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자(牧子)들의 신앙
누가복음 8장 8~14절
서론
1992년, 다미선교회를 비롯한 시한부종말론이 소동을 벌였던 해입니다. 당시 2만여 명 시한부 종말론 신자들이 있었답니다. 이장림이 이끌던 다미선교회는 전국 173개 교회에 8,000명 신도들이 밤 12시만 되면 울부짖으면서 예배드렸습니다.
10월 28일, 휴거는 없었습니다. 다미선교회 이장림은 사기 혐의로 구속되었고 휴거가 불발하자 징역 1년 후 출소해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이름을 ‘이답게(‘사람답게’라는 뜻)’로 개명했고, 새하늘교회를 설립했지만 지금은 활동이 시원치 않습니다. 나중에야 “휴거는 처음부터 에러였다”고 고백했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시한부 종말론이 다시는 이 땅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한 사람의 잘못된 상상력과 진실 은폐가 한국교회에 엄청난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니 아이들 이름 잘 지어야 해요! 이장림, 장림이라고 지으니 종교적 ‘장님’이 된 것이지요!
그 많은 사람들이 왜 시한부종말론에 열광했을까요? 사는 것이 힘들었거나 재림신앙에 너무 몰두했거나 잘못된 종교서적과 사이비 설교자들에 현혹되어 정한 날짜에 예수님께서 공중 재림한다고 공언하고 흰옷 입고 강강술래하고 0시에 성찬예식을 한 다음 주님의 재림을 숨죽여 지켜보다가 본인들 망신은 물론 한국교회에 오명(五明)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한국교회 성장이 둔화되고 말았습니다.
20년이 지난 지금은 어때요? 정반대입니다. 지금은 아기 예수의 탄생과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대망절입니다. 그러나 지금 한국교회는 아기 예수 성탄, 재림에 대한 열망은 점수를 짜게 주면 100점 만점에 10점도 나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19일 저녁 6시 땡! 누가 대통령이 될까, 출구조사 발표에 온통 관심이 가 있습니다.
조상대대로 수천 년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제사장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들은 아기 예수 탄생에 누구도 참여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멀리서 찾아와 예물 드리고 양을 치던 목자들이 경배합니다. 재림 때도 내로라하는 교회와 목사들은 잠을 자고 뜻밖의 사람들이 영접하지 않을까, 염려가 됩니다!
여기 목자들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어떤 마음이었기에 성탄의 아기 예수를 받았을까요?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시고 아기로 탄생하시던 날, 8절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밤은 고된 노동을 멈추고 안식하는 쉼이 있고 상처가 아무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쉬지 못하고 맹수, 도둑들이 습격하지 않을까, 두려움으로 곤고합니다.
밖에서… 목자들은 예루살렘에서 밀려나 밖에 있습니다. 변두리 인생입니다. 따뜻한 공간에서도 밀려납니다. 낮에 땀과 추위에 노동하다가도 밤에는 집안에서 따뜻하게 보내야 합니다. 그래야 정상적 생활이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지금 밖에서-들판에 있습니다.
자기 양떼를 지키더니…. 짐승들과 함께 있습니다. 짐승처럼 무개념 인간으로 취급당합니다. 그러니 우아한 삶은 아닙니다.
예루살렘 성읍 사람들은 좋은 음식과 따뜻한 방에서 자고 있습니다. 목자들은 들에서 양을 지킵니다. 신세가 처량하며 가난이 대물림된다는 생각이 더욱 추운 밤이 되었겠지요. 성공자 위너가 되지 못하고 못생긴 패자 루저입니다. 그러기에 목자들은 현실보다는 미래에서, 자수성가보다는 메시아로 오는 신수성가를 더욱 대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은 별을 관측하며 왕을 기다렸고 목자들은 별을 바라보며 메시아를 소원했습니다. 들판과 광야는 고요함과 적막함이 흐르는 곳, 소음이 없는 곳입니다. 자연이 숨을 죽이는 곳! 사방이 어두우니 보이는 것은 별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순결해집니다. 복장은 남루해도 마음은 무욕(無慾)이고 맑았습니다. 양들과 함께 지내다보니 단순했고 착했습니다.
