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4장 10~14절
서론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던 요한의 저작입니다. 그는 성격이 강하면서도 섬세한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다른 복음에 비해 많이 등장합니다. 불륜의 현장에서 발각되어 죽을 뻔했던 여인의 이야기,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 십자가 앞에서 주님의 죽으심을 지켜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 특히 수가성 여인의 이야기는 예수님의 사역을 정확하게 읽을 수 있는 수작입니다.
요한의 시선은 예리하면서도 매우 따뜻합니다. 인간 세상에서 왕따 당하고 멸시 당하던 여인들의 이야기를 예수님의 마음과 눈으로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과정을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아름답게 그려내는 게 요한복음의 특징입니다.
본문 4장은 모든 것을 고루 갖추고 있는 내용입니다. 어떠한 내용의 설교라도 뽑아낼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부터 태신자 갖기 운동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태신자운동을 시작하며 몇 가지를 찾아보겠습니다.
1. 예수님은 고정관념이라는 장벽을 무너뜨리신 분이십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종류의 인구로 나뉘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종교와 정치에서 핵심을 담당해 왔던 남쪽 유대인들, 북쪽에는 이스라엘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사마리아가 끼어있습니다.
유대인들과 갈릴리인들 사이에는 오랫동안 반목과 경쟁, 그리고 누가 정통이냐는 정통성 시비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로몬 왕 이후에 이스라엘이 분열되면서 저희들이 정통이라고 우겨왔습니다. 두 나라 사이에 사마리아가 끼여있습니다.
유대와 갈릴리 사람들이 서로간에는 반목과 경쟁이 계속되면서 사마리아에는 멸시와 천대로 일관되었습니다. 왜 그런가? 주전 722년에 북방 이스라엘이 망합니다. 앗수르 군대가 북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주시킵니다. 그 때 일부가 남아있었는데 그들은 필연적으로 이주해 들어온 이방인들과 혼합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순수성을 상실했습니다. 그때부터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와 차별의 대상이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야 합니다. 그래서 정통파 유대인들은 일부러 멀리 돌아서 북쪽 지방으로 갈 만큼 사마리아인들을 혐오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4절 사마리아를 통행하셨습니다. 그분은 사마리아가 멸시의 대상이 아니라 이해의 대상이었고 구원받아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차별이라는 것, 선입관이라는 것, 고정관념이라는 것, 그런 게 없습니다. 그분에게는 모두가 사랑의 대상이고 구원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소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훗날, 초대교회가 그 뒤를 따랐습니다. 고대사회에서 교회는 차별이 없는 유일한 집단이었습니다. 교회에 가면 노예와 주인이 함께 자리에 앉고 노예가 제 주인보다 교회 직분이 더 높을 수도 있고 심지어는 주인이 앉아있는 자리에서 노예가 설교를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것은 당시로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정신이 살아있던 교회였습니다.
교회가 처음의 정신을 상실할수록 편견과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무섭게 자리잡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정통파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그들에게 있었고 모세가 받은 율법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정통파였습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선입관과 고정관념과 선입견을 주입시켰습니다. 종교인들이 걸릴 수 있는 병이 바로 위선과 함께 이 병인 것입니다.
여인에게도 대단한 선입관과 편견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자에 대한 잘못된 선입관이 있었습니다. 다섯 남자에게서 버림을 받고 한 남자와 살고 있는 이 여인에게 남자들이라는 존재가 제대로 보이겠습니까? 세상 남자가 다 도둑놈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런 마음의 상태였던 여인에게 유대 남자가 다가 와서 물을 달라고 합니다. 삶이 피곤하고 남자들에게 시달리고 동네 여인들에게 왕따 당하고… 여인도 왕 짜증입니다.
그것은 거절로 나왔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이런 잘못된 고정관념, 선입관, 편견을 치유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사마리아 여인을 찾았습니다. 주님의 발걸음에는 항상 선한 목적이 있습니다.
2. 내 줄 게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유대의 우물은 각자가 가죽 두레박을 갖고 다닙니다. 우물은 소중하기에 물 낭비를 피해서 모두들 각자의 가죽 두레박을 갖고 다녔습니다.
트리스트람이라는 사람은 <성서의 세계에 있어서의 동방의 관습>이란 책에서 개인적인 경험담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아랍 여인이 우물에서 물을 길고 가버리자 아랍 마부가 우물에 와서 튀긴 물을 핥고는 실망한 채 그대로 길을 가더라는 것입니다.
여인은 주님께서 물을 달라 하실 때 세 가지로 거절합니다.
㉠ 그릇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인은 그릇이 없는 게 아니라 유대 남자를 경멸하는 뜻으로 그릇이 없다고 합니다.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 왜 물 길을 그릇이 없겠어요? 분명 그릇은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릇이 없다고 하는 것은, 유대 남자에 대한 빈정댐입니다. 어떻게 당신과 같은 유대인들께서 개와 같은 사마리아 여인들의 마시는 그릇으로 마실 수 있겠는가? 라는 비아냥입니다. 그녀는 남에 대한 동정심이 없었고 자선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것은 선입관이었고 고정관념이었습니다. 내가 피해를 받았으니 다른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 남자도 남자이니까 남자들에게는 물 한 방울 내 손으로 줄 수 없다는 선입관이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된 선입관이야말로 인간의 기본을 말살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상당히 자선을 중요시하는 민족입니다. 그들은 자선의 행위는 하나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는 행위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자신들도 아브라함의 혈통이 속했다 자위했습니다. 그러나 여인은 잘못된 고정관념, 선입관 때문에 예수에게 거절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고생해 보았으면 고생하는 남에게 더 잘해 주어야 하고 자신이 실패했으면 실패한 사람들에게 더 잘해주면 좋으련만 그녀의 고정관념이 예수님에게 철저히 냉정하게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고 구원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사마리아 여인의 선입관을 차별과 거절의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잘못된 고정관념이 교회의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가 됩니다. 교회의 일을 하다보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경우들을 봅니다. 교회가 무슨 일을 하고 교회가 어떤 일을 계획하면 늘 이런 이야기가 들립니다.
