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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부르짖는 자의 샘(사사기 15:18~2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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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도서

 

부르짖는 자의 샘

사사기 15장 18~20절

서론

성경을 읽을 때마다 어떤 상상으로 슬그머니 웃는 게 있습니다. 삼손과 골리앗을 위한 결투장을 마련하면 볼만하겠다는 상상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는 누가 이길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개입시키지 않고 순전히 힘으로만 대결한다면 어느 선수가 이길 것 같습니까?

둘 다 키가 2m 이상이고 몸무게는 100kg 거인입니다. 괴력의 소유자들입니다. 들어올리는 데는 골리앗 김영현(?)이 유리하겠고 엎어 치기에는 삼손 이만기(?)가 유리할 것 같지 않습니까?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은 하나님의 개입으로 싱겁게 끝났지만 골리앗과 삼손의 싸움, 항복할 때까지 싸우라면 아마 밤새도록 싸웠을 것입니다.  

1. 인간에게 양면성이 있습니다.

삼손은 이방인 여인과 결혼했지만 원수간이었기에 민족적인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삼손을 결박하여 블레셋에 넘겨주었습니다. 삼손은 괴력으로 밧줄을 끊고 블레셋 사람 1천명을 낙타 뼈로 죽였습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이면 못하는 게 없음을 만 천하에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그러나 1천명을 상대하느라 엄청난 힘을 소모해 버린 삼손은 갈증으로 죽게되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삼손에게는 강함과 약함이 있었습니다. 삼손은 항상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에게도 약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승리도 있었지만 승리 이후에 목이 타는 갈증도 있었습니다. 그는 커다란 승리를 이루었지만 이내 비틀거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1천명을 상대했던 삼손이었지만 자기 목구멍 하나를 어떻게 하지 못했습니다.

 

삼손에게 목이 타는 갈증의 고통은 하나님을 찾도록 하시는 약함이었습니다. 삼손은 육체가 너무 출중했습니다. 그에게 약함이 없었다면 그는 골리앗처럼 영적인 백치가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자신을 의지하고 육체 쪽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는 약함이 있기에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으로 계속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비행기는 바퀴로 가도록 만들어 진 게 아닙니다. 그러면 비행기는 훨씬 비효율적이며 거추장스러운 운송수단이 될 것입니다. 비행기는 날도록 되어 있습니다. 삼손은 날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의 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자기의 힘으로 나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목마름을 주신 것입니다. 목마름은 그에게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음을 늘 인식하게 만드는 그의 약함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약함이 있습니다. 큰 그릇일수록 약함이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의 유명한 목사님들-한경직, 김창인, 조용기 목사 들이 모두 약함이 있었습니다. 그 약함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의 길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영적 생활에는 안전한 완전이 없고 완전한 안전이 없습니다. 우리는 매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아야 하고 매순간 하나님께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와 그 사랑에 의하여 장악된 마음으로 살기를 결심해야 합니다. 매일매일 하나님께서 영혼을 만져 주시는 거룩한 사랑의 만져주심이 없이는 우리가 안전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으로 우리의 안전한 신앙생활을 보장해 주지 않습니다. 낙타 뼈로 1천명을 쳐죽인 사람도 갈대처럼 약함을 보였다면 우리의 삶은 더욱 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강함이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 아님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고 계실 때에는 낙타 뼈 하나로도 모두들 물리칠 수 있는 용사가 되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 때에는 갈대처럼 연약한 인간임을 명심하면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약할 그 때가 가장 강할 때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삼손의 약함은 단순히 체력의 소모 때문이었을까요?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을 어기고 있습니다. 그는 나실인이었습니다. 나실인이기에 죽은 것을 만져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사자의 주검으로부터 꿀을 취했고 나귀의 턱뼈를 무기로 사용했습니다.

 

이 턱뼈는 15, "새 턱뼈"라고 했습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시체입니다. 그의 속에 있는 죄가 그를 갈증나게 만들었습니다. 죄의 특징은 갈증입니다. 어거스틴이 우리에게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아무리 성공하지만 그것이 죄와 함께 하는 것이라면 목마를 수밖에 없습니다. 삼손은 우리에게 죄와 함께 하는 성공의 뒤안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 삼손은 부르짖었습니다.

삼손은 목이 말랐을 때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삼손은 능력자입니다. 그는 1 1천의 능력을 보였습니다. 누구도 괴력 앞에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약함은 내부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내부에서 갈증이 생긴 것입니다.

 

요즈음의 세태를 보십시오. 갈증을 보십시오. 돈이 없습니까? 뭐가 없습니까? 그럼에도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진짜 샘물이 나오는 곳을 향하여 그곳에서 부르짖어야 하는데 엉뚱한 곳에서 부르짖기에 갈수록 더 갈증이 생기고 더 깊은 중독 상태를 보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 컴퓨터 중독에 걸린 사람들이 수없이 많답니다. 미친 듯이 그곳에 매달리고 밤을 새우고 이상한 생각으로 자신을 망쳐갑니다.

 

삼손은 제대로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부르짖은 것입니다.