비록 제사장들처럼 서기관이나 성공한 상업인 바리새인들처럼 예루살렘 황금 성전도, 안락한 방도, 풍성한 저녁을 먹고 따뜻한 차로 가족 간의 사랑의 대화를 하는 멋진 생활은 아니었지만 삭막함과 황폐한 상황에서도 양을 재워놓고 높이 하늘과 별을 바라보며 선지자들의 예언을 생각했고 메시아를 갈망하는 영성이 목자들에게 있었습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 그들은 목자였으나 "베들레헴 목자들"입니다. 단지 양을 치고 양이 몇 마리 늘어났다고 기분 좋고… 그런 목자들이 아닙니다. 양을 치면서도 나름대로 분명한 세계관 메시아 대망사상을 품었던 의식 있는 목자들입니다. 양을 치면서도 기도하는 경건한 목자들입니다. 교양도 깔끔한 매너도 없지만 하늘을 바라보며 영원을 생각했고 메시아가 만들어 갈 세상을 염원했습니다.
한국교회는 크게 부흥하고 성장했습니다. 예배당 규모를 보면 대단합니다. 안락한 환경에서 좋은 교육시스템으로 교육 받고 예배드림은 큰 복입니다. 그렇다고 그곳에 성탄소식이 가장 먼저 전달될까요? 일류교회에 다닌다고 재림 예수님을 영접하는 비율이 높을까요?
금요일에 <아름다운동행> 편집회의가 있었습니다. 그 중 한 분이 오래된 교회 부교역자로 갔는데 예배당이 낡고 화장실에서 따듯한 온수가 나온 것이 1년밖에 안 되었다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우리교회는 아직도 화장실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다니까 농담 말라고 그래요.
우리교회 화장실 정말 온수가 나오지 않잖아요? 화장실도 형편없어요! 그래서 군말하지 않고 화장실을 사용하고 감사함으로 교회생활 하는 여러분이 더욱 대단하게 느껴지고 고맙게 여겨졌어요! 우리 예배당이 현대식 건물은 아니어도 예배드리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이만하면 어둡고 쓸쓸했던 목자들의 들판보다 나아요. 천사는 찬란한 장소에 오지 않고 거룩하고 미래지향적인 목자들의 영성에 찾아왔어요. 오늘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성전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성전입니다. 마음성전이 순수하고 고요하고 영성이 깃들여야 목자들처럼 주님의 재림을 감지하며 예고 받는 선택자가 될 줄 믿습니다!
천사들의 소식을 들은 목자들 반응은 어땠을까요? 대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구나! 그 춥고 외롭고 고독한 밤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습니다. 저들 목자에게 무슨 희망이 있고 기대감이 있습니까? 변두리인생으로 전락해 버리고 패색이 굳었는데 로또인생, 역전인생은 없습니다. 그러니 무슨 희망과 어떻게 살맛이 나겠습니까? 환경도 마음도 싸늘합니다.
그러나 천사의 방문으로 하나님의 관심! 사랑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들판의 자기들을 보신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만 보시는 줄 알았는데 나의 소박한 삶을 보신 것입니다. 긍휼히 여겨 밤에 찾아준 것입니다. 얼마나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아기 예수의 탄생은 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시대에… 우리 동네에… 여러 사람들 중에 나에게 성탄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신 것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의 감격입니다.
사실 목자들은 자기애(自己愛)가 부족한 사람입니다. 부모나 아내, 자식들에게도 변변히 대접 받지 못하고 살아온 목자들입니다. 가축들과 더불어 사는 자존감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이런 목자들에게 무슨 자기애가 있겠어요? 자기에 대한 긍정적인 자아상이 아니라 패배적 자아상을 갖고 살아왔습니다. 남들에게 사랑을 받아야 자기도 자기를 사랑합니다.
