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기독교 신앙을 믿는가?
신명기 33:26~29
서론
지난 8일, 선거 연설을 하던 아베 신조 전 일본총리가 41세의 남성(야마가미 데쓰야)의 총에 사망했습니다. 범행이유는 정치가 아니라 이외로 종교였습니다. 가해자는 “어머니가 일본 통일교신자로 10억 원 가까이 헌금해서 집안이 파산했다”며 “통일교와 이에 협조적인 아베 총리는 반드시 벌을 줘야 한다고 원망해왔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국민일보는 종교난에 <아베 총격 사건이 던진 질문…“종교는 무엇입니까?”>라는 톱 제목으로 기사를 달았습니다. 종교가 과연 21세기 우리 시대에 필요한가, 그런 질문입니다.
지난 4월 국민일보와 코디연구소의 설문조사는, 국민 10명 중 7명 정도는 종교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는 데에 공감했습니다. 종교가 필요한 이유로는 ‘도덕성 고양’(26.1%)과 ‘사회의 공동선 추구’(20.2%)가 꼽혔습니다. 바람직한 종교역할을 묻는 복수질문에 ‘이웃에 대한 사랑’(82%) ‘현실의 고통을 이기게 해주는 것’(75.5%) ‘사람들의 가치관을 변화시키는 것’(72.9%)이란 답변이 많았습니다.
진정 종교들은 그런 역할을 제대로 감당해 왔을까요? 사실 종교만큼 두 얼굴이 없습니다. 세상을 위해 가장 선한 일을 했으면서도, 가장 해악된 일을 한 것도 종교입니다.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종교의 충돌’(장-폴 루, 파야르, 459쪽)은 종교적 광기가 부른 살육의 역사를 다룹니다. 로마교황청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십자군 전쟁(1095년~1291년)은 9차례 전투로 수백만이 죽었습니다.
교황청은 프랑스에서 성 바돌로매축제일에 신교도 위그노 7만 명을 학살합니다. 종교재판으로 마녀사냥을 하면서 무수한 개신교 신자들을 죽였습니다. 약 150만의 알제리 이슬람교도들이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의 손에 학살당했습니다(마이트레야 선정 기사). 히틀러의 광기에 협력한 것은 교황청과 유럽 천주교, 기독교, 특히 독일교회였습니다.
이슬람의 정복전쟁과 테러를 통해 사망한 이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가장 끔찍한 것이 2001년 9월 11일 뉴욕 쌍둥이빌딩 세계무역센터를 공격해서 2,996명의 사망자를 내고 6,000여 명~25,000여 명의 부상자를 낸 사건입니다. 지금도 중동을 비롯한 이스라엘-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전쟁들은 대부분 기독교와 이슬람, 유대교와 이슬람의 종교전쟁입니다. 종교주의자들이 벌인 전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죽어가고 있습니다. 아마 세계1,2차 대전을 비롯한 수많은 전쟁의 사망자보다 종교 전쟁에서, 종교의 명목 하에 죽은 사람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종교는 악마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는 말이 나왔을까요?
이상으로만 보면 종교는 세상에 무익합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들은 “종교는 아편이다” 비하합니다. 환상적 행복에 마취시켜서 순간순간 아편이나 진통제처럼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 교수는 ‘신은 망상의 산물’이란 신념을 가진 유명한 무신론주의자입니다. 그는 토론회에서 “종교는 잘못된 설명을 퍼뜨림으로써 과학의 노력을 저해한다”며 “종교는 쓸모없고 무의미한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어 “종교는 인간의 지적능력에 대한 배반이자,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모든 것에 대한 배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정말 그럴까요? 종교는 아편이나 진통제 정도밖에 되지 않을까요? 종교가 사라지면 인간의 가치와 삶의 의미도 사라져 버립니다. 춤과 음악이 없는 세상, 문학과 영화가 없는 세상, 과학과 의학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세요. 그건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동물적인 수준으로 먹고 싸고 자고… 그렇게 의미 없이 살다가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교가 없다면 영적인 면을 채워낼 수가 없습니다. 육체의 욕구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욕구! 영적인 욕구는 종교만이 채워 넣을 수 있습니다. 종교는 아편이라 주장하던 공산주의자 스탈린이나 브레즈네프도 말년에 건강이 악화되자 성직자에게 기도를 부탁하며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강철 같은 독재자들도 죽음이 가까워지자 무서워 종교라는 마약에 빠지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종교가 왜 필요할까요? 사정이 이러다보니 종교 무신론, 종교해악론, 종교말살론… 특히 대한민국에서 기독교는 비판 받고 폄훼 당하고 공격당하고 있습니다. 동성애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차별금지법에 앞장 서 반대한다고 기독교를 시대에 뒤떨어진 종교라 조롱합니다. 그래서 많은 청소년 청년들, 진보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도 기독교신앙은 왜 필요한가, 기독교신앙은 무엇인가, 오늘은 내 개인의 생각으로 종교의 의미를 물어보겠습니다.
