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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사도행전 2:1~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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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1~4절

 

서론

한국 교회의 절기 중에서 성령강림절은 절기대접을 받지 못하고 절기헌금도 없습니다. 부활절 감사절 성탄절 우리에게는 생소한 맥추감사절 헌금도 있으면서 정작 성령강림절 감사헌금 봉투는 없습니다. 그만큼 한국 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중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으면서도 가장 왜곡된 대접을 받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사도신경을 외울 때마다 성령을 믿사오며 고백하지만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특이한 점들이 많은데 그 중의 중요한 부분이 성령에 관한 내용입니다. 다른 종교는 교주와 교주의 교훈, 교훈을 해설하고 강론해주는 지도자들이 있으면 됩니다. 그분들이 잘 설법하고 강론해주면 교리에 따라 착하게 선하게 살면 극락에든 어디에든 간다고 가르치고 그렇게 믿으면 됩니다.

기독교는 다릅니다. 기독교는 성령님이 계시지 않으면 네비게이션이 없이 사막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일과 같습니다. 성령님이 없으면 불가능한 것을 세 가지로 정리합니다.

성령이 없으면

-성경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기초는 성경입니다. 성령은 성경의 저자입니다. 성경은 성령에 감동된 사람들에 의해 쓰인 것입니다(벧후 1:21). 성령님이 제1저자, 원저자입니다. 여기에 인간 저자 아무개들이 있습니다. 성경저자들이 성령님의 감동이 있었기에 집필한 것입니다. 성령의 존재를 믿지 않으면 성경도 하나님의 책으로 믿지 않습니다. 

 

천주교 신자들이 처음에는 성경이 없이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물과 마리아상을 믿고 서양의 하늘님을 믿은 것입니다. 서양의 하늘님은 조선의 하늘님과는 달리 평등과 사랑의 하늘님입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신봉했지만 그건 성경의 하나님도 아니고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도 아닙니다. 성령님께서 기록한 성경이 없는 성물 중심의 기독교는 천주학이라는 샤머니즘 서양종교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성령이 감동하게 해야 성경교리를 믿을 수 있습니다. 성경 66권에는 하나님의 속성과 말씀과 예수님의 속성과 생애, 교훈 등 구원에 관한 모든 것이 완벽합니다. 그러나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으로 구원교리가 완벽해도 성령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의 구원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경책의 정보와 가르침으로 인격향상이나 생활은 도움 받지만 구원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성령이 믿게 해주셔야 믿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역사하지 않으면 역동적인 믿음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 하에 성경을 읽고 설교를 듣지 않으면 일시적인 인격향상에나 기쁨과 감동은 체험해도 역동적인 신앙생활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마치 달구지나 손수레를 끌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님은 자동차의 엔진입니다. 엔진이 있어야 달려가는 것처럼 성령님이 원동력이 되어야 달려가도 걸어가도 곤비치 않는 믿음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안 그러면 억지입니다. 이것처럼 힘든게 없습니다.

 

알바토스는 날개가 가장 큰 새로 가장 멀리 날 수 있습니다. 체력이 강해서 아니라 바람을 탈 줄 알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을 내려놓고 날개만 펼친 다음에 바람의 힘으로 날아서 멀리 갑니다. 알바토스의 진짜 능력은 큰 몸짓 큰 날개가 아니라 몸을 바람에 맡길 줄 아는 지혜입니다. 독수리도 날갯짓이 아니라 기류(氣流)로 납니다. 기류의 힘을 활용 못하는 무엇이 고장 났으면 빨리 애프터서비스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힘차게 날 수 있습니다! 날개만 크다고 멀리 나는 것이 아닙니다. 바람을 더 많이 받아야 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도 그렇습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삼위일체 존재가 믿어지고 구원을 깨닫는 믿음의 지식이지만 성령 충만은 그 지식을 에너지화()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은사는 하나님께서 성령 안에서 주시는 다양한 은사들입니다. 은사도 성령 충만에서 비롯됩니다.

