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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성전을 감사로 채우라(마가복음 11:15-1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3.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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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을 감사로 채우라

마가복음 11장 15-18절

서론

미국 루주벨트 대통령의 부인이던 엘레나는 10세 때에 고아가 되었습니다. 얼굴조차 예쁘지 못해 어려서부터 "못생긴 오리새끼"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았던 엘레나는 얼마나 가난하고 힘든 생활을 했던지 돈을 가리켜 "땀과 눈물로 조각이 된 종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녀는 스무 살에 결혼하여 11년 동안 6남매를 두었는데 한 아이가 자기 눈앞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때 엘레나는 위로하는 친구들에게 "내가 사랑할 수 있는 아이들이 아직도 다섯 명이나 있어"하며 오히려 친구들을 위로했다고 합니다.


남편 루주벨트는 성년이 되어 다리가 마르기 시작하여 쇠붙이로 받침대를 만들어 다리에 붙이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불구자가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이 엘레나에게 농담 삼아 "아직도 당신은 나를 사랑하오?" 묻자 엘레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게 아닙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엘레나 루주벨트는 세계에서 존경받는 여성의 상위권에 듭니다. 세계가 그녀를 존경하는 까닭은 어떠한 환경에서도 명랑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 그녀의 따뜻한 마음일 것입니다.
흔히 인간성이 좋다 나쁘다 할 때 그 인간성의 개념을 어디에 둘까요? "감사"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피아노와 오르간은 소리가 좋아야 음악성이 좋다고 하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감사가 배어있는가에 따라서 인간성을 운운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추수감사절이라고 하면 농산물을 중심한 감사로 알기에 감사절의 의미가 날로 퇴색되어 가고 있습니다. 소출은 농산물에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얻는 소출은 매일매일 있습니다. 그러기에 감사절은 365일 계속되어야 합니다.

1. 성전은 감사하는 곳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성전은 단지 제사 드리고 죄 사함을 받는 곳만이 아닙니다. 허구한 날 성전에 와서 죄만 고백하고 눈물이나 흐르고 있다면 기독교는 죄를 들이밀고 위협하고 처단하는 재판장소가 됩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띄고 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있는 곳입니다. 감사의 교제입니다. 우리를 구속해 주시고 용기주시고 억울함을 신원 해주시는 그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곳입니다.


솔로몬은 성전건축을 이루고 회중 들 앞에 제일성으로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왕상 8:15).


단 앞에서는 하늘을 향해 손을 펴며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여 상천하지에 주와 같은 신이 없나이다 주께서는 온 마음으로 주의 앞에서 행하는 자들에게 언약을 지키시고 은혜를 베푸시나이다"(23절)


끝날 때쯤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저가 무릇 허하신 대로 그 백성 이스라엘에게 태평을 주셨으니 그 종 모세를 빙자하여 무릇 허하신 그 선한 말씀이 하나도 이루지 않음이 없도다"(56절) 라고 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지을 때 예루살렘 채석장에서 돌을 캐오지 않았습니다. 그는 멀리 레바논에서 돌을 캐고 깎고 잘 치속한 다음에 예루살렘으로 운반했습니다(왕상 5:17) 성전 건축하는 동안에는 전속에서는 방망이나 도끼나 모든 철 연장 소리가 들리지 아니하도록 주의했습니다(왕상 6:7).
이 사실은 성전이 어떤 곳이 되어야 하는 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성전은 감사의 소리로 채워야 하는 곳입니다. 감사의 영향을 받고 가야할 곳입니다. 성전에서는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잠잠하고 조용해야 할 곳입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감사의 소리, 감사의 마음들이 사라져 버린다면, 서로를 정죄 하기 바쁘고 너무 이기적이 되어버린다면 그곳은 하나님이 돌아보시지 않는 인간 종교집합소에 불과할 뿐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신앙적인 요란스러움을 갖고 있다할지라도 감사가 없으면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말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천하는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합 3:20)


그는 왜? 왜?를 연발하던 선지자입니다. 조국이 당하고 있는 비참한 현실, 그래서 하나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원망했지만 성전에서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심을 깨달았고 하나님 앞에 잠잠할 지니라고 훈계하고 있는 것입니다.
권투 경기 용어에 "잽"이라는 게 있습니다. "잽"은 갑자기 툭 치는 것으로 점수를 따고 방어도 됩니다. 이것은 뜻하지 않을 때 갑자기 날아오는 주먹입니다. 이런 잽을 자주 맞다보면 기진맥진해지고 패배하고 맙니다.

