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成肉身)의 3대 정신
요한복음 1:14, 15
서론
성탄절입니다. 성탄은 성자 하나님께서 동정녀의 몸을 입으시고 아기 예수로 오신 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탄생하신 날입니다. 이를 요한은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한문으로는 “성육신”(成肉身), 영어로는 “인카네이션”(incarnation)입니다.
성육신-인카네이션의 정신은 성탄절에 우리 가슴에 새겨놓아야 할 기독교의 기본정신입니다.
성육신정신1. 수용함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 것은 높은 분이 낮은 자의 자리로 내려와 같은 신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높은 자리로 올라오라” 하면 누구도 올라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곳에 계시고 인간은 죄로 더러운 육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내어놓고 낮고 천한 인생의 자리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이 관계를 ‘대화적 관계’라 합니다. 대화가 되려면 같은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청소년들이 “저 사람 단무지야” 하면 이는 ‘단순, 무식, 지랄’의 줄임말로 상대방을 비방하거나 욕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특공대’는 ‘특별하게 공부도 못하면서 대가리만 큰 사람’, ‘대단한 사람’은 ‘대가리가 단단한 사람’, 이런 시대에 거룩한 용어로만 설교하면 듣겠어요? 대화가 안 됩니다.
아이들 수준으로 내려와 그들 언어를 사용해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핵심인 ‘인카네이션’ 성육신입니다. 인간의 처한 형편과 사정을 이해하시고 수용하신 것! 그게 성육신입니다.
남을 수용하려면 남의 입장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를 영어로 ‘언더스탠드’라 합니다. 언더스탠드(understand), under는 ‘아래에’, stand는 ‘서보다’의 합성어입니다. 상대방을 언제 이해할 수 있는가? 같은 입장으로 서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 병을 앓아본 사람이 제대로 그 환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행복반과 효도관광을 다니면서 너무 자주 휴게소화장실 출입을 보고 왜들 저러시나,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요즘 내가 그러니 이제야 이해가 가면서 회개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나도 그 분들의 그 당시의 나이가 되어보니 그 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이해하려면 낮은 자리로, 상대방이 처한 형편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자기희생 없이 상대방을 내게 맞추려니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오해가 생기고 분란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탄의 진정한 의미는 서로에 대한 수용입니다. 자신을 내려놓고 상대방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내려놓는 일-그것이 바로 겸손이요 내려놓음이요 낮아짐입니다. 모든 이들과 대화적 관계가 되려면 더 낮아져야 합니다. 비워야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서야합니다. 그래야 수용의 범위, 용량이 크게 됩니다. 거기서 진정한 성탄의 의미가 살아날 수 있습니다.
성육신정신2. 조화로움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육신의 몸을 입으신 것입니다. 그랬다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되었다’가 아니라 ‘육신을 입으셨다’는 표현에 더 주의해야 합니다.
성경이 사용하는 육(肉), 육신(肉身)의 개념은 문자 그대로 육체(고기)-몸뚱이와, 하나님 중심의 삶을 떠나 자기 마음대로 살려는 정욕적인 성향(性向), 그러한 삶의 방식(체제)입니다. 따라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입으셨다는 것과 이런 죄의 체제 가운데로 들어오셨다는 것입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하는 것처럼,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는 길은 죄인의 체제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이 인간이 되었다고 할 때 다른 종교에서는 화신(化身)이라고 합니다. 성육신은 이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은 하나님 신분(身分)을 버리고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은 그대로 유지하신 채 사람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신성-인성의 양성연합이라 합니다. 50% 하나님, 50% 인간이 아니라 100% 완벽한 하나님, 100% 완벽한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시면서 하나님(신성)되심을 수도 없이 보여주셨습니다. 바다를 잔잔하게 하심… 죽은 사람들을 살려주심… 오병이어의 축복… 각종 불치병을 고치심… 마음을 꿰뚫어보심… 하나님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이적들입니다. 특히 죄사함의 선언은 하나님(神)의 고유한 영역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아니면서도 죄를 사해주었다면 하나님을 빙자해서 사람들을 속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인격으로는 신이 아니면서도 죄를 사해주는 일은 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유지하고 계셨기에 죄를 사하는 권세를 나타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완벽한 인간입니다. 우리처럼 출생하고 성장하고… 배고프고… 눈물 흘리고… 우리와 같은 혈통입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것에 우리와 같지만 죄는 없다고 합니다(히 4:15). 죄 없는 육체를 위해 동정녀의 몸을 빌려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는 신성과 인성이라는 양성이 존재합니다. 이런 존재는 하늘과 땅을 통틀어 유일합니다.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의 두 연합에서 완전한 조화를 이루었습니다.
예수님은 신성(神性)을 인성(人性)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신데 왜 목수 일이 필요했겠어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물건 주문을 받고 밤중에 “의자 나와라! 뚝딱!” “대문 나와라 뚝딱~” 그렇게 하셔도 되는데 며칠이건 대패로 밀고 톱으로 자르면서 땀을 흘리며 물건을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이시기에 밥을 먹지 않아도 되는데 제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화장실 출입을 했습니다. 자신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세상에 왔고 인간이 되었기에 철저히 자신의 신성을 잠재하고 절제하신 것입니다.
주님 안에는 강함과 부드러움이 공존해 있었습니다. 카리스마와 온유가 조화를 이룹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의 탄생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며 살려면 중용-조화를 이루는 삶을 노력해야 합니다. 어느 한쪽에 기울어지지 않는 마음-중심을 잡는 마음, 이것이 필요합니다.
