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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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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중고서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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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지파 설교]
납달리 - 암사슴의 노래
창세기 49장 21절
서론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을 지냈던 김활란 박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입니다. 평생 독신으로 살다갔던 김 박사는 기독교신앙과 여성들을 위하여 평생을 바쳤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려고 하자 모여들었던 가족들, 동료들, 제자들이 눈물을 터트렸습니다. 그러나 김활란 박사는 슬그머니 눈을 뜨더니 말씀하는 것입니다.
"울지들 마라! 내가 고향집으로 가는 데 왜 우느냐? 내가 죽으면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기쁨의 노래를 불러라!"
김활란 박사는 정말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려주고 떠나간 사람입니다.
야곱은 임종 직전에 열 두 아들을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위에서 다섯 아들을 향하여 예언을 했지만 유다를 제외하고는 우울한 예언들이었습니다. 바로 앞서서 예언했던 빌하의 아들 단에 대한 예언은 정말 아버지로서는 차마 꺼내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이제 여섯째에게 예언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여섯째아들 납달리, 납달리를 바라보는 야곱의 얼굴에 미소가 깃듭니다. 그는 비록 여종의 몸에서 태어난 아들이기는 해도 사랑스런 아들이었습니다.
납달리는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내었습니다.
납달리가 세상에 태어난 것은 부모의 사랑에 의해서가 아닙니다. 한 여인의 시기심 때문에 출생했습니다. 라헬은 자신이 아이를 가질 수 없자 언니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그릇된 방법을 택합니다. 빌하의 아들을 통하여 남편의 마음을 되찾아 오겠다는 것입니다.
한 여인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탐욕과 시기심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는 빌하의 몸과 마음을 유린하더니 다시 그녀에게 자식을 낳아달라고 강요합니다. 빌하는 여주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아들을 낳습니다.
아들을 낳았을 때 라헬은 그 아이를 받으며 소리 지릅니다.
"언니와의 경쟁에서 내가 이겼다!"
잘못된 경쟁심, 불필요한 시기심은 결국 여러 사람들을 괴로움 속으로 빠져들게 하지만 라헬은 자기의 목적을 이루었기에 남의 불행은 아랑곳하지 않고 경쟁에서 이겼다며 좋아하고 있는 것입니다.
단의 출생처럼 이기적인 종교심을 봅니다.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남을 희생시켜 놓고도 하나님의 은혜를 들먹이는 추악한 종교심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인간 사회에 경쟁심, 시기심이 꼭 나쁜 것은 아닙니다. 선한 경쟁심과 좋은 일에 시기심을 내는 것은 아주 생산적입니다.
세계적인 육상 선수 `갈색 폭격기' 칼 루이스는 우승을 하고 난 다음,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2등을 한 아무개에게 감사를 드린다. 좋은 경쟁자가 있었기에 나는 신기록을 낼 수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열심히 봉사하는 이들, 찬양하는 이들, 칭찬 듣는 이들을 대할 때 시기심이 납니다. 그 시기심은 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한 시기심이 아닙니다. 나도 저 사람과 같이 찬송을 잘하고 싶다, 칭찬을 듣고 싶다, 신앙으로 행복하게 살고 싶다… 이런 등등의 경쟁심, 질투심은 우리의 신앙을 더욱 성장, 성숙하게 만들어 줍니다.
제가 유년주일학교에 다닐 때 반별 경쟁이 있었습니다. 우리 반이 1등을 하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헌금을 많이 하면 점수가 더 올라가는 데 1등을 하기 위해 밭에 나가서 삼을 캐고 총알을 주웠습니다. 그것을 팔아서 헌금을 했습니다. 그때 믿음이 좋았습니다.
저는 헌금에 매우 자유스러운 사람입니다. 헌금을 할 때 망설이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그렇더라도, 특별헌금 등은 우리 교회에서 가장 많이 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늘 생각합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결국 어릴 때의 경쟁심이 만들어 낸 좋은 신앙심입니다.
우리 교회에도 좋은 경쟁심이 많이 나오기를 바랍니다. 교회를 성장시키고, 사랑스럽게 하고 기도와 찬송이 많이 나오도록 하는 생산적인 경쟁심 말입니다.
그러나 라헬은 선한 경쟁심을 한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국을 위해, 객지생활을 하고 있는 남편 야곱을 위해 아들을 원한 것이 아니라 언니와의 경쟁심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이런 경쟁심은 자신은 물론 여러 사람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줍니다.
예일대학의 심리학교수 피터 살로비 박사는, 미국 범죄의 20%가 질투에 근거한 것이라 말합니다.