 

그러기에 성령은 받기만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공급 받으면서 충만하게 채워놓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풍선에 유명한 화가가 멋진 그림을 그려주었습니다. 입으로 푹푹 불어 바람이 들어가 빵빵해지면 그림이 아름답게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모두 풍선의 진가와 그림의 가치를 알게 됩니다. 오늘은 풍선이 빵빵~해도 아침이 되면 풍선이 축! 쳐져 있습니다. 걸작품 그림도 쭈굴 쭈굴 졸작품이 되어 버립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다시 입으로 불면서 바람을 집어넣어야 합니다. 이런 일을 계속하면서 제 때에 바람을 공급해주어야 멋진 그림을 계속 감상할 수 있고 남들에게 보여주며 감탄을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걸 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하지 않고, 게을러서 하지 않고, 나의 소욕이 너무 강해서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감동을 받아도 예배당을 나가면 잊어버립니다. 부흥회에 은혜를 받고 사람이 달라졌나, 했는데 그때뿐입니다. 자기 성품의 한계에 갇혀 꼼짝하지 않습니다. 성화의 과정들이 보여야 할 텐데 성화가 아니라 성격들만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생활은 어제나 그제나 10년 전이나 오늘이나 항상 도루묵입니다.

 

임진왜란 피난길에 오른 선조가 맛있게 먹은 생선이름을 물으니 묵입니다!’ 맛에 비해 고기 이름이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한 왕은 의 이름을 은어(銀魚)’로 고치도록 했습니다. 왜란이 끝나고 생선 맛이 생각나서 다시 먹어보니 전에 먹던 맛이 아니었습니다. 그 맛에 실망한 선조가 도로 묵이라 불러라”, 이리하여 잠시나마 은어였던 고기는 다시 묵, ‘도로묵이 됩니다.

한국교회가 도루묵 신앙생활을 반복하는 것은 성령님과의 관계가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의 다스림 가운데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부려먹는(?) 왜곡된 신앙생활을 하고 있거나 성령을 계속 공급받으면서 성령 충만을 유지하는데 실패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안에는 성령의 영이 있습니다. 충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예수님도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입어 곧장 광야로 들어가시고 사십 일을 성령에게 이끌리시며(4:1) 금식기도를 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했기에 40일 금식기도도 잘 감당하셨고 기도 후에 사탄이 내미는 세 가지 유혹 카드를 의연하게 물리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 충만과 시작된 초대교회

본문도 보세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12제자들을 비롯한 무리들이 한 장소에 모였습니다.

1, 다같이 다 같이 모였습니다. 한 장소에 다 같이 모였습니다.(모였고)

2, 다같이 급하고 강한 바람소리를 들었습니다.(들었고)

3, 다같이 불이 혀처럼 갈라져 내려오는 것을 보았습니다.(보았고)

3, 불과 같은 것이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했습니다.(임했고) 그러자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받았고) 받았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 모친 마리아를 비롯한 몇몇 여인들만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 충만은 몇 사람들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여기 장면은 교회가 설립되던 예배입니다. 교회다움과 신자다움을 보여줍니다. 무엇이 교회이고 누가 신자인가, 그걸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움이고 성령으로 충만해야 신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하지 않아도 신자는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거룩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성령 충만은 선택과목이 아니라 필수과목입니다. 성령 충만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는 열심이 부족해서 그러기도 하지만 성령 충만하다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이상한 행동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한국 교회에 그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미국에서 성령 충만하기로 자타가 인정하는 무디에게 누가 물었습니다.

목사님은 성령의 충만을 입으셨지요?”

그렇습니다. 성령충만을 입었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충만하시겠군요.”

아닙니다, 자꾸 새어나갑니다!”