천사의 방문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었고 사랑을 받은 존재임을 자각하게 만듭니다. 비록 변두리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선택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비밀스럽게 세상에 들여보내실 때 그들에게 가장 먼저 알려주신 것입니다. 얼마나 큰 은혜요 사랑의 수혜자입니까? 자존감이 낮았던 목자들에게 요즘 천사라면 이런 노래를 불렀을까요?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사랑! 그래요! 나는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예수님을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는 거예요. 나는 사랑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중세시대 금욕주의자들은 공연히 자기를 미워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는 가르침을 금욕으로 받아들이고 자기를 괴롭히고 학대하고 미워했습니다. 몸을 송곳으로 찌르고 높은 나무토막 위에 앉아 고행했습니다.
그건 주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주님께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고 가르치셨습니다. 이기적인 성향을 경고한 것이지 자기를 미워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중에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거에 어떤 실수를 범했거나 부모에게 미운오리새끼 같은 취급을 받으면 자기를 사랑하지 못합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데 어떻게 남이 나를 사랑합니까? 내가 나를 만지고 내가 나를 위하고 내가 나를 사랑받도록 가꾸어야 합니다. 남에게 내가 미움 받는 거 나한테 미안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성탄은 목자들의 자의식을 확~ 바꿔놓았습니다. 대통령이 바뀐다고… 정권이 바뀐다고… 내가 바뀝니까? 내 인생은 아무도 바꿔주지 않습니다! 나를 사랑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나’이고 나를 미움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도 ‘나’입니다.
이런 말이 있어요! “하나님이 만드신 대로의 사람이 되라” 하나님이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었나요?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그래요, 나는 사랑을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부모님은 나를 사랑하기 위해 출산하셨지 미워하려고 낳으신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면 이기주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면 아름다워지고 풍성해지고 감사가 넘칩니다. 이것이 첫 성탄을 맞는 목자들 인생의 터닝 포인트입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왜 자기사랑이 너무 지나쳐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되어가고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너무 지나쳐 자기밖에 모르는 똑똑이로 만들어 버릴까요? 사랑을 받기만 하지 그 사랑을 흘려보내지 못하기에 사랑이 고여 부패하고 만 것입니다. 부패에는 사랑의 재생산이 일어나지 않으니 사랑의 풍성함이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제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세요! 후회놀이를 멈추세요! 우리가 살다보면 내가 나를 싫어할 때가 있고 자신감이 없을 때가 있어요! 과거에 유쾌하지 못한 추억들… 상처들… 그래서 나도 내가 싫어요. 그러면 자학합니다. 내가 나를 괴롭히는 것이 자학이잖아요? 그러면 나는 점점 못난이가 됩니다. 점점 미워지고 미운 짓을 합니다. 내가 나를 죽이는 거예요!
레스터 레븐슨은 ‘릴리징 테크닉’ 창시자입니다. 흘려보내기 기법입니다. 아픈 추억도 흘려보내고 미움도 흘려보내고 실패도 자꾸 흘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좋은 것만 기억하고 간직하며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 안에는 좋은 추억들만 남고 내 주변에는 좋은 인상과 사람들만 남고… 그러면 내가 나를 사랑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를 응원하는 것이지요!