<질투의 임상학>(번역이 안 된 것 같음)을 저술한 그레고리 화이트는, 부부 갈등문제를 상담하는 사람들 중의 3분의 1이 질투에 근거한 문제라고 말합니다. 가정이 깨어지는 30%의 이유가 부질없는 질투때문이라는 어처구니없는 보고입니다.
사로비 교수의 보고에 의하면,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 대하여는 질투하지 않습니다. 옷가게를 하는 사람이 농부가 좋은 옷을 입고 다닌다 해서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같은 옷가게의 아무개가 좋은 옷을 입으면 속상합니다. 같은 마을에서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이 잘되면 질투를 합니다.
따라서 목사는 목사를 질투하고, 의사는 의사를 질투합니다. 여성은 여성을 질투합니다. 미모의 여성은 미모의 여성을 질투하고 옷에 신경 쓰는 이들은 옷에 신경 쓰는 이들을 질투합니다.
이것이 직업관계가 아니라 부부나 애인 같은 인간관계에서는 질투의 불꽃이 더 사나워 집니다. 여기서 사건이 생기고 살인이 일어납니다.
교회를 허는 무서운 질병이 바로 교인들 사이에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질투심들입니다. 그릇된 시기심, 경쟁심은 교회의 힘을 약화시키고 그 좋은 믿음들을 무력화시킵니다. 그릇된 시기심은 사단이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교회를 파멸시키려 할 때 질투라는 솜사탕을 던집니다. 여기에 현혹되어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잡초만 무성히 자라나는 신앙의 나무가 될 뿐입니다.
메두사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가장 무서운 괴물입니다. 고르고네스라는 금발의 여인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유혹합니다. 이에 아테네 여신은 저주합니다. 아름다운 금발들이 한 가닥씩 뱀이 되게 합니다. 얼굴도 무섭게 변합니다. 얼마나 무섭던지 누구든지 보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어 돌이 되었습니다.
잠언 14:29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나 시기는 뼈의 썩음이니라"
어른들의 추접한 경쟁심에서 출생한 납달리였기에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가족의 구성원들은 모두 비뚤어진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어른들 사이에 형으로 태어난 단은 환경의 영향을 아주 나쁘게 받았습니다. 그는 독사가 되었고 남을 물고 뜯는 사람이 됩니다. 어른들이 빚어낸 불량품이었습니다.
납달리는 노래하는 자가 됩니다.
어른들의 비뚤어진 자화상이 될 수밖에 없는 납달리, 그 역시 세상을 보는 눈, 아버지와 형제들을 보는 눈이 독사처럼 비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자라나온 환경이 바로 그런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납달리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납달리는,
*자기 자신의 불운한 유년시절,
*여종의 아들이라는 비천한 출신 성분,
*배다른 형제들의 구박,
*친 형인 단의 악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그는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래를 택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노래는 자기의 운명을 극복하고 어른들의 시기와 질투가 빚어내는 추악한 것을 뒤로 하는 좋은 시간이 되었습니다.
*자기의 불운한 운명을 생각할 때 노래했고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며 노래불렀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구박을 받으면서도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는 자기의 운명 때문에 노래했고 그 노래가 결국은 그로 하여금 좋은 성품과 생애를 허락받을 수 있었습니다.
여섯째 아들 납달리, 아버지로서 미안한 감정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여섯째 아들은 아버지를 사랑했고 아버지를 존경했고 아버지를 이해했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항상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야곱은 여섯째 아들을 봅니다. 빌하의 집에 갈 적마다 단의 비뚤어진 언행을 보면서 깊은 절망에 빠졌던 야곱, 바로 직전에 단에게 예언을 하고 또 다시 슬픔에 빠졌던 야곱, 그러나 이제 납달리를 바라보는 순간 야곱의 입가에 배시시 미소가 감돕니다. 그리고 예언을 합니다.
"납달리는 놓인 암사슴이라"
놓인 암사슴, 그것은 자유함을 얻은 암사슴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형들은 자기의 운명에서 놓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이는 육신의 포로에서, 어떤 형제들은 폭력의 충동에서, 형제들 간의 갈등과 음모에서 놓임을 받지 못했지만 납달리는 운명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여종의 아들로 태어날 수밖에 없던 자신의 운명, 단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하고 독사처럼 남을 물고 넘어뜨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들은 질투의 사슬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경쟁의 상대로, 넘어뜨려야 할 상대로 정해놓고 소모적인 경쟁을 계속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가 그렇습니다. 정치지도자들은 숙적에게서 놓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전쟁을 한 것입니다. 국민들을 상대로 정치를 한 것이 아니라 패거리들을 모아놓고 서로 물고 뜯는 소모전을 계속해 왔기에 다른 분야들은 계속 성장하는 데도 정치는 낙후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납달리는 증오의 사슬에서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운명에 더 이상 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실에 매이지 아니하고 놓임을 받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찬양했고 노래하는 암사슴이 되었습니다.
