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를 기다리는 신앙
누가복음 2장 25~35절
서론
초대 기독교신앙의 특징은, 첫째,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온 교회적인 신앙고백을 함께 고백합니다. 믿음의 형제자매로 혈육적인 사랑을 합니다. 혼자 구원받고 축복 받는 개인신앙이 아리나 서로에 대한 관심과 책임적 신앙을 가졌습니다.
둘째, 순교적 신앙입니다. 부활의 증인이라 할 때의 ‘증인'은 ’순교자‘를 말합니다. 기독교신앙은 곧 순교를 각오하지 않으면 고백할 수 없었고 세례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주님과 함께 죽을 수 있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신앙이었습니다.
셋째, 기다림의 신앙입니다. 물질과 축복을 기다리는 현세적 기다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기다림입니다.
세 가지 기독교신앙의 특징은 서로 어우러지면서 초대교회의 믿음을 강화시켜 왔습니다.
기독교역사 2천년 동안 교회의 신앙은 미래적이고 성취적이고 종말론적인 기다림 속에서 이루어졌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이 없을 때 교회는 세속화되고 타락했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이야말로 교회를 교회 되게 했던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사실과 약속에 근거한 기다림입니다.
기다림의 신앙은 초대교회의 신앙고백뿐이 아니라 성경의 중심 주제입니다. 아담과 하와, 노아, 아브라함, 다윗, 이스라엘 백성들… 어느 시대이건 기다림이 없었던 시대는 없었습니다. 구세주가 오시기를 기다립니다. 그냥 본능에 의지해서 막연하게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세주를 보내주신다! 구세주가 너희들을 위로해 주실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4천년의 믿음입니다. 이런 약속이 있었기에 그들은 세계사적인 핍박과 시련 가운데서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사실입니다. 성경은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었습니다. 전설은 ‘믿거나 말거나’입니다. 유대인들은 성경을 전설이 아니라 사실적인 역사로 받아들였습니다. 구세주의 강림은 전설이 아니라 그들에게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 약속은 분명 성취되는 날이 올 것입니다. 약속의 성취를 믿었기에 유대인들은 시련 속에서도 유대인임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시므온 노인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해서 기다림의 신앙을 유지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의 위로는 이스라엘에게 오직 유일한 한 가지입니다. 구세주의 탄생! 그 외에는 그들에게 참된 민족적 위로, 인생의 위로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통해서 눈에 보이는 것에서 위로를 받으려다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 황폐한 땅이고 침략과 두려움으로 가득 찬 곳입니다.
우상들? 우상들이 비를 약속하고 섬겼지만 결국은 공허함을 안겨주었습니다.
왕들? 왕들은 그들에게 부정과 타락을 안겨주었습니다.
선지자들? 거짓 선지자들은 눈앞에 보이는 가짜 희망만을 주었습니다.
이런 실패와 실수를 거듭해가면서 유일한 위로는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그 대안이 바로 구세주의 출현입니다. 그것은 약속이고 사실이고 성취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 그들에게 유일한 위로가 되었습니다.
지금은 대강절입니다. 성탄절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기다리는 사람들의 것입니다. 점점 기독교신앙이 현실화가 되고 세상살이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눈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위로를 받으려면 세상은 참된 위로가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우리의 위로가 되어야 하며 기다림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예루살렘 성전에서의 기다림입니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으니’-시므온은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으면서 주님을 기다렸습니다. 그 기다림은 성전 중심입니다. 성전 밖 세상은 절망과 위기로 가득 차 있었고 성전 안에서도 거슬리는 일들은 많았습니다. 그는 기도하면서 스스로의 신앙을 기다림의 신앙으로 만들어 갔습니다. 성전이 부패했다고 성전을 떠나 독야청청하지 않았습니다.
성전에서 평생을 기다림의 신앙으로 보냈습니다. 성탄 때에는 마구간에 오셨던 예수님, 12세 때에는 성전에 오셨습니다. 마구간에 오셨다고 했을 때, 그는 베들레헴으로 거처를 옮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구간에서 주의 위로를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시므온은 당시의 신비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성전에 대한 약속을 믿었습니다. 성전-하나님의 눈이 머물겠다고 약속하신 곳입니다. 그래서 성전 중심에서 믿음을 키워나갔습니다.
기다림의 신앙-성전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믿음을 가꿔나가야 합니다. 교회공동체는 믿음의 가정이고 울타리입니다. 이곳의 교리가 우리를 지켜줄 것이고 교회 안의 공동체의 일원이 서로를 만져주며 다듬어 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기다림은 공동체간의 삶이 서로의 믿음을 빛나게 해 줄 것입니다.