다윗은 자기를 응원하는데 선수였습니다. 20여년 고난의 길을 살았습니다. 그러면 골리앗을 물리친 용사도 무너지지요! 주변에 아무도 없어요! 멘토 사무엘도 죽었습니다. 누가 나를 응원해 줍니까? 다윗은 스스로를 위로합니다. 시 42:5, 11, 43: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불안해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러브 유어셀프(Love Yourself). 너 자신을 사랑하라! 나는 참 나를 사랑합니다. (미안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조건에서 이만하면… 기특합니다. 때로는, 자신이 미울 때도 많아요. 너는 왜 이렇게 생겼냐? 청소년 때 왜 열심히 공부해두지 못했냐… 그때 조금만 더 참지… 있을 때 좀 더 잘해주지… 그러면 나도 내가 미워요! 계속 미워하면 내가 더 불쌍하잖아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그런 생각들은 흘려보내고 내가 나를 응원하고 격려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보세요! 우리 엄마의 마음으로 나를 보세요!~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런 나를 위해 하나님은 성탄의 큰 기쁨을 주시는 것입니다. 성탄절은 자기애를 확인하고 나를 응원하는 절기입니다. 그게 전부일까요?
8절, 그 지역에 목자들이… 그 지역은…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베들레헴입니다. 메시아 탄생 기별을 듣고… 15절, 베들레헴으로 가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바를 확인하자·…. 이런 정황으로 보면 베들레헴 목자들입니다. 베들레헴은 다윗의 고향,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으로 오신다고 성경은 예언합니다. 이새의 아들 다윗의 뿌리에서 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들 베들레헴 목자들은 메시아 대망사상이 누구보다도 강렬했던 신앙인들입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차로 15분 거리입니다. 가깝지요! 성전에는 하루에도 수백에서 수천마리 양들이 희생 제물로 도살됩니다. 미국최고의 명절 추수감사절에는 4천~5천 마리 칠면조가 희생됩니다. 유대인의 최고 명절 유월절에는 백만 명이 모였다고 합니다. 코딱지만 한 예루살렘에서 매일 수백~수천마리 양과 소가 어떻게 대량으로 공급됩니까?
베들레헴 목자들은 성전제사장들과 계약을 맺어 희생 제물로 양을 공급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목자들은 밥벌이만으로 양을 사육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희생 제물로 바쳐지는 짐승이기에 정성과 희생을 다합니다. 희생동물은 흠이 없는 깨끗한 제물이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목축하면서 말 못하는 가축이라고 함부로 대하거나 걷어차는 것이 아니라 먹이를 주면서, 잠자리를 돌보면서 정성을 다합니다. 양은 제품이나 물건이 아니라 하나님께 바쳐질 거룩한 제물입니다. 하나님의 성물(聖物)을 대하는 제사장 심정으로 양을 관리했을 거예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제사장보다 훨씬 거룩한 사람들이고 기뻐하시는 사람들입니다.
얼마만큼 되면 양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죽음 행(行)입니다. 그럴 때마다 메시아의 강림을 목마르게 기다렸습니다. 그래야 저 불쌍한 것들의 희생을 막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양들이 많이 죽어야 수입이 늘어납니다. 성전이 더욱 화려해 가고 수입이 늘어납니다. 백성들 역시 죄를 짓고 양심의 가책이 있는데 양들이 대신 죽고 가책을 없애니 양의 죽음을 얼마나 반기겠습니까? 목자들은 다릅니다. 목축이 생업이지만 양들의 죽음도 불쌍합니다. 가장 독한 사람은 제 집에서 키우던 가축을 제 손으로 죽여 잡아먹는 사람이랍니다. 자기 집 강아지를 제 손으로 죽여서 제 손으로 입에 넣으면 사람도 죽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 양들의 희생 앞에서 목자들은 더욱 메시아를 갈망합니다. 사는 것은 그래도 도덕심과 종교심은 깨끗한 베들레헴 목자들입니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교육심리학자 콜벅은 <도덕발달학>이라는 학문을 개척한 사람입니다. 그는 도덕률이 낮고 높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자기만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도덕률이 가장 낮고 자신을 희생하며 남을 위하여 사는 사람의 도덕률이 가장 높다"
콜벅은 도덕률이 가장 높은 사람은 인도빈민가 캘커타의 대모 테레사수녀라고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바티칸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은 어떤가요? 정말 도덕률이 높을까요?