 

자동차가 기름을 계속 공급받아야 하듯 성령 충만도 한번으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계속 공급받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의 온도를 유지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니까 바울은 에베소교회 신자들에게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 명합니다. 헬라어 원문 뜻은 수동태로써 성령 충만한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계속은 반복해서 우리 기질이 성격들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겠어요! 성령 충만하기로 자타(自他)가 인정하는 무디도, 자꾸 성령이 샌다고 성령 충만을 공급받는다 했습니다. 남 탓하지 말고 성령이 새고 있나 보세요! 그래야 성령을 보충하게 됩니다.

중형자동차는 소형보다 더 많이 주유(注油)해야 합니다. 중형자동차는 소형보다 더 많이 주유(注油)해야 합니다. 비행기는 날아야 합니다. 비행기가 바퀴로 구르고 있으면 꼴이 모양이 아닙니다. 나르는 비행기는 주유를 더 많이 해야 합니다. 오래 믿을수록, 교회의 직분이 중요할수록 더 자주 더 많이 성령 충만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교회의 중직은 사이즈가 크기에 그만큼 성령의 분량이 커야하고 큰 것만큼 새는 기회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더 많이 사모하고 찬양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유지하려면

성령 충만이란 무엇일까요? 또 어떻게 성령 충만을 받을까요? 어떻게 지속할까요?

 

-성령 충만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은 성령에게 충만된 상태! 성령에게 사로잡혀 있는 상태입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강력하게 받는 삶이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 충만은 사도행전식의 성령 충만과 요한복음식의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성령 충만은 성령을 통해 뜨겁게 담대하게 복음을 전하며 살라! 요한복음의 성령 충만은 성령을 통해 신실하게 진실하게 거룩한 영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두 형식의 성령충만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내 성격을 알아야 합니다. 내 성격이 너무 강해도 성령 충만이 힘들고, 성격이 너무 약해도 성령 충만이 힘듭니다. 강한 사람은 온유해지고 약한 사람은 강해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이 나를 다루기가 쉽습니다. 성령은 편한 사람을 사용합니다.

 

-건강한 교회생활을 할 때 성령 충만은 지속됩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은 바른 교리와 교회생활(주일성수, 십일조, 사역), 바른 생활(인간관계, 도덕, 시민의 임무)을 할 때 성령은 계속 충만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닥에 깔려있지 않으면 성령 충만은 너무 쉽게 식어지고 무너지고 육신의 지배를 받아 육신의 사람처럼 살게 만듭니다.

 

-성령 충만은 겸손으로 사모해야 합니다. "성령의 채움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비움이 선행되어야 한다"(토저). 겸손은 자기를 남보다 덜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한 순간도 살 수 없음을 고백하면서 주님을 구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나를 지배하시고 통치해 주시기를 갈망해야 합니다. 자신을 믿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무슨 일에나 간절히 사모하는 영으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 충만을 공급받는 길이며 성령배터리를 충전하는 것입니다.

결론

정신분석학의 원조(元祖) 프로이드는 인간의 마음속에 세 가지 성향이 공존한다고 말합니다. 청교도적인 신앙을 가진 완고한 성직자 모습, 꾀가 많고 사특한 사기꾼의 모습, 야생동물처럼 제멋대로인 짐승의 모습이 같이 산다는 것입니다. 세 가지 다른 유형의 성향들은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싸우기 때문에 마음이 내 마음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게 성령으로 충만했다가 성령이 빠졌다가 반복합니다. 세 가지 다 쫓아내야 합니다. 성령 충만을 구해야 합니다.

 

365일 묵상집 주님은 나의 최고봉을 쓴 오스왈드 챔버스는 성령에 대해 말합니다.

성령은 개인의 인생살이를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하나님을 향한 탄탄대로를 구축한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내가 주인이던 인생살이 허물어 버리고 하나님을 향한 탄탄대로를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나는 점점 작아지고 주님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내 생각은 점점 작아지고 주님의 생각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내 고집은 점점 작아지고 주님의 고집은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사도행전의 성령으로 더 뜨겁고 외부적으로 강력해지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교회가 요한복음의 성령으로 더 깊어지고 내부적으로 성결해지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교회는 성령이 주도하고 성령님이 이끌어 가는 성령의 교회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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