배속에서 주님을 알았습니다.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고자 친척 되는 엘리사벳을 찾아왔을 때 요한은 복중에서 뛰어 놀았습니다(누가복음 1:41). 예수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그들은 비록 육신적으로는 대면하지 않았지만, 아직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한 배속의 아기들이었으나 영적으로는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이것이 영적 세계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몇 달 후, 세상에 태어났으면, 6개월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친척 지간이었으면 더 주님을 알아야 했고 주님과 영으로 교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30년을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와 함께 만나기도 했을 것이고 지내기도 했을 텐데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30년을 알고 난 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1)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33)

 

요한의 고백은 예수가"누구인지"를 몰랐다는 이야기가 아니라"어떤 분이신" 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알고 있습니다. 자기와 비슷한 출생의 기적이 있기에 어찌 예수에 대해 모르고 30년을 살아왔겠어요? 그들은 친척 지간으로 서로 왕래가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를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로 자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알았지만 어떤 분이신 지는 몰랐다는 것입니다. 너무 늦은 고백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기다려왔습니다. 그들이 기대하는 메시야는 심판주였습니다. 그것은 육신으로 해석된 메시야입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볼 폼 없는 나사렛 목수에 불과했습니다. 그들은 10, 그를 알지 못했습니다.      

 

훗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사람들의 말을 전했습니다. 엘리야, 예레미야, 모세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이다"

 

주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이는 혈육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 시다!"

 

아무도 인간적 지식으로는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는 압니다. 시험을 보면 잘 압니다. 성경을 잘 압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육신으로는 알지만, 성경 속의 예수님은 알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으면 잘 모릅니다. 이렇게 밖에 모르고 살기에 주님은 삶에 아무런 도움도 힘도 능력도 공급해 주지 못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능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박물관의 예수를 알고 있는 것입니다. 종교 속의 예수를 알고 있습니다.

예수가 누구인지는 알고 있지만, 예수가 어떤 분인지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삶은 풍성하지 못하고 구원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2. 요한은 예수님을 증거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은 나이 30이 되어서 선지자 사역을 나섰습니다.

그는 심판을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도끼가 나무 아래에 놓였다!"

 

그의 외침은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주었고 일반 민중들에게는 가슴을 후련하게 해주었습니다. 요한은 세례도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자백했고 새사람이 되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었습니다.

 

요한의 말을 따랐지만 그들에게는 참된 평안과 용서를 통해서 얻게되는 감격이 없었습니다. 죄를 뉘우치고 새사람이 되기는 했지만 마음속에 뭔가 새로운 충만이 없었습니다. 요한 앞에 서면 죄는 생각났지만 쉼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이 요한의 한계였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선각자입니다. 그 앞에 나가면서 길을 닦는 사람입니다. 주님을 증거 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 주님은 하나님의 사랑의 화신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구세주가 되시고 화목자가 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은 거기까지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전파는 책망과 심판과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까지는 되었지만 뜨거운 눈물과 감격이 없었습니다. 공포심은 조성했지만 감동은 조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입니다. 교리는 전했고 심판은 외쳤지만 예수님의 사랑과 능력과 기쁨을 전하지 못했습니다. 메시야에 관해서는 소개했지만 메시야 자신을 소개하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런 형편은 아닌가요? 예수님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예수님처럼 살지는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성경의 예수님은 전하고 있지만 내 속에 살아 계신 주님은 전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18세기 독일의 조각가 요한 하인리히 본 다네커는 신앙을 승화시켜 많은 명작을 남겼습니다. 그가 2년 동안 대리석을 다듬어 그리스도상()을 완성했을 때 제일 먼저 보여주며 평가받으려 했던'비평가'는 예술에 대해 무지한 소녀였습니다. 이 순수한 소녀가 가장 정직하게 말해줄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상()을 본 소녀는"이 사람이 누구죠?좋은 분 같기는 한데"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다네커는 실패를 직감, 다시 6년에 걸쳐 그리스도상을 완성한 후 다시 소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제 서야 그 소녀는

"그리스도상이군요!"하고 알아보더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보려고 합니다. 성경지식이나 기도가 아닙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희생, 용서, 감싸주는 마음을 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성경 단어 몇 가지만을 그들에게 보여주고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의 믿음을 보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그들이 이해하게 되는 그리스도는 우리의 삶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나사로는 죽음에서 부활했습니다. 그의 부활은 예수님의 역사였습니다. 그가 걸어다니고 있으면 사람들은 주님을 말했습니다. 그에게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성경은"나사로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믿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친구였습니다. 그는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전해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역시 예수님을 바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죽음을 통해서 주님을 전하게 되었을 때 이제 그는 자신 속에 있는 예수님을 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면 우리의 삶은 더욱 풍성해 지고 은혜 중심이 됩니다. 찬송 하나에도 은혜가 되고 눈물이 있고 주님과의 아름다운 교통과 만남이 있습니다.

금요일마다 장년성경부가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옛 복음성가를 부릅니다.

한국교회 1세대 목사님들의 작사한 곡입니다.

 

세상에는 눈물뿐이고 고통만 닥쳐와도

내 심령은 예수님으로 기쁜 찬송 부르네

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세상 영광 다 준대도 주님과 못 바꾸네

 

만약 음악만 따진다면"나는 예수님으로써 참 만족을 누리네" 이 부분에서 벌써 이상하다는 얼굴로 우리들을 쳐다볼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가 있으니 그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시간 주님의 영으로 충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알고 있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을 아는 것입니다. 지식으로가 아닌, 사랑으로 그 분을 느끼고 누리고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원하셨던 믿음입니다.