콜벅은 워싱턴 정치가들과 시골 농부의 도덕심을 실험했습니다. 시골 농부들의 도덕심이 더 높게 나타났습니다. 세상 학문과 교양이 도덕률을 향상시키지 못한다는 증명입니다.
누가 다시 오실 메시아를 맞이할까요? 타인의 고통을 돌아보는 사람, 타인의 희생을 아파하는 사람들, 바로 목자의 사랑을 가진 이들이 재림의 예수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양을 보며 목자들은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봅니다. 모리아 산에서 이삭 대신 죽은 수양을 봅니다. 그러니 누구보다도 신앙적이고 메시아대망으로 가득 찹니다. 하나님께서는 성탄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셨고 첫 성탄 방문객이라는 영광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지만 지나놓고 보면 복 받을 사람이 복을 받습니다. 복 받을 때는 그만한 까닭과 이유가 있습니다. 물론 구원문제는 다릅니다.
목자들은 양들의 죽음에서 희생을 배웁니다.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 때로는 왜 자기밖에 모릅니까? 받은 사랑을 나눠주고 남에게 흘러 보낼 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받지 못해 범죄자가 되지만 제대로 사랑을 할 줄 몰라서 범죄자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받은 것만큼 넘겨주고 흘러 보내야 더 많은 사랑을 담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목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천사의 방문을 받은 곳! 그곳을 성지로 만들고 기도원을 짓고… 그곳에서 안주했을까요? 산위에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에 황홀해진 베드로, 유대인이 가장 존경하고 우러러 보았던 모세와 엘리야, 특히 베드로 같은 사람들에게는 자기 성향에 딱 맞는 위인들이 아닙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남을 생각하지 못하고 “우리가 여기에 장막을 짓고 삽시다” 황홀함 속에서 살자고 제안합니다.
목자들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습니다. 세상과 인연을 끊고 천사들이 나타났던 곳에 기도원을 만들고 천사숭배 종교를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은 오늘의 체험, 개인의 은혜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축복을 받았다고 현재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더 큰 은혜 더 큰 사랑 더 큰 축복으로 나아갑니다. 천사들이 올라간 하늘만 멍하니 쳐다보고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채 몽롱한 눈으로 하늘만 바라보지 않고 15절,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알리신 바를 알아보자며 16절 빨리 갔습니다.
지금 마구간은 어떤 형편입니까? 꼴이 말이 아닙니다. 목수 요셉이 얼마나 변변치 못한지 도무지 남편 노릇을 못하고 있습니다. 여관방을 못 잡은 거예요. 조금 일찍 서둘러 호적 하러 오던지, 방이 없다면 웃돈이라도 찔러줄 만큼 돈이라도 벌어놓던지 만삭 아내를 인질로 땡강이라도 부려 호텔방은 아니어도 따듯한 방은 얻어주어야 하잖아요? 동방박사들도 동석했을 거예요. 그들 입장에서 그래요, 별의 인도함을 따라 멀리서 오긴 왔지만 왕이라고 하기에는 뭐 이래요? 왕이라면 왕궁에서 알현해야 할 텐데… 무슨 신하 하나 없는 왕의 탄생이 있어요? 기대가 컸기에 순간적으로 실망했고 심란했을 거예요!
그런데 목자들이 찾아온 거예요! 17절 천사들이 나타났던 모든 이야기를 전하니 18절, 듣는 자가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이 단어는 ’신기하게 여기다‘, '찬양하다'…. 거룩한 하나님의 개입에 너무 놀라고 그동안 마음속에 뭐가 이래? 가졌던 의문이 일거에 날아가 버리고 메시아 탄생이라는 확신 앞에서 찬양의 분위기로 반전되었다는 것입니다.
