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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청년시절 갈렙의 위기, 상황(민수기 14:21~24)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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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시절 갈렙의 위기, 상황

민수기 14:21~24

 

서론

갈렙에 관한 책을 쓰면서 원래도 좋아했지만 그의 진면목을 알게되니 더 좋아졌습니다. 갈렙의 생애를 대표하는 단어가 14:24,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온전은 일편단심, 한 마음, 한 방향입니다. 온전은 위기를 전제로 합니다. 평안할 때는 누구든 온전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기에서 온전을 지킨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갈렙은 찾아온 위기에서 하나님을 대하는 일편단심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갈렙의 100년 안팎의 생애는 위기의 연속입니다. 청년 때에는 정탐꾼으로 선발되어 상황의 위기, 중장년시절에는 후계자 탈락이라는 위기, 노년기에는 산지를 정복해야 하는 고난도의 위기를 만났습니다. 이런 위기에서도 갈렙은 변함없이 온전했습니다. 앞으로 몇 차례 갈렙의 위기에 대해 전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아는 이야기들을 정리해 보는 것입니다.

 

갈렙이 당한 첫 번째 위기는 나이 40, 청년기에 직면했던 상황의 위기입니다. 그는 가나안 정탐꾼 12명 중의 1인으로 선택되었습니다. 정탐꾼 선택은 엄청난 영광이자 기회입니다. 그는 정통파 히브리인도, 히브리인 중에서도 성골인 유다지파 혈통이 아닙니다. 그의 조상은 에서-에돔으로 이어지는 그나스 혹은 그니스부족입니다. 선대 중의 한 분이 히브리인으로 개종하면서 유다 지파의 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를 대표하는 일원이 되니 영광입니다.

 

12명의 정탐꾼들은 40일을 가나안을 샅샅이 정탐합니다. 로빈 던버는 프렌즈라는 책에서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크리스천 바이스와 케네스 라슨의 말을 인용하는데 12명 전후로 형성된 집단을 연민 집단이라 불렀습니다. 긴밀한 심리적 상호작용이 요구되는 집단입니다. 12이라는 숫자는 내가 죽었을 때 관을 들어주고 빈소를 지켜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똘똘 뭉쳐 40일 동안 생사를 함께 했던 연민집단이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 보고대회를 하면서 10명의 다수의견과 2명의 소수의견으로 대립하면서 논쟁을 벌였습니다.

 

12명 정탐의 보고는 자연 환경 영역에서는 모두 긍정평가지만 원주민 영역에 대한 평가와 이로 인한 정세 판단은 달랐던 것입니다. 열 명은 땅을 악평했고 둘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땅이라, 상반된 주장을 했습니다. 같은 환경, 같은 원주민, 같은 상황을 두고 왜 이런 상반된 보고가 나왔을까요. 두 편은 뭐가 달랐을까요?

누가 소유주냐

우선, 믿음에서 달랐습니다. 열 명은 땅을 보기 전에 하나님을 우선적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가나안은 전쟁으로 취할 땅이 아니라 소유주가 누구인가, 그걸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너희는 내가 주어 살게 할 땅에 들어가서”(15:2).

하나님께서 주신 땅입니다. 이미 등기이전 해 놓았습니다. 내 땅이라 접수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10명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에 의존하기보다는 전투력으로 평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당연히 원주민들을 싸워 이길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악평하고 낙담해 버렸던 것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상황을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약속을 더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토스(toss)하시고 이스라엘은 리시브(receive)하고. 토스는 공을 던져주는 것이고 리시브는 던져준 공을 내가 받아서 넘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전쟁이라는 방식으로 가나안 땅을 받지 않았습니다. 약속에 근거해 그냥, 그리고 이미 받은 것입니다. 그것만 믿고 진격하면 하나님께서 대신 싸우시고 원주민들을 내쫓으실 것입니다. 여리고성에서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10명과 백성들은 믿지 않았기에 기회의 순간을 가나안 입성 불가라는 위기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눈이냐

열 명은 거인들을 상대로 자신들을 비교했습니다. 그래서

33,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집단적으로 메뚜기 콤플렉스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스스로 초라해졌을까요. 상황에만 주목해 눈앞의 적들만 보고 있지 이 땅이 어떤 땅이며 누구에게 주신 땅인가? 그것을 놓쳤습니다. 가나안 땅은 계약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조상 아브라함과 맺은 메시아의 약속도 바로 이 땅에 있는 계약을 통해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 ‘너 거인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을 제외해 버리니까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다르게, 그러나 정확하게 상황을 판독합니다. 두 사람도 원주민이 거인이라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내가 누구냐? 거기에 대한 관점이 다릅니다. 두 명은 자신들은 잡아먹힐 식용 메뚜기가 아니라 오히려 상대가 이라 규정합니다. 거인이 크면 밥덩이도 크니 오히려 더 잘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너 그들 사이에 있는 것입니다.

