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
요한복음 13장 34, 35절
서론
우리교회가 설립 40주년을 맞습니다. 40년 전 설립예배도 9월 29일, 40주년 감사예배도 9월 29일! 억지로 맞추려고 해도 거의 불가능한 숫자입니다. 거기다 제 40년 주일 오전설교로는 마지막설교이니… 우리교회는 뭔가 좀 특별한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설립기념예배 때마다 자주 해왔던 이야기입니다. 늦게 신학을 한 전도사님이 충청도 중소도시 언덕에 양철지붕 예배당을 짓고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40대 늦깎이 전도사님은 야간 학습을 끝내고 막차로 돌아오는 고등학생 아들을 위해 예배당 처마 밑에 등불을 걸었습니다. 여러 사람이 아닌, 등불이 필요한 한 아이를 위해 3년을 불을 밝혔던 행위는 그 분의 목회 철학을 보여줍니다. 내가 걸어놓은 등불을 보고 잃었던 길을 찾고, 저기에 가면 반기는 사람들이 있을거라, 기대하며 두려움을 떨쳐버렸던 고등학생 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 등불을 거는 심정으로 밤마다 처마 밑에 등불을 걸었던 아버지…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제 목회 역시 “한 사람을 위하여”,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정성과 사랑으로 목회해 보자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40주년을 맞았습니다. 그렇게 목회가 되었을까요?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교인들이 많아지다 보니 소홀했던 점들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양해하면서 들으세요.) 이제 마흔 살과 서른아홉을 맞는 우리 두 아들! 이만하면 잘 컸다고… 잘 키웠다고 생각합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러면 마흔 살을 맞는 우리 늘빛교회는 잘 컸을까요? 좋은 교회로 잘 컸으리라 자부합니다. 왜냐? 늘빛교회는 우리 모두가 키워낸 ‘우리의’ 교회이기에 나 혼자 키운 우리 두 아들보다 훨씬 더 잘 컸으리라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목회관1. 한 사람을 위해 등불을 켜는 제 목회는 친정집 목회, 친정어머니 목회입니다.
친정어머니는 구세대 분이라 실력도 없고 논리적인 말주변도 없고… 도와줄 재력도 없는 가난하고 자신의 삶도 버거운 여인입니다. 그렇지만 친정어머니는 들어주는 분입니다. 시댁 살이 딸의 애환을 한도 끝도 없이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친정어머니는 울어주시는 분입니다. 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랬느냐고… 어떻게 견디었느냐고… 나는 잘 살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다고… 함께 울어주고 대신 울어주는 분입니다. 그러면서도 친정어머니는 시댁을 욕하지 않고 2,3일 푹 재우고… 딸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잘 먹이고… 그러다가 시댁으로 돌아가라며 한 보따리를 싸주면서 등 떠미는 분입니다. 딸은 실컷 남편 욕, 시어머니 시누이 흉을 보다 이젠 남편이 보고 싶다고… 시어머니의 밥걱정 이부자리 걱정을 하면서 바리바리 시댁식구들 음식을 싸들고 돌아갑니다. 이것이 친정어머니의 힘입니다. 심리학자도 상담가도 아니지만 들어주고 먹여주고 편하게 재워줌으로 힘을 얻어 험한 시댁으로 돌아가게 하는 힘으로 딸은 견디면서 본인이 시어머니가 되고 친정어머니가 되어 어머니 역할을 대물림하면서 살아갑니다.
제가 생각하는 교회가 바로 이런 친정집 교회였습니다. 교회에 오면 무장해제하고 실수 좀 하면 어때…, 좀 못나면 어때! 그렇게 편안하게 주일을 지내면서 힘을 얻고 다시 험한 시댁과 같은 세상으로 용감하게 나아가는 성도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제 꿈이었습니다.
목회관2. 성도님들의 자존감을 세워주는 관계목회입니다.
저는 혼자 목회를 했습니다. 가정으로는 결손가정이요 교회로는 결손교회입니다. 그러니 혼자사 사모역할까지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안부를 묻고 문자를 보내고... 관심목회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누차 말씀드렸듯이, 저는 청소년, 청년시절에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었습니다. 자신감 결여입니다. 그런데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 1학년 때에 조선일보 신문문예가 당선되었습니다. 1980년, 적어도 그해는 내가 전국에서 1등입니다. 이에 자신감을 얻어 ‘적극적인 사고방식’에 관한 책들을 많이 읽고 개척교회를 시작하면서 자존감이 세워졌습니다. 자존감은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인정하는 나! 입니다. 누가 뭐래도 대단한 인물로 나를 인정했습니다. 이런 높은 자존감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지만 여러분이 주신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목회자보다도 저를 사랑하고 인정하고 신뢰해 주었고 이것이 행복한 자존감으로 저를 성장시켰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쳤기에 낮은 자존감으로 힘들어 하는 분들에게 “당신은 사랑을 받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는 사람입니다!” 라는 긍정 마인드로 여러분을 격려하고 응원하고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세월이었습니다.
목회관3. 성령이 교회생활의 원동력이 되는 성령목회입니다.
저는 골수 장로교신자요, 골수 보수교단의 목회자였기에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강조하는 믿음입니다. 성령님을 조금 소홀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1990년~ 5년을 큰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기도원을 찾았고 20일 금식기도를 통해 성령 충만을 체험했습니다. 그때부터 내 안에는 충만한 성령님이 있어 나를 뜨겁게 했고 그 뜨거움은 은퇴를 앞두고 있는 지금까지 계속 성장 중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성령 충만한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집사님들로 믿음생활을 하도록 애써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여러분이 저를 따라오려고 버거울 수도 있었지만 성령 충만한 목사로 살아온 날들을 귀하게 생각합니다.