마구간은 춥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이 입었던 양털 옷을 벗어주고 자리를 폭신폭신하게 다시 만들고 요셉과 마리아에게 축하를 건네주고 동방박사들에게는 유대인을 대표해서 고맙다고 감사를 전했을 거예요! 목자들로 인해 마구간의 모두는 훈훈한 마음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사랑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목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만족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주기 위해 양도 놔두고 떠났습니다. 양을 습격 받던지 도둑들이 양을 가로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 전해주기 위해 자신들을 희생합니다. 사랑의 또 다른 말이 희생입니다. 사랑은 희생하기로 작정하지 않으면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러면 이기심이라는 또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목자들의 사랑은 자기들의 소유를 희생하면서 그 사랑을 전할 때 훌륭한 자기애가 된 것입니다. 사랑은 희생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습니다. 자기희생이 없는 사랑은 또 다른 자기애이고 불륜입니다.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만이 아름다운 사랑이 됩니다.
남자들이 군대에 가서 모처럼 전화를 걸면 엄마가 있을 시간을 고릅니다. 혹이라도 아빠가 전화를 받으면 누구나 하는 인사말로 때우고 빨리 엄마에게 바꾸기를 좋아합니다. 아들이 나를 좋아한다고 전화기를 들고 늑장을 부리면 눈치 없는 아버지입니다. 줄을 서서 부대전화를 쓰는데… 분초가 아까운 아들은 엄마와의 통화만을 원하는데 아버지가 거기에서 또 훈계합니다. 남자는 어쩌고저쩌고… 훈련병들이 훈련을 모두 마치고 어머니의 노래를 부르면서 모두 울어요! 그러다가 아버지 이야기만 나오면 슬그머니 눈물을 감춥니다.
왜 그럴까요? 아버지가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가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아요! 그럼에도 아들은 왜 부성애보다 모성애를 더 원할까요? 모성애 앞에는 눈물로 대접할까요? 희생이 있어서 그래요! 엄마가 아버지보다 더 많이 참아주고 더 많이 염려해주고 더 편들어 주고 더 많이 손해를 보면서 자기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을 알기에 모성애가 더 크고 장정 남자들이 모성애 앞에 눈물을 보이는 것입니다.
목자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자기를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에 대해 두고두고 행복했고 그 순간 이후 그들은 자기들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계신지 알았습니다. 사랑은 목자들을 변화시켰습니다. 목자들은 자기들의 인생, 자기들의 직업,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베들레헴 목자들이 된 것입니다.
자기애가 그릇된 이기주의로, 자기자랑으로 빠지지 않았던 것은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랑, 상대방을 사랑하기 위해 내 것을 포기하는 마음이 쓸쓸한 마구간을 파티장으로 만든 것입니다.
결론
인도에서 가장 소란하고 복잡한 도시는 캘커타입니다. 이 도시 빈민가에 테레사 수녀가 세운 <사랑의 집>이 있습니다. 영국의 한 여기자가 수녀에게 “사랑이란 무엇인가?” 라고 물었습니다. 수녀는 쉽게 대답했습니다.
“그것은 캘커타의 한 소년이 사랑의 집에 들고 오는 사흘 분의 설탕이다.”
테레사 수녀는 그 말의 뜻을 해석해 주었습니다. 어느 날 마더 테레사가 경영하는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캘커타에 사는 모든 시민이 그 소문을 들었습니다. 한 소년이 어머니에게 요청했습니다.
“오늘부터 사흘 동안 설탕을 먹지 않겠어요. 그 대신 제가 먹지 않은 그 사흘 분의 설탕을 제게 주세요. 사랑의 집에 갖다주겠어요.”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고 걱정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남을 돕기 위해 결단하고 자기 몫의 설탕을 먹지 않고 그것을 가지고 간 사람은 오직 어린 소년 하나였습니다. 사랑은 큰 희생만 요구되는 게 아닙니다. 작은 희생으로도 남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말합니다.
“사랑은 보고, 느끼고, 그리고 책임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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