인생에도 이런 잽이 있습니다. 갑자기 툭툭 잽이 날아옵니다. 하나님의 잽도 날아오고 사람들의 잽도 날아옵니다. 그야말로 동네북처럼 이 사람 저 사람 잽이 날아올 때가 있습니다. 아픕니다. 때로는 화가 나고 원망스럽습니다. 그러나 이런 잽을 통해 인생은 하나님의 위로를 알게되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미국에 잽 정도가 아니라 강펀치를 맞은 여인이 있었습니다. 조이스 애킨스라는 여인은 자동차를 타고 가다 남편은 즉사하고 뒷자리에 타고 있었던 2,3,4세 난 아이들은 기적적으로 무사했습니다. 애킨스 부인 자신은 전신마비가 되어 목 밑으로는 꼼짝할 수 없는 중증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나이는 23세였습니다.

애킨스 부인은 병원에서 절망하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합니다. 그녀는 그림의 소질이 있음을 알았고 입으로 수채화를 그렸습니다. 친구들의 초상화도 그립니다. 1년 동안 그린 그림을 모았다가 11월에 팔아 환자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 주는 것을 보람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20년 동안을 신체장애로 평생을 입원해 있어야 하는 병원에 수용되어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레코드>라는 잡지에 이런 간증을 실었습니다.


"나는 두 가지에 감사합니다. 몸이 이렇게 됨으로 하나님을 진짜로 믿게된 것을 감사하며 몰랐던 미술의 재질을 발견하게 된 것을 감사합니다. 나는 소위 운이 없는 여자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축복을 넘치게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불행을 통해 우리를 축복해 주십니다. 지금 나는 내 눈이 비로소 열렸음을 압니다. 내 눈이 열렸다는 증거는 인간과 이 세계를 움직이는 보스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볼 수 있게된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정말 사랑합니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인간을 정말 사랑합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모든 게 감사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감사의 소리가 흘러 넘쳐야 합니다. 감사의 영향을 받고, 감사의 온도를 높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교회가 건강한 교회입니다. 

2. 성전은 강도의 굴혈이 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에 기도하시러, 구속의 사역을 마무리지을 수 있도록 힘을 얻기 위해 가셨습니다.


예수님에게 성전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을 만나 힘을 얻고 서로 기쁨을 나누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가볍고... 성전은 그런 곳이어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힘 빠지고 낙심했던 자들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고, 용서해 줄 수 없는 사람들이 용서되는 곳, 허물들이 덮어지는 곳, 죄를 가슴 아파하는 곳, 쉼을 얻는 곳... 성전은 그런 곳이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성전은 불행스럽게도 예수님께서 생각했던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곳은 장사 터가 되어있었고 인간들의 소리로 요란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이어야 하는 데 사람들의 소리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장사꾼들끼리 서로 싸우고, 물건값을 흥정하다보면 언성이 높아지고 싸게 팔아서 화가 나고 비싸게 사서 불평하고.... 성전은 이미 감사와 경건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성전을 "강도의 굴혈", 강도의 소굴로 단정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강도를 목격한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충격이었습니다. 충격은 충격요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사람들을 성전 밖으로 내쫓았습니다.    

      
교회가 점점 소란스런 곳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말들이 많아졌습니다. 쓸만한 말들이라면 좀 좋겠습니까? 교회를 칭찬하고 남을 칭찬하는 일에는 인색한 사람들이 흉보고 원망하는 일에는 앞장섭니다.


우리 주님이 보셨던 광경을 우리가 또 보여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는 점점 정죄 하는 곳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의 맛은 "덮어줌"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덮음 들이 있어야 하는 데 우리의 가슴속에는 남의 허물을 묻어줄 저장소들이 없습니다. 이것도 교회를 소란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는 똑바로 살지 못해도 교회에 와서는 바르게 사는 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감사하는 법, 서로 존경하는 법,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법들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오히려 남을 깎아 내리는 법을 배웁니다. 좋은 것은 배우지 못하고 안 좋은 것만을 배웁니다.