"우리에게는 물 길을 그릇도 없다"
이것이 개인들에게 내려가면 더 심각한 삶의 상실로 이어집니다.
"나는 돈도 학벌도 없다"
"나는 재능도 없다"
"나는 전도에 대한 재능이 없어"
"저 사람은 절대로 안 될 거야"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신앙적인 고정관념, 선입관, 이것이 우리의 전도를 막고 있고 이것이 교회 성장을 막고 있고 이것이 우리의 신앙성장을 막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 여인은 우물이 깊다고 합니다.
우물은 깊었겠지요? 팔레스타인 지방에서 우물이 깊을수록 시원한 물을 얻을 수 있었기에 그 우물은 매우 깊고도 푸르렀을 것입니다.
1697년 말룬드렐의 조사에 의하면, 총 깊이가 32m이고 물의 깊이가 5m인 큰 우물이었다고 하며 1841년 윌슨 박사가 조사했더니 23m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인이 우물이 깊다고 할 만 합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절망은 그보다 더 깊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이라는 신분, 여성이라는 차별, 남자들에게 시달림 당한 여인에게 인생은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는 저주스러운 것입니다. 그냥 하루 하루를 살아갈 뿐입니다.
그래서 그는 우물이 깊기에 자선을 베풀 수 없다고 거절하는 것입니다. 그는 생수를 자신에게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여인의 마음에는 우물이 될만한 것은 없었습니다. 여인의 인생은 마르고 각퍅한 심정이 되어버렸습니다.
"우리의 우물은 깊다. 우리가 어디에서 생수를 얻을 수 있겠나?"
㉢ 여인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여인은 예수님을 다윗보다도 못한 이로 알았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에게 아무 것도 드릴 수 없었습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을 바로 알았다면 물이 아니라 그의 피를 바쳤을 것입니다.
나중에서야 그녀는 주님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주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녀는 물동이를 놓아두고 사람들에게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를 소개했습니다.
그녀에게서 선입관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선입관, 남자라는 선입관, 자신은 아무 것도 내줄 수 없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고정관념! 여인에게서 그 단어가 해결되었습니다.
그러자 여인은 사람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제 동네 사람들은 그녀에게 경계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었고 복음전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물길을 그릇이 없다고 하던 그녀가 삶을 통해서 주님을 증거 하는 그릇이 되었고 이 깊은 우물에서 어떻게 물을 떠주랴고 하던 그녀였지만 그리스도 예수께서 주시는 생수로 적셔진 그녀였기에 샘솟는 감격을 억제할 수 없어 달려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보다도 더 크신 분을 만났기에 이제는 고정관념 속에 매어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여인은 선입견에서 해방되었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가 그 여인을 변화시킨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고서 변화되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위대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3. 구원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영적이지 못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육욕으로 가득 찬 사람입니다.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는 영적인 선생입니다.
누가 예수를 영접하기 좋은 조건인가요? 누가 예수를 구세주라 전하는 사람이겠어요? 당연히 니고데모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편견이고 선입관이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니고데모는 이스라엘의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정통파 유대인이었고 인격적으로 점잖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전도하면 전도가 잘 될 것 같지요?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나면 금방 삶이 변하고 인생이 변하겠지요?
수가성의 여인! 이 부도덕한 여인! 복음을 전달받고도 우습게 여길 것 같지요? 그는 신앙심도 없었고 율법도 없었습니다. 이런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전도함은 금팔찌를 돼지 코에 걸어주는 것과 같고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보다 더 불가능한 일인 것 같지요? 그러나 이것이 선입견이었고 고정관념이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누가 먼저 즉각적인 회심을 했으며 회심 즉시 주님을 전했습니까? 놀랍게도 여인이었습니다.
영적인 갈망은 니고데모가 아니라 부도덕한 여인에게 더 많았습니다. 그녀는 갈망을 채움 받았습니다. 그리고 즉시로 주님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 여인을 통해 39절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를 믿는지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대할 때, 특히 전도대상자를 대할 때 우리는 믿음의 눈으로 밭을 보아야 합니다. 선입관과 고정관념이 아닌 영의 눈으로 밭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태신자운동은 이런 시각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나에게는 그릇이 없습니다. 우물은 깊습니다. 다른 사람은 다 되어도 내 남편은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영접한 것은 오히려 니고데모가 아니라 사마리아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35절 상반절,"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않느냐"
이것은 선입견이요 고정관념입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어떻습니까?
35절 하반절,"…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
고정관념을 덜어버리고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만 모든 백성은 구원받을 사람으로 보이게 되고 전도의 대상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제자들이 돌아왔습니다. 양식을 얻고 와서 주님께 드리며 말했습니다.
"나는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한 여인의 구원!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는 일입니다.
목사가 언제 기뻐할 것 같습니까?
바로 새신자 등록 카드가 올라왔을 때 가장 기쁩니다. 그것은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요 새 아기를 얻었을 때의 기쁨입니다.
태신자 갖기 운동은 하나님을 가장 기쁘게 해드리는 운동입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에 늘빛가족 여러분들의 동참과 기도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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