제 목회관은 결과에 관계없이 저는 최선을 다했고… 40여년 목회에서 잘못한 것들은 내 탓이오 잘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과 여러분 덕분입니다. 여러분들로 교회가 이만큼 성장했습니다.
오늘은 주일 낮 설교로는 마지막입니다.
원래는, 10월 첫 주일, 다음주일에 조직신학 마지막, 지옥과 천국으로 끝내려 했는데 현수막 문구를 쓰면서 시작도 9월 29일, 마침도 9월 29일이니 여기에 뭐를 더 첨가하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오늘 설교 후에는 주일 낮 강단을 정목사님에게 넘깁니다. 제 설교 사랑해 주셨듯이 정목사님 설교도 사랑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주일 마지막 설교를 “우리가 다시 사랑을 시작하자!”라는 제목으로 잡았습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면서 34절을 부탁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즘은 사랑이 대세입니다. 연속극도 영화도 사랑을 쓰지 않으면 성공이 쉽지 않습니다. 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듣는 사랑이라는 주제-오히려 사랑은 말라가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랑을 말하는 것은 사랑놀이를 하자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았고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러기에 사랑은 교회의 운명이고 존재의 목적입니다. 35절처럼, 우리가 사랑의 사람이 되어야 세상이 우리를 예수님의 제자로 인정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처형당하는 과정에서 제자들은 배신하고 배반하고 흩어질 것입니다. 서로 의심하고 네 탓이니 누구 탓이니 비난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를 미리 아시고 “서로 사랑하라…” 하십니다. 제자들은 나중에야 그 마음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형제들 간에 제자들 간에 다시 사랑을 시작하게 되고 오늘 사랑의 공동체 기독교가 있는 것입니다.
한국말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시’라는 말이 참 좋습니다. 다시… 실패에서도 ‘다시’… 낙방에서도 ‘다시’… 사랑에도 ‘다시’가 있어 헤어졌다 ‘다시’ 만나고 끝났다가 다시 시작합니다.
사랑의 사도라는 별명을 얻은 제자 요한은 말년에 에베소교회를 섬겼습니다. 체포를 당해 독사 굴속에 손을 집어넣고 끊는 물에 던져졌습니다. 몸은 끔찍하게 뭉그러지고 거동도 불편하게 되었습니다. 젊은 사람들이 업고 와 강단에 앉히면 “서로 사랑하시오!” 다른 말을 부탁하면 “서로 사랑하시오!” 같은 말을 반복했다고 합니다. 사랑의 결핌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교회는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놓친 첫사랑을 회복하지 못했고 지금은 유적지로 변한 소아시아 일곱 교회들처럼 영적인 초토화를 이루고 이슬람국가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랑의 유실은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이 교회 안에서도 식고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김겸섭 목사님은 <사랑이 위독하다>를 씁니다. 사람의 생명만 위독한 것이 아니고 회사생명만 위기가 아닙니다. 사랑을 최고 가치를 앞세우는 교회 안에서도 사랑은 위독합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가 사랑을 간호하면서 다시 시작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교회 일도 중요하고 사역도 중요하지만 식어진 가슴으로 일한다면 식어진 열매만 만들어 놓게 됩니다. 식어진 가슴으로 사람을 키운다면 식어진 사람들을 생산해 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식어진 곳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식은 곳에서는 생명이 없습니다. 여성들의 자궁이 식어져 있다면 아이가 생기겠습니까? 아이가 자라겠습니까? 식은 곳에서는 생명의 역사가 없습니다. 그건 복음이 아니라 종교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어떤 일에 열정을 내는 것보다 첫 사랑을 회복하는 일이 급선무라는 사실을 지금의 한국교회가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결론
미국의 경영컨설턴트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을 썼습니다. 미국에서만 10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기업경영 바이블’이라는 책입니다. 이 책에는 한 때는 좋은 회사였지만 도약에 성공하지 못한 11개 회사, 좋은 기업이고 도약에도 성공했지만 상승궤도를 유지하지 못한 6개의 기업을 5년간 연구 조사한 결과물입니다. 책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좋은 기업과 위대한 기업은 다르다, 좋은 기업은 당대에 먹고 사는 데 불편함은 없지만 눈부신 업적을 남길 수 없다, 그러기에 좋은 기업으로 만족하지 말고 위대한 기업으로 나가라!”
짐 콜린스는 <좋은 기업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를 출간한 지 10년도 채 지나지 않아 ‘위대한 기업’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다시 써낸 책이 <위대한 기업은 다 어디로 갔을까>입니다. 위대한 것에 치중하다 좋은 기업을 만들어 내지 못해 몰락했다는 것입니다.
설립 40주년을 맞는 우리 늘빛교회! 우리는 위대한 목사보다 좋은 목사를 사랑하며 위대한 교인들보다 따뜻하고 좋은 교인들을 고마워하는 교회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교회는 위대한 교회에서 더 따듯한 좋은 교회로! 더 따뜻한 좋은 교회에서 더-위대한 교회로 성장할 것입니다.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 영광보다 크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내가 이곳에 평강을 주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학개 2:9)
그 일을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맡기고 등을 돌렸던 것처럼 더 40년의 회색 광야를 마감하고 정태훈 목사님에게 여러분을 맡깁니다! 지난 40여년을 동고동락하신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40년을 제 설교를 들어주셔서 행복했습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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