3. 요한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지금까지 요한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지내왔습니다. 그에게는 예수님과 상관이 없는 것들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는 열심히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전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찾아들었고 자신에게 주목시키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성령이 그에게 임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 임했던 성령이었습니다. 30년만에 그는 다시 한번 성령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제 서야 눈의 비늘이 벗겨지며 예수님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30절 하반절, "바로 이 사람이다!"

29,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34,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제 예수님을 육신적으로가 아니라 주님의 참된 모습을 알게되었을 때 그는 말하는 자가 아니라

 

 고백하는 자가 됩니다. 

말이라는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고백은 믿음을 말합니다. 그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며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고백합니다.

 

 비켜서는 삶이 되었습니다. 

예수를 알게 될 때에 진정으로 비켜서게 됩니다. 예수님에게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게 합니다. 항상 사람들을 주님께로 향하게 합니다.

 

 더 강렬한 삶으로 피어올랐습니다. 

그는 더 강하게 외쳤고 목숨까지도 내어놓았습니다. 그는 서른 살 남짓의 나이로 죽어갔습니다. 예수를 알았기에 자신의 사명을 알았고 그는 젊은 날의 불꽃으로 활짝 피어올랐다가 사라져 갔습니다. 주님이 어떤 분이 신지 알았기에 그는 장렬한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작년 한 해 동안 베스트 5위에서 맴돌았던 기독교서적 중에 <와이 미?>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김춘근 박사는 아내와 함께 돈 이 백 불과 가방 셋을 가지고 유학 가서 갖은 고생 끝에 박사학위를 받고 심한 경쟁을 물리치고 페퍼다인 대학교수가 됩니다. 교수 재직 4년 만에 최우수 교수상을 받을 정도로 승승장구했습니다. 그는 15세에 주님을 영접하고 교회에서 집사직도 받아 나름대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37세에 간경화와 간염으로 1년 안에 죽을 것이라는 죽음의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김 박사는 그 자리에서 무너지며 하나님께 묻습니다.

"와이 미?"(왜 하필 나입니까?).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자연식도 해보고 이런 저런 작은 희망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 밖에 없다는 것을 산으로 올라갑니다.

"어차피 죽을 몸 하나님께 매달려보자. 그 동안 신앙생활도 제대로 못했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어보자."

그는 비장한 결심을 하고 얍복강의 야곱처럼 빅 베어라는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거기서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몸은 가려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여기가 가려워 긁으면 저쪽이 가렵고 저쪽이 가려워 긁으면 이 쪽이 가렵습니다. 몸에 핏자국이 생기고 피가 나고 배는 만삭된 여인처럼 불러왔습니다.

 

6일째 되는 날 새벽 1, 머리가 견딜 수 없이 아프고 숨이 가빠지면서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고통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그는 담요를 두르고 나와 울부짖으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한참 기도하는데 자신의 입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습니다.

 

"네 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육체적으로 죽어 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네 영혼 속에 있는 독소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을 모르느냐!"

 

이 한 마디의 말이 터져 나오면서 그의 앞에 지난 날 말씀대로 살지 못해 지은 죄들이 펼쳐졌습니다. 얼마나 많은지 나중에 적어보니까 52쪽이나 되더라는 것입니다. 몇 시간 동안 울면서 기도하는 중에 세 가지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첫째
, 생명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둘째, 사람이 아무리 위대한 계획과 꿈을 가졌다고 해도 몸이 아프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도전이 튀어나왔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주었는데 너는 예수 믿은 22년 동안 나를 위해 무엇을 주었느냐?"

 

그 말을 듣는 순간 그의 마음속에는 참회의 고백이 터져 나왔습니다. 살려달라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왔던 날들에 대한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담대히 기도했습니다.

"살려주신다는 사인을 보여주실 때까지 이 산을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5-6시간을 사생결단으로 기도하자 먼동이 올라왔습니다. 5시 반정도 되었을 때 환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하얀 옷을 입으신 큰 분의 가슴에 내 얼굴이 깊이 파묻혀 있었고 그분께서 나를 꼭 껴안으며 아주 신사적으로 내 등을 세 번 두드려 주셨다. 그분은 내 등을 두드릴 때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내가 너를 용서한다' '그리고 내가 너를 용서한다'( I forgive you, I forgive you, and I forgive you)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으나 환상과 음성을 듣는 순간 그는 외쳤습니다.

"나는 살았다!"

그는 시편 118:5을 읽으며 기뻐했습니다.

 

"내가 고통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나를 광활한 곳에 세우셨도다"(영어성경-나를 완전히 풀어 자유케 하셨다).

 

1977 6 24. 그 날은 그에게 분수령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삶은 색시처럼 얌전한 삶이 아니라 더 충만한 삶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를 가만있지 못하게 합니다.

윌리 보빌리는대학의 위기에서 "만일 당신의 믿음이 일만 분의 일만 진실이라면 당신은 현재보다 열 배는 더 흥분해야 합니다"적었습니다.

주님은 그만큼 강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을 바로 알았기에 더 정열적으로 자신을 불태울 수 있었습니다.

결론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잘 압니다. 그럼에도 뭐가 부족해서 쉴새없이 성경공부를 찾아다닙니다. 성경공부를 하게 되고 예수님을 많이 알면 무얼 합니까? 인간의 지식으로 어떻게 하나님이신 그 분을 잘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의 말을 듣는 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많이 나타내시리라."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캐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영으로 자신을 채우십시오. 머리로 이해되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뜨거워지는 감격만이 우리를 회복하는 일이요 교회다움을 회복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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