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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예수께서 하신 일(요한복음 10:9, 1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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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도서

 

예수께서 하신 일

요한복음 10장 9, 10절

서론

대학교 교수의 외동딸이 아프리카 선교사를 지망했습니다. 아무리 달래고 얼러보아도 딸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아프리카로 떠나는 딸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교수는 울부짖었습니다.

"예수여! 당신은 누구십니까? 내 딸을 아버지보다 더 사랑하게 만드는 당신은 신이십니까, 사람이십니까?" 

 

예수가 어떤 분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에게 자신의 삶을 의지하고, 한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2천년 전의 그분을 위해 시간도 물질도 심지어는 목숨도 맡겨버릴까요? 불교도 순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성불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석가를 위해서 생명을 내놓는 것은 아닙니다.

석가모니가 빠져도, 석가모니의 교훈만 있으면 불교는 가능합니다. 공자가 실재적인 인물이 아니어도 공자의 교훈만 있어도 유교는 존립이 가능합니다.

 

기독교는 이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남기신 교훈을 좋아합니다. 그 교훈대로 좇아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고 참 사람이 아니시라면 기독교의 모든 교훈과 교리는 그 날로부터 사라져 버립니다. 기독교는 교훈에 근거를 둔 게 아니라 그 분의 존재와 생애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교훈보다도 주님의 생애에 더 집착합니다. 주님의 동정녀 탄생, 십자가의 죽으심, 부활, 승천과 재림 등을 더 중요시합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말씀이나 교훈보다는 주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 더 관심이 많습니다.

1. 예수님은 인간의 죄를 없애십니다.

죄는 무엇일까요? 도둑질? 거짓말? 부도덕한 행위? 이 모든 게 죄입니다. 그러나 이 죄는 드러난 죄입니다. 그것이 진짜 죄는 아닙니다. 우리의 근본적인 죄는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없이 내 스스로 살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의 행위로 구원받을 수 있고 내 노력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내 중심 사상이 바로 죄 중에서 으뜸가는 죄이며, 죄의 뿌리가 될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죄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스스로 신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들은 창조주가 되고 싶었고 명령을 수행하는 자가 아니라 명령하는 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인간 스스로가 천국에 올라가는 길을 개척하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이것이 아담에게 있는 죄가 되었고 그 죄가 모든 인간들에게 전가되어 인간은 태어나면서 이와 같은  죄의 성향을 갖고 태어나게 됩니다.

 

나와는 관계없이 되어진 죄의 문제, 죄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사람의 필수적인 것입니다. 에이즈에 걸린 산모가 에이즈에 걸린 아이를 잉태했다면 그 아이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모친의 태중에서 이미 에이즈에 걸려 있으며 출생하면서 그 아이는 에이즈 환자가 되는 것입니다.

 

죄가 그렇습니다. 모든 죄인은 죄인의 뿌리에서 출발합니다. 아담의 죄로 인해서 죄의 본성과 성향을 갖고 출생합니다. 본성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구원을 얻고자 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는 나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곳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 죄는 내 행동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없애보려고 인간은 종교도 만들고 부정도 해보고 별의별 행위를 다 했지만 죄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유리창 너머에 있는 티는 아무리 애쓰고 청소해도 어쩔 수가 없습니다.

 

죄는 죄가 없는 존재가 와서 해결해 주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죄의 문제는 죄가 없는 하늘에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죄 없이 오셔야 했기에 동정녀의 몸이 필요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 앞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죄의 요구인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저를 믿는 사람들은 다 죄의 용서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보혈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을 영접하는 자들에게만 그 피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에는 크게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담에게 붙어 있는 자들과 예수님에게 붙어있는 자들입니다.

아담에게 붙어있는 자들은 죄인입니다. 그들을 스스로의 행위로 구원을 얻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께 붙어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에 적시움을 받고 그 순간 그 피는 죄를 없애버립니다. 하나님 앞에서 인간은 의인으로 서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암세포를 죽일 수 있는 약이 개발되었다고 합시다. 그 약은 그가 얼마나 오래 정성을 다해 투병생활을 했고 정성껏 했느냐? 그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약의 효능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말기여도 고침을 받을 것이지만 그 약을 투여하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효력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이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할 수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것은 교훈을 좇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2. 예수님은 인생들에게 목적을 줄 수 있습니다.

어떤 왕이 자신에 대한 공적비를 짧은 문구로 만들라고 지시하였습니다. 신하들은 낑낑거리다가 드디어 공적비를 세웠습니다.

 

<먹다가 죽었다>

 

목적 없이 살았던 무의미한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죽었습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것입니다. 그때 마르틴 루터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죽음은 일찍 죽었다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한번도 인간답게 살아보지 못한 것이 이 젊은이의 비극입니다."