어떤 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는 좋아 보입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출석, 헌금 잘 하고… 그런데 사람들과의 관계가 소원합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들과는 아주 좋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좋아합니다. 문제는 영적으로는 너무 약합니다.
이것은 조화를 이루는 삶이 아닙니다. 성육신적인 삶을 살려면 지나치게 영성으로 기울어져도 안 되고 지나치게 육신 쪽으로 기울여져도 안 됩니다. 중심을 잘 잡고 살아야 합니다.
1954년 인도차이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대국 총리들이 모였습니다. 중국 주은래 총리가 가장 먼저 도착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미국의 팰래스 국무장관은 늦게 도착했습니다. 주은래가 반갑다고 악수를 청하자 팰래스는 “나는 지독한 공산주의자와는 악수를 나눌 수가 없소”며 악수를 거절합니다. 기분이 좋겠어요? 화가 난 품은 주은래-그 앙심은 팰래스 개인에 대한 앙심이 아니라 미국 전체를 향한 분노가 되었습니다.
주은래는 중국을 20년 동안 통치하면서 미국과 사사건건 대립했습니다, 베트남 전쟁을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 장본인이 주은래인데 미국이 실패한 전쟁이고 엄청나게 손실을 입은 전쟁입니다. 역사가들은 미국과 중국의 앙숙관계가 호의를 받을 줄 몰랐던 팰래스 장관 때문이라고 합니다. 팰러스가 반갑게 악수했다면 베트남 전쟁은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베트남전쟁으로 미국병사는 6만 명 가까이, 한국국은 5천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전사했습니다. 한 사람의 중용미숙이 수많은 젊은이들을 죽음으로, 죄없는 국민들을 죽음으로 부상자로 몰아넣었던 것입니다.
팰러스는 개인적인 감정과 국가적인 이익을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공산주의에 대한 증오는 있었지만 공산주의가 세상에 악을 행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는 리더십은 없었던 것입니다. 그에게는 중용(中庸)이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죄의 체제-죄의 성향인 세상에 들어오셨지만 거룩이라는 신성(神性)의 자기정체성을 유지한 채 상대방을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이것이 우리 주님에게 배워야 될 부분입니다. 세상에서 함께 어울리면서 어떻게 좋은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그들과 같은 성향이 되지 않고… 그러면서 그들을 오히려 변화를 시켜나갈 것인가… 그러기에 중용(中庸)과 조화를 잘 이루어가는 성육신 신앙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육신정신3. 표현됨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그 분이 눈에 보이는 육체를 입었습니다. 이제는 인간의 가시권-문화권 속에 들어온 것입니다. 인간의 가시권에서 사역했고 능력을 보였습니다. 거기서부터 구원의 역사가 나타났고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 마음속에 강력하게 전달되었습니다.
성자 하나님의 자기표현(自己表現)-즉 행동을 통해 사람들은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하나님은 어떤 분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낮은 자리에 오신 분입니다. 우리가 겸손해야 함을 말합니다. 광야에서 40일의 금식과 시험을 통해서 세상과 타협을 하지 않는 사람을 들어 사용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겸손한 자를 좋아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독생자를 내주심으로 죄인된 우리를 어느 정도까지 사랑하시는가, 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성육신은 하나님의 자기표현입니다. 그러기에 성탄절은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만 있던 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성육신의 정신은 보여주는 행동에 있습니다.
캘커타의 빈민가에 마더 테레사 수녀가 경영하는 <사랑의집>이 있습니다. 기자가 찾아와서 진정한 사랑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테레사는 대답했습니다.
“사랑이란 캘커타의 한 소년이 사랑의 집에 들고 오는 사흘 분의 설탕입니다”
언젠가 테레사 수녀가 운영하는 <사랑의 집>에 설탕이 떨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모두 걱정했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그날 저녁 엄마에게 말했습니다.
“엄마! 오늘부터 사흘 동안 설탕을 먹지 않겠어요. 그 설탕을 모아 저에게 주세요!”
소년은 사흘 후 자신이 아끼는 설탕을 들고 사랑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테레사는 말합니다,
“사랑은 보고 느끼고 그리고 책임지는 것이다”
우리도 성육신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성육신 신앙은 우리 속에 심어놓은 하나님의 마음-자비와 긍휼과 사랑과 용서… 마음을 사람의 가시권 안으로 나타내 열매를 보여야 합니다. 아무리 큰사랑, 지고한 사랑이라 해도 표현되기까지는 사랑이 아닙니다. 표현된 사랑, 나타난 사랑만이 진짜 사랑입니다!
결론
14절.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본문은 요한이 주님과 3년을 함께 지내고… 모든 것을 지켜보고 난 다음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초라했던 33년의 모습 속에서 하나님의 신성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니”라고 합니다.
“보았다”라는 단어는 특수 용어로 멀리서 보았거나 우러러 본 것이 아니라 옆에서 뚫어지게 똑바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예수가 독생자의 영광-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기 예수의 탄생에서 어떤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까? 대화적 관계를 이루기 위해 육신을 입고 낮아지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신성과 인성, 강함과 부드러움, 카리스마와 온유가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내고 보여주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2017년 성탄절, 아기 예수만 보고 요셉과 마리아만 보고 동방박사나 목자들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우리가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진면목을 더 많이 보며… 이해하며 공감하며 행동하며 살려는 다짐의 성탄절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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