 

우리 주님이 오늘 이곳에 오셨다고 합시다. 그분은 먼저 강단에 있는 목사를 볼 것입니다. 내쫓김을 당할 것인가? 성가대를 볼 것입니다. 누가 내쫓김을 당할 것인가?
여러분을 볼 것입니다. 누가 쫓겨날 것인가? 너 때문에 소란하구나. 네가 끊임없이 불평하며 남들에게 전염시키는구나. 나가라! 우리는 성전 안에서 좀 조심할 줄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이 교회를 어떤 교회로 만들고 있는가? 기도의 집으로? 강도의 소굴로? 이 추수감사절에 우리들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3. 감사의 성전을 만듭시다.

성전은 감사가 있어야 진정한 성전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고마우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우리가 힘들었을 때도 최고의 위로 자는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참아낼 수 있었을까요? 남을 용납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리고 예배당의 고마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좋은 예배당에서 믿음생활하며 인생의 어려운 환난 가운데서 교회를 통해 새 힘을 얻습니다.
피차간에 고마움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교인들의 사랑과 대접을 받습니다. 오래 살다보면 궂은 일 좋은 일 있지만 그래도 어려움 당할 때 늘 내 곁에 있어준 사람은, 있어줄 사람은 바로 이 사람들입니다. 이런 일을 생각하면 모두가 은혜요 고마움입니다.


어떤 신사가 은퇴하여 농촌으로 들어가 젖소를 키웠습니다. 그는 젖을 짜 마셨는데 젖이 말랐습니다.
그는 젖소를 판 사람에게 따졌습니다.
"왜 이런 젖소를 팔았느냐? 사기가 아니냐?"
"젖소가 마를 리가 없다. 어떻게 했느냐?"
"나는 필요한 것만큼 만 젖을 짰다. 한 병이 필요하면 한 병만 짜 마셨고 별로 우유생각이 나지 않으면 짜지 않았다"

 

그러자 젖소 주인은 웃으며 말했습니다.
"젖소는 젖이 나올 때까지 짜 주어야 하오. 그래야 젖이 계속 생산되지요"

 

감사가 그렇습니다.  감사는 필요한 데로만 하는 게 아닙니다.
항상 감사, 모든 일에 감사, 범사에 감사... 감사가 계속 흘러나와야 우리가 감사의 체질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경우에서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감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간 시간마다 은혜를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교회생활이 즐거울 것입니다. 

 

열받으면서 신앙생활, 교회 생활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열 받을 일이 아닙니다. 열을 내려야 합니다. 열이 계속 올라가면 미칩니다.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사람 미워하고 흉보는데 미쳐버리면 평생 사울처럼 살아갈 것입니다. 그 대신 감사의 온도를 올려야 합니다.  

결론

인도를 여행하던 두 친구 에릭과 존슨은 어두운 밤길을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에릭이 발을 헛디뎌 물살이 거센 강물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 모습을 본 존슨은 아무 주저함 없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구해주었습니다. 생명을 구원받은 에릭은 커다란 바위에 글을 새겼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친구 존슨이 에릭의 생명을 구했다"


여행을 잘하고 돌아오다 그 바윗돌 앞에서 사소한 말다툼 끝에 싸움이 벌어졌고 존슨이 에릭을 쳤습니다. 에릭은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바위 옆에 펼쳐진 모래사장으로 걸어가 이렇게 썼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존슨이 사소한 말다툼으로 에릭의 마음에 상처를 입혔다"


곁에서 지켜보던 안내원이 물었습니다.
"왜 친구의 용감한 행동은 바위에 새겨놓으면서 나쁜 행동은 모래사장에 적는 겁니까?"    
"내 친구 존슨의 우정어린 용감한 행동은 가슴 깊숙이 영원히 간직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에 입힌 아픈 상처는 저 모래 위로 바람이 불어와 글자가 지워지기 전에 나의 기억에서 멀리 날아가 버리기를 바랄 뿐이오"

 

참 멋있는 친구입니다. 우리는 그 반대가 아닌가요?
하나님의 교회는 감사가 있는 곳입니다. 감사했던 일은 바윗돌에 새기고 슬펐던 일은 모래 위에 새깁시다.
나에게 잘 해주었던 일은 바윗돌에 새기고 섭섭했던 일은 바윗돌에 새깁시다.
우리는 감사가 넘치는 늘빛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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