 

그는 목적 없이 살다간 것입니다. 목적 없는 삶은 10년을 더 살았다거나, 덜 살았다 에 의미가 없습니다. 목적 없이 10년을 더 살았다면 그는 목적 없는 삶을 10년을 연장했을 뿐입니다. 군병역 비리 문제로 박노항 원사의 복역기간을 벌써부터 점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무기징역을 산다면 목적 없는 그의 삶이 앞으로 20년을 더 살면 무엇하겠으며 30년을 더 살면 무엇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삶의 의미, 참답게 사는 법을 주셨습니다. 주님은 분명한 목적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구원의 성취를 위해 오셨습니다. 그 목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아까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목적을 주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 하나님의 듯을 이 땅에 널리 실현하는 일, 그것이 바로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되었습니다.

 

애니 셜리반은 정신 질환자였지만 고침 받고 나서 목적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헬렌 켈러를 만들었습니다.

오래 전 이야기이지만 미국에서 이혼율은 다섯 명중에 두 명입니다. 하버드대학의 소로컨 교수가 조사해 보았더니, 기독교인 가정에서는 1015명 대 한 명 꼴이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나올까?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그 마음속에 있습니다. 예수가 주인이 되고 예수의 목적을 좇아서 살아나갑니다. 그들의 가정은 교회가 되어야 하고 선교의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이 되니까 이혼율은 적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업에도 해당이 됩니다. 목적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차이는 다릅니다. 목적이 있으면 어떤 고난도 헤쳐나갈 수 있습니다. 목적이 없으면 인생이 무의미해 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생에 목적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삶입니다. 목적이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입니다. 목적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을 부러워 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화를 주십니다.

세상은 평화를 원합니다. 개인들도 평안을 원합니다. 그러나 세계는 제대로 평화를 누려본 적이 없습니다. 세상은 진정한 평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두려움, 욕구불만, 좌절감, 경제문제, 자녀의 문제는 우리들을 늘 혼란스럽게 만들고 마음에 평안을 앗아갑니다. 그 어느 때부터 풍성한 삶을 누리면서 가장 정신질환이 많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우리의 소유가 우리의 평화를 보장하는 것은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누리고 있었던 모든 특권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기둥이 하루아침에 스러져 버렸습니다. 그들은 사방으로 포위 당했습니다.

제자들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평안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에게 평안이 있을 지어다!"

 

이는,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모든 선한 것을 마련하여 주실지어다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며 좋은 것을 마련해 주신다는 그 확증에 마음에 평화가 왔습니다.

 

평안은 사실 환경과 별개입니다. 좋은 환경이 있어도 평안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환경이 좋지 않아도 참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결국 평안은, "일어난 일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라는 것입니다.

 

두 명의 죄수가 감옥의 쇠창살 너머로 바깥을 내다봅니다. 한 사람은 진흙탕을 보았고 한 사람은 별을 보았습니다. 한 사람은 분노가 치솟았고 한 사람은 희망이 넘쳤습니다. 그에게 참 평화가 넘칩니다. 이것이 평안입니다.

 

무엇을 얻고 소유해서가 아닙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평화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평화는 세상에서 얻을 수 없는 평화입니다. 그 평화는 풍랑 속에서 잠들 수 있는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일은 이 평화를 얻는 것을 뜻합니다.

4. 예수님은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 부활 이후에 제자들은 힘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살아있을 때보다 주님의 사후, 부활 이후에 제자 그룹은 훨씬 더 힘있고 용기 있는 집단이 되었습니다.

 

어째서 그 일이 가능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의 교훈과 규범을 본받으려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부활 사건 이후, 그들은 예수님 자신에 주목했습니다. 지난날에는 예수님이 그들 밖에 있었지만 부활 이후에 주님은 그들 안에서 함께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내 안에 사신다는 확신은 그들의 연약한 삶을 하나님에게 연결하는 끈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죽음의 돌무덤까지도 열어버리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수용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부터 그 분의 힘은 우리의 힘이 될 것입니다. 그 분은 세상 끝날 때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마 약속하셨습니다. 견디는 힘을 주시며 용서의 힘을 주시며 죽음으로 세상을 얻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론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전의 할아버지는 키 작은 곱사등이입니다. 그는 함부르크의 한 상인의 집을 방문했다가 절망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프롬체라는 그 여인이 너무 아름다운 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여러 날을 미루다가 함부르크를 떠나오기 전날, 프롬체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한 남자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순간 신은 그에게 장차 그의 신부가 될 여자를 말해주지요. 내가 태어날 때에도 미래의 신부가 정해졌어요. 아름다운 그 여인은 곱사등이었어요. 그때 제가 소리쳤습니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인에게 곱사등이라니! 그것은 안 됩니다! 나를 곱사등이로 만드시고 신부에게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래서 내가 곱사등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곱사등이로 만든 것은 특별한 것들을 지우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허락만 한다면 지금부터 평생동안 당신의 한숨과 눈물, 당신의 걱정과 고독, 당신의 아픔과 가시를 다 내가 짊어지겠습니다. "

 

"대신 짊어진다""책임지겠다"는 사랑의 구애에 프롬체는 감동되어 결혼했고 평생토록 곱사등이의 아내가 되어 헌신했습니다. 그리고 그 손자 중에 유명한 음악가 멘델스전이 태어나게 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해 주신 일이 바로 이런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은 주님께서 해주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믿을 때 주님께서 해 주신 모든 일들이 우리에게도 효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이 행복을 전하지 않으시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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