삼손이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묵한 곳을 치셨으며 거기에서 시원한 물이 쏟아졌고 그는 그 물을 먹고 정신을 차려 소생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이 체험은 삼손을 죽음에서 건져준 사건이었기에 삼손은 그 샘의 이름을'엔학고레'라고 지었습니다. 그 뜻은 "그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삼손은 기도로 자신의 난관을 헤쳐 갔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부르짖지 않고 자기의 힘만 의지하고 샘을 찾아 나섰다면 그는 쓰러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가 비록 율법에 충실하지는 못했지만 그의 내면에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는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와 능력 안에서 살아갈 때에는 삶이 늘 은혜의 이슬로 촉촉이 적셔있습니다. 언제나 거룩하고 풍부한 정서 속에서 하나님께로 경배와 찬양을 올리게 됩니다. 기도 속에는 눈물이 배여 있고 섬김 속에는 땀이 들어있습니다. 주님을 위해 죽을 각오까지 합니다. 이것이 거룩한 영성입니다. 영성은 은사가 아니라 삶 자체입니다.

 

그러다가 삶이 메말라집니다. 아무런 기쁨도 거룩한 교제도 없고 마침내 삼손처럼 고통 하는 신앙인이 되어버립니다.

부르짖어야 합니다. 1천명의 적군을 앞에 놓고서도 부르짖어야 하지만 자신의 내면을 채우기 위해서도 부르짖어야 합니다.

부르짖음은 샘물을 파는 굴착기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들은 영생하는 샘물로 응답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을 때마다 응답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응답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와서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르짖는 자들에게 샘을 주실 것입니다."엔학고레"는 고통 하는 자의 샘이 아니라 부르짖는 자의 샘입니다.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님께서는 시원한 물로 채우셨습니다

3. 계속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다른 성경의 인물과는 달리 삼손은 그의 몸 속에서 육체적 힘과 성령의 능력과의 관계를 예로서 보여줍니다. 그는 거인으로서 힘은 하나님께로 온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선택받은 사람입니다.

 

나귀 턱 뼈로 1천명을 죽이는 무용담(무용담)은 자신의 영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는 나실인의 힘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엔학고레에서의 그의 모습은 하나님이 없이는 그의 존재가 아무 것도 아님을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의 근육, 골격, 거대한 몸에서 힘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고 의뢰할 때에만 힘이 나온다는 사실을 이스라엘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세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항상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이루어야 하고 날마다 하나님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야 육신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그에게 힘의 근원이 되고 성령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그는 20여 년 동안을 사사생활을 했습니다. 부르짖는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샘물 곁에서 그는 사사생활을 승리로 이끈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이 흘러나오는 샘이 되었습니다

 

한 목사님이 너무 그를 힘들게 하는 교인으로 힘들어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주님, 제게 더 많은 인내심을 주십시오. 제게 더 큰 힘을 주십시오. 제게 더 큰 사랑을 주십시오."

 

그러나 그 목사님에게는 승리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목사님께서는 예수님께서 그의 마음에 영으로 계시고 그의 마음은 성전이 된다는 사실을 체험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목사님은 더 이상"주님, 제게 더 많은 인내심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주님, 주님의 인내심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는 주님의 인내심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믿음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반응했을 때 주님께서도 인내로 반응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인내는 더 이상 괴로움이 아니라 소망이 되었습니다. 그의 안에서는 즉각적으로 새로운 힘이 솟구쳐 올라왔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하나님과의 계속적인 교통을 유지하는 일에 실패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아니라 세속과의 교제를 계속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소모했습니다.-그는 육신이 컸습니다. 그러기에 육신이 세상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더 많은 시간을 영적인 것에 사용해야 합니다. 병에 걸려서 병상생활을 하는 사람들, 수도를 하는 사람들은 조금만 영적인 것에 힘을 써도 얼마든지 영에 속한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사님들은 아무래도 조금만 기도해도 영으로 기울어 질 수 있습니다. 교인들은 다릅니다. 더 열심히 시간을 영적인 것에 투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게 안 됩니다. 삼손이 그랬습니다.  

 

*그는 육신을 소모했습니다.-육신의 소욕이 성령의 소욕보다 강하게 나타났고 그는 육신의 소욕으로 기울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생각을 소모했습니다.-그는 불을 가지고 계속 장난질을 했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삼손은 의식불명의 상태로 빠져버렸습니다. 그는 이미 자기에게서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간 줄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결과는 어릿광대로 끝났습니다.   

지난 날의 승리가 아무런 의미도 없었습니다. 그가 계속 여호와께 부르짖는 삶을 살았다면 원수 앞에서의 사자의 표호는 하지 않아도 좋았을 것입니다.

결론

삼손, 그는 모세에 비견할 수 있는 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 자녀를 얻으려고 하지 않았던 경건한 부모 밑에서 출생하는 축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매사에 기도하는 부모 밑에서 신앙이 성장되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힘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고 한 사람은 백성의 사람으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유는? 모세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었습니다. 그가 학문이 출중했고 높은 지위에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서 그는 점점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40일을 하나님과 교제하며 기도생활을 했을 때 그의 얼굴에는 광채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갖추게 되었고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이방 여인들과의 사랑에 탐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교제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는 사람의 힘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엄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맷돌을 돌리는 어릿광대가 되었고 오히려 하나님의 위엄을 조롱하게 만드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모두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일하게 신실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약함을 고백해야 합니다. 역함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강함이 가장 나에게 약점입니다. 사단에게는 먹이가 되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부르짖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에 부르짖는 자들에게 샘물이 터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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