정탐꾼들 간의 차이는 관점과 해석의 차이입니다. 믿음은 눈의 문제, 안목의 문제입니다. 어떤 관점으로 상황을 보고 상대를 보느냐는 것입니다. 두 명에게는 팩트보다 더 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이 팩트 자체입니다. 내 눈으로 보면 원주민들은 거인이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이스라엘에게 주신 밥이라는 사실이 팩트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거인이냐 소인이야 다수냐 소수냐 그걸 재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은 어떠신가?’ 그것만을 봅니다. 거인들보다 무한하신 하나님에게만 시선을 고정시킵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탈출하기 위해 나온 것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나온 것입니다. 가나안은 싸워서 얻을 쟁취의 땅이 아닙니다. 주시면 받을 약속의 땅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눈으로 보니 산악도, 평지도, 그 안에 살고 있는 거인들조차 그들의 밥인 것입니다. 그래서 밥을 차지하러 가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았기에 거인들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에 불과하다고 자학함으로 가나안의 방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가나안 입성 불가라는 위기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누가 싸우는가

갈렙과 여호수아는 싸움의 전권을 하나님의 전쟁에 맡깁니다. 싸움의 구도를 나와 너가 아니라 거인과 하나님의 싸움으로 만들었습니다. ‘상황 와의 싸움이 아니라 상황 하나님과의 대결구도를 만들었고 자신들은 비켜섭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상대했을 때의 일입니다. 이스라엘도 사울과 병사들에게도 다윗에게도 골리앗은 위기상황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갑니다. 골리앗은 그의 신들의 이름으로 다윗을 저주하고 조롱합니다(삼상 17:43). 골리앗이 이름으로 위협하자 다윗도 이름으로 맞섭니다. 골리앗은 신들의 이름,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 17:45)

 

여호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너는 너희 신들의 이름으로 나오느냐, 나도 내 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이름 대 이름, 신들 대 신들의 이름으로 나선 것입니다. 너하고 나하고 싸우지 말고 신들끼리 싸우게 하자는 것입니다. 이건 신학의 문제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그 전쟁을 인간의 대결구도로만 보았습니다. 무기의 힘, 전략의 힘, 강한 용사 여러 요인들을 보니 골리앗의 상대가 되지 못해 막사에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 할 때도 왕의 갑옷을 입혀주고 왕의 무기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삼상 17:38).

 

다윗은 골리앗과의 전쟁을 용사와 용사, 무기와 무기의 전투로만 단순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골리앗과의 싸움을 군사적 관계가 아니라 신학적 문제로 보았습니다. 사람대사람의 싸움이 아니라 참 신과 거짓 신의 싸움으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왕이 갑옷을 내주지만 거절합니다. 다윗은 두 남자의 싸움이 아니라 두 신()의 싸움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습니다. 다윗은 처음부터 신학적인 것으로 문제를 본 것입니다.

두 명의 정탐꾼도 전투 구도 작전으로 성공합니다. 갈렙은 거인들과 하나님과의 싸움! 신들과 신의 싸움으로 전투 구도를 만들었기에 무조건 승리하는 전투가 될 것이며 그들은 밥이라는 사실 앞에서 백성들에게 가나안으로 가자!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하나님의 눈이라 내 눈으로 보았기에 거인들 앞에 자신들은 메뚜기라 자처함으로 영웅이 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을 가나안 입성 불가라는 위기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누구의 상상력이냐

정탐꾼들은 상상력에서도 운명이 갈립니다. 하나님께서 그 땅을 내주셨으니 이미 그들의 것입니다. 원주민들을 이기지 않고 어찌 땅을 얻겠습니까? 그러나 열 명은 눈앞의 팩트 앞에 상상력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을 문제에 넣지 않으니 눈에 보이는 현장밖에 없었습니다. 아낙 자손 거인들만을 생각하니 당연히 지는 것입니다. 실패하는 상상력, 패배하는 상상력 왜곡된 상상력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지는 전쟁이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합니다.

 

상상력은 실제로 경험하지 않은 현상이나 사물에 대하여 마음속으로 그려 보는 힘입니다. 두 명은 말씀을 기초로 이기는 전쟁을 그려보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 땅에서 밥덩이를 주시는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이기는 상상력, 승리의 상상력, 성공의 상상력입니다. 그리고 승리했습니다. 다윗도 골리앗 과의 싸움 이전에 이기는 상상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상상력에서 이미 이긴 것입니다. 그러나 10명의 정탐꾼과 백성들은 하나님 없이 싸우려 했기에 이미 지는 상상력이 들어왔고 가문의 영광이 될 수 있는 기회의 순간을 가나안 입성 불가라는 위기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독일 태생의 이론물리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이 상상력이라고 했습니다. 어떤 상상력을 갖느냐에 따라 행동이 나오고 행동에 따라 성패(成敗)가 결정 됩니다. 두려움은 이기는 상상력으로 물리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 16:33)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대장이기에 우리도 이기는 상상력으로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이것이 가나안-즉 세상 앞에 선 우리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결론

제 인생에도 위기가 세 차례나 있었습니다. 두 번은 위기를 넘겼고 한 번은 넘기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견디게는 해주셨습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노예 출신으로 스토아학파의 대표적 철학자로 살았던 에픽테토스는 이리 말합니다.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

이를,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것은 문제 자체가 아니라 그 문제에 대한 그들의 판단이다라고 바꿔본다면 불신앙의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더 절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내 편의 생각이 그래서’ ‘모두들 그러니까 하는 내 편 편향이나 다수결의에 맡기지 말고 상황을 하나님에게 맡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청년기에 정탐꾼으로 선발된 영광은 뜻하지 않게 누군가에게는 오히려 위기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찬스가 되었습니다. 위기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위기는 사람을 드러내 줍니다. 상황의 위기는 12명 후계자급의 리더 중에 10명을 자동으로 탈락시켰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가나안 입성을 보장받으면서 지도자의 반열에 세워집니다. 특히 히브리파 정통이 아니었던 갈렙에게는 명실상부 차세대의 리더가 됩니다.

로마행 배를 타고 가다 유라굴로 광풍을 만난 바울 일행 276명이 있었지만(27:37) 광풍은 바울의 존재를 드러나게 했습니다. 이것이 위기가 불러오는 기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위기를 기회로 만들어 가는 믿음의 사람들로 더욱 성장하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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