노르웨이 극작가 입센의 작품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습니다. 심금을 울리는 영혼의 노래였습니다.
어떤 이가 "그 노래를 누가 가르쳐 주었습니까?" 묻자 "슬픔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제게 슬픔을 보내셨는 데 그 슬픔이 인생의 의미와 노래를 가르쳐 준 것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흑인들의 영가(靈歌)는 흑인이라는 슬픔 때문에 나온 것입니다.
암 사슴은 우아함, 고고함, 품위 있는 것을 상징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슴은 고고함입니다. 노천명, 사슴을 노래하기를 "목이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라고 했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온갖 질투심, 혼탁한 형제들 간의 이전투구, 흙탕물과 같은 가정에서 납달리는 노래하는 암사슴으로 곱게 성장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에서 자유함을 누리는 놓인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에도 경쟁심을 느끼지 않고, 질투심이 배제된 정말 사슴처럼 우아하게, 고상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지향해야 될 목표 중의 하나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노래하는 이스라엘을 암사슴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에 다니게 하시도다"
그것은 아무 것도 없는 중에서 노래하는 암사슴입니다. 바로 납달리의 삶이었습니다.
납달리는 가장 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았습니다.
모세는 신명기 33장 23절에서 납달리에게 이런 축복을 예언합니다.
"납달리에 대해서는 일렀으되 은혜가 족하고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너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지어다"
은혜가 족한 납달리여, 여호와의 복이 가득한 납달리여!
납달리는 은혜가 족한 게 아니라 너무도 부족했습니다. 그의 출생과 신분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여호와의 복이라고 할만한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는 비천한 여종의 아들이었습니다. 한 여인의 질투심이 빚어낸 천덕꾸러기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 어떤 형제도 갖지 못한 복을 누리고 있습니다. 은혜를 누리고 있습니다. 영혼이 복을 받았더니 또 땅의 복까지 얻고 있습니다.
모세는, 서방과 남방을 얻을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서방은 지중해가 위치하고 있으며 동편은 갈릴리바다입니다.
이스라엘은 갈릴리바다를 중심으로 번성했습니다. 그곳은 물이 풍부했고 풀과 나무들이 잘 자랐습니다.
이처럼 풍성한 곳을 납달리지파는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환경을 극복하고 감사의 찬송을 하는 자들에게 가장 좋은 땅을 주십니다.
좋은 땅만 얻은 게 아닙니다. 좋은 후손들을 얻었습니다. 복음이 시작되었을 때 복음을 가장 많이 빨리 받아들인 곳은 갈릴리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납달리 자손들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찬송할 수밖에 없었던 납달리의 후손들, 그리스도가 왔을 때 그들의 마음은 그리스도를 향하여 열렸고 복음의 씨앗이 떨어졌을 때 사슴의 발처럼 빨리 뛰어가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미리 노래한 것입니다.
"너 납달리여 은혜가 족하다 복이 많도다!"
환경과 출신이 빈약하다고 불평하거나 독한 마음을 품지 마십시오. 단과 같이 행악자가 될 뿐입니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향하여 소망을 품고 노래하는 자들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입니다.
우리의 환경을 보면, 더군다나 남들과 비교해 보면 신경질이 날만큼 초라합니다. 우리는 이웃들과 경쟁을 벌이게 됩니다. 결과는, 단과 같이 악한 자가 될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없으나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아무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살아갔던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그 순간, 우리에게 참된 놓임이 있습니다. 아무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마음껏 복주십니다.
누가 납달리가 될 것입니까? 접니다! 하고 마음의 손을 드십시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슴처럼, 우아한 사슴처럼 뛰게할 것입니다. 높은 곳을 달리게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결론
출애굽기 28장에서 납달리를 상징하는 보석은 "벽옥"입니다. 이 보석은 약간 푸른빛이 있으면서도 노란색을 띄고 있는 색상으로서, 대단히 투명하면서도 아주 화려한 색상을 가지고 있는 보석입니다. 이 보석은 하늘나라를 상징할 때 쓰여지는 보석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릇된 경쟁심을 버리기만 한다면 우리의 마음은 `벽옥'이 되고 천국이 될 것입니다. 이웃이 잘 되는 것이 바로 내 행복이요, 이웃이 칭찬듣는 것이 나의 기쁨이 되는 하늘나라의 마음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릇된 시기심, 질투심에서 놓임을 받지 못하는 한, 아무리 좋은 환경 속에서도 우리들은 단과 같이 남을 물고 넘어뜨리는 어둡고 험한 생애를 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쪽의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저주하는 사람입니까? 찬송하며 축복하는 삶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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