시므온 노인의 기다림은 탄식과 눈물의 기다림이 아닙니다. 그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성령은 소망을 주었고 기쁨을 주었습니다. 괴로운 마음으로 기다린 것이 아니라 밝고 힘찬 마음으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사람들을 대했습니다. 시므온은 예루살렘의 위로가 되었고 성전의 명물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찾는 사람들은 제사장들에게서 위로를 받고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시므온 노인에게서 위로와 기쁨을 얻었습니다.
교회 생활, 즐겁게 해야합니다. 교회생활을 즐겁게 하려면 굳어진 얼굴 근육이 풀려야 합니다. 얼굴에 웃음꽃들이 피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얼굴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겸손의 인격을 통해 보여야 합니다.
지방의 어느 양로원은 서로 “형님!”이라 합니다. 따져보면 나이가 위든지, 배움이 위든지, 키가 위든지… 뭔가 하나씩 위가 있답니다. 그래서 형님입니다.
우리가 서로 따져보면 나보다 하나씩은 나은 게 있습니다. 서로가 존경해야 합니다.
시므온은 선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에게서 사람들은 위로를 보았습니다. 성전 제사장들의 부정과 타락, 로마정부의 학정… 이런 것에서도 시므온을 보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시므온은 사람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의 주변에 모여드는 사람들은 같은 비전을 공유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화병에 꽃을 오랫동안 싱싱하게 유지하는 몇 가지 방법”이 나왔습니다. 차가운 물 대신에 미지근한 물을 담글 것, 수면 아래 잎사귀는 모두 떼어낼 것, 흡수가 잘 되도록 칼이나 가위로 줄기를 엇비슷하게 자를 것… 등입니다. 시든 꽃 가까이 화병을 두지 말 것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믿음도 그래요! 미래적인 사람들, 희망적인 사람들,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야 합니다. 세속적이고, 아이들 이야기나 하고 아파트 굴릴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세상의 위로를 구하는 축에 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안 됩니다. 구역공부에 참여했던 분들은 이런 데서 실망합니다. 대화 수준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성경적으로 수다떨기>라는 책이 있답니다. 수다를 떨어도 남 흉보고 세상적인 이야기들로 수다 떨면 허무하고 부끄럽습니다. 남의 인격도 손상시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이야기로 수다를 떨면 믿음도 상승하고 다른 사람의 믿음도 상승시켜 줍니다.
시므온은 배움도 없고 리더십도 없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사모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기다림의 그 모습 자체가 조용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이런 사람-우리 늘빛교회에 필요한 사람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시므온의 기다림은 위로를 받은 성취적 기다림이 되었습니다.
본문이 시작될 때 시므온을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25절)라고 소개됩니다. 그의 기다림은 “보았다"(30절)는 말로 성취된 기다림이 됩니다. ‘기다림’이 미래적인 것이라면 ‘보았다’는 것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기다림과 성취-아름다운 파트너입니다.
멀고 힘든 기다림이 아름다운 것은 어느 지점에선가 기다림을 보는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기다림이 있을 때 세속에 물들지 않습니다. 내가 그 기다림을 보지 못해도 다른 사람이 기다림의 열매를 딸 수 있도록 기다림의 배턴을 계속 이어가야 합니다.
히틀러가 유대인 대학살에 나섰던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젊고 유능한 외과의사가 수용되었습니다. 그는 가스실과 실험실을 향하여 떠나는 동족들의 죽음의 행렬을 보며 자신도 머지 않아 가스실의 희생제물이 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노동시간에 젊은 외과의사는 흙 속에 파묻힌 깨진 유리병 조각을 몰래 자신의 바지 주머니 속에 숨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그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아침저녁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했습니다.
오후가 되면 나치스들이 가스실에 보낼 유대인들을 골라내는데 그때마다 번번이 의욕에 넘치는 턱을 가진 그 젊은이를 차마 가스실로 보내지 못했습니다. 외과의사는 나치가 패망할 때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수용소를 떠날 때 소지품은 단 하나, 푸른 유리병 조각이었습니다.
세계 2차 대전 이후, 유대인들은 유월절 명절에 부르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가 작사, 작곡된 곳이 학살 현장입니다. <아니 마민>-“나는 믿는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는 구세주가 오시리란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늦게 오십니다.”
학살의 현장에서 그 노래를 부르며 살아 나온 외과의사는 스페인으로 간 이후 유월절이 되면 <아니 마민>이라는 그 아름다운 고난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의 노래는 가사가 약간 달라져 있었습니다.
“신의 도움은 결코 늦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너무 성급할 뿐입니다”
결론
목욕탕은 계급장을 떼고 있는 곳입니다. 벌거벗은 사람들-거기에서 인격을 봅니다. 우리 마지막에 시신이 되었을 때 남는 것은 결국 인격뿐입니다. 기다림은 인격을 만듭니다.
12월. 초대교회에서는 성탄절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곧 주님의 재림이 임박했으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순교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을 점검하며 기다림의 믿음, 인격적으로 성숙되어져 가는 믿음을 성장시켜 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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