아름다운 자아상-행복한 자존감
종교, 특히 기독교신앙은 내게 어떤 유익을 주었을까.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사실 자체가 기쁨이고 행복이며 아름다운 자아상을 주었습니다. 자아상(自我像)은, “자신의 역할이나 존재에 대하여 가지는 생각”입니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면 귀한 행동이 나오고 자신을 시시하게 여기면 시시한 행동이 나옵니다. 자아상은 운전사입니다.
미국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으로 반을 만들고 실험했습니다. 몇 달 후, 행동 변화를 체크해 보니 진화론 학급은 점점 동물적으로 변하고 창조론 학급은 품위 있게 변해있었습니다.
그래요! 예수님을 믿으니 창조론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으니 “나는 하나님의 창조물”이라는 자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자아상은 ‘내가 생각하는 나’입니다. 내가 누구냐? 그냥 우연히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귀한 창조물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세상에는 너 하나밖에 없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삽니다. 얼마나 대단한 자아입니까?
모세가 백성들과 작별하면서 이런 자아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29절,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우리가 자라면서 제대로 사랑을 받아보았습니까? 부모님에게 사랑은 있었지만 표현되지 않는 사랑이었기에 사랑을 몰랐습니다. 어른이 되어,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사랑을 알았지만 그때는 그 사랑으로 행복이 아니라 죄송하고 그 사랑을 받고도 행복하지 못했음에 아쉬움이 큽니다.
그랬던 제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교회가면 맨날 듣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고백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왕의 승은(承恩)을 입는 것이 얼마나 대단합니까.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인식이 있다면 얼마나 당당하고 자신감으로 넘치겠습니까? 이런 높은 자아상, 행복한 자존감을 기독교신앙이 주고 있으니 내게는 종교가 너무 감사한 것입니다. 그래서 26절, “여수룬이여 하나님 같은 이가 없도다…” 하나님을 믿으니 그냥 좋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서 너무 좋습니다! 이것이 내가 기독교신앙을 갖는 이유입니다.
문제 해결
종교가 왜 필요한가? 언제까지 필요한가? 어떤 이들은 과학이 계속 발전하면 종교는 사라진다고 했습니다. 종교는 신비감으로 존재하는데 과학이 종교의 신비를 벗겨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비가 모두 벗겨지고 과학과 의술의 발달로 최고의 행복이 제공된다 해도 사람이 사는 세상에는 문제도 함께 존재합니다.
‘문제(問題)’는 ‘해답을 요구하는 물음’입니다. 수학문제, 환경문제, 정치문제, 식량문제, 식수문제… 수학처럼 답이 나오는 문제들도 있지만 살아가면서 생기는 문제들은 수학이나 의학이 답이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왜 이렇게 태어났나? 내게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나? 우리 자식들에게는….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특히 죽음의 문제… 등은 누가 답을 줄 수 있습니까? 이런 문제들을 어떻게 수학자에게 묻고 정치가들에게 해답을 요구할 수 있습니까? 여기에 대한 답이 종교입니다. 물론 종교가 모든 답은 아닙니다. 앞에서 말하는 의문들은 종교조차도 제대로 답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복음 안에서 답을 구하며 찾으며 얻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해답을 얻었습니까?
29절,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구원이 바로 건져냄입니다. 물음에서 질문에서 답을 얻는 것입니다. 종교만이 해답이 있기에 어려움에서도 계속 하나님에게 묻고 성경에서 설교 들으면서 마음에 다가오는 느낌과 생각들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답이라 생각하며 견디어 내는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이 주는 힘입니다.
보호와 인도
어떤 이는 종교의 출발은 공포, 불안, 두려움이라 했습니다. 일반적인 종교 기원으로 볼 때는 맞습니다. 원시인에게는 사방이 두려움입니다. 이 모든 두려움에는 전지전능하신 존재가 있음을 믿었습니다. 천둥과 벼락이 치면 신이 노하셨는가, 가뭄과 흉작이 되면 신의 심기를 건드렸는가, 끔찍한 한센병에는 천형의 벌이라, 역병에는 하나님의 노기가 있다… 그래서 신들을 달래려 신들을 만들고 제사 드리면서 종교가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는 가능한 해석입니다.
기독교의 신관은 다릅니다. 기독교 신관은 종교가 하나님에게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영원성, 종교성을 심어놓으셨습니다.
“하나님이…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전3:11)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심어주셨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신앙의 기원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타종교들은 종교창작물이지만 기독교신앙은 하나님의 계시산물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신앙을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에 대해서, 27절, “영원하신 하나님이 네 처소가 되시니 그의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에 있도다 그가 네 앞에서 대적을 쫓으시며 멸하라 하시도다”
29절,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영광의 칼이시로다” 그래서 28절, 이스라엘이 안전히 거하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도와주심으로 죽음의 광야를 넘겼고 앞으로 가나안에서도 그런 보호와 도우심으로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승리를 공언합니다.
제게도 기독교신앙은 그런 것이었고 다섯 살부터, 또한 객지생활에서 하나님께서 보호해주신다는 확신 속에서 맡기며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니 기독교신앙은 얼마나 중요하겠습니까?
사후의 보장
인간이 끝까지 해결하지 못할 난제가 죽음입니다. 사실 잠과 죽음은 눈을 뜨느냐, 눈을 뜨지 못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자다가 눈을 뜨면 '수면'이고 눈을 뜨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삶과 죽음이 아주 간단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간단하지 않는 것이 잠은 깨고나면 현실 그대로인데 죽음은 깨고나면 도대체 어디일까, 하는 것입니다. 차라리 죽어 깨지 않으면 다행이지만 깨어난다면 천국이냐 지옥이냐 구천을 떠도는 유령으로 살아갈 것인가? 그래서 죽음이 무섭고 죽은 이는 끝나지만 살아남은 자들의 고통이 너무 크기에 죽음을 두려워 하는 것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비밀은 종교, 기독교신앙만이 해답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로 왔기에 하나님에게로 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공로로 우리의 죄를 정결하게 해주셨기에(롬 4:25) 우리는 기쁨으로 그 분 앞에 섭니다. 앞서간 이들이 우리를 마중할 것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주님을 위해 헌신한 일에 대한 보상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기독교신앙만이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신앙을 믿는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공중곡예사 이야기를 합니다. 남자곡예사는 공중사다리에 달려있고 여자곡예사는 공중곡예를 계속합니다. 공중에서 왔다 갔다 하다 탁! 손을 놓습니다. 떨어지면 죽는데 어떻게 손을 놓습니까? 내가 날아가면 내 손을 분명히 붙잡아 준다, 남자곡예사는 실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사실을 믿기에 여자곡예사는 손을 놓는 것입니다.
우리도 언젠가는 공중곡예사가 줄을 놓듯이 생애의 줄을 놓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다음생애에서 받아줄 사람이 있나요? 천국에서 받을까요? 내가 죽었을 때 받아주는 이가 없어 지옥으로 떨어질까요? 죽음은 “아버지, 내가 갑니다! 받아주세요!” 생명줄을 놓으며 출(出)세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죽음 앞에서 과학도 예술도 명성도 소용없지만 기독교신앙은 소망의 줄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독교신앙을 믿습니다.
결론
종교는 계속해서 두 얼굴을 보일 것입니다. 선한 얼굴과 악한 얼굴! 유익과 해악됨! 전쟁과 평화! 이런 과정에서 종교가 악하다 하여 선한 얼굴을 외면할 것입니까? 홍어가 냄새난다하여 버리면 그 맛은 어찌 느낄 수 있습니까? 냄새가 나면서도 먹어야 진짜 홍어 맛입니다. 기독교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기독교는 세계사에 많은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일부분입니다. 작은 잘못이 있다하여 기독교 신앙자체를 버린다면 아기를 목욕시키다 목욕물이 더럽다고 아이까지 던져버리는 우를 범하는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백정 문제를 해결해주고 학교와 병원을 세우고... 여성들의 참정권을 끌어내고... 독립운동에 앞장 서고... 성경을 읽히기 위해 한글교육을 시키고... 이런 한국 기독교가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의 혜택을 대한민국 국민전체가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국가는 몰라도 한국은 기독교를 함부로 조롱하거나 폄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미국 고든 콘웰대 세계기독교연구센터는, 2025년부터는 무신론자 인구보다 종교인의 수, 그중에서도 기독교인의 수가 더 늘어 종교의 시대가 올 것이라 예측합니다. 그만큼 세상은 잘 사는 것만큼 크고 작은 사건들의 연속이고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귀한 선물 기독교신앙을 잘 간직하여 행복한 자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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