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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판 준비는 네가 하고, 글씨는 내가 쓴다!
출애굽기 34:1~9
서론
금년도 우리교회 사역주제를 “무너진 제단을 회복하라”로 정했습니다. 왜 이런 주제일까, 코로나19로 한국교회 예배제단이 무너졌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교회생활, 예배생활, 주일성수는 예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할 일그러지고 변형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사역주제의 성경구절에는 '회복' 아니라 ‘엘리야가… 수축하되’(왕상18:30)로 되어 있습니다.
수축(修築). ‘집이나 다리, 방죽…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을 말합니다. 예배를 수축하라는 것은 원상태로 돌려놓으라, 리빌딩입니다. 믿음은 매일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위대하신 분인가, 히브리인들은 얼마나 대단한 민족인가…. 십계명을 보면 압니다. 십계명은 세상에 선을 보인지 3,50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건재하고 있습니다. 물론 고대 바빌로니아 함무라비왕 시절에 제정된 함무라비법전(B.C.1750)보다는 조금 늦지만 지금 함무라비법전에 대해 아는 이들은 전문 학자들 외에는 없습니다. 십계명은 유대종교를 믿는 신자들은 물론 전세계 그리스도인들이 2천년 이상을 생활지침으로 살아온 성문법입니다.
십계명은 두개의 돌판에 두 번에 걸쳐 새겨졌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십계명 돌판작성에는 모세가 재수(再修)를 했습니다. 십계명에 관해서는 모세도 재수생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첫 돌판을 주셨습니다. 돌판(돌비)도, 돌판의 글도 하나님께서 친히 새겨주셨습니다.
“모세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오는데 증거의 두 판이 그 손에 있고 그 판의 양면 이편저편에 글자가 있으니 그 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요 글자는 하나님이 쓰셔서 판에 새기신 것이더라”(출32:15-16)
돌판이 두 개인 것은 돌비(돌판) 하나에는 1~4계명을, 다른 돌판에는 5~10계명이 새겨져 있지 않나 추측됩니다. 십계명을 받아 든 모세는 너무 감사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렇잖아도 광야 지도자로서 백성들을 지도할 지침이 없습니다. 구전(口傳)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가르침들이 있었지만 선민들의 생활지침이 없습니다. 2백만이 행진하는 광야는 무질서 그 자체입니다. 집도… 토지도… 마을도 조직도 없기에… 어떤 법으로 백성들을 이끌어 가고 조직을 운영하기 위해 상벌을 주고… 그래야 되는데 매뉴얼(manual)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던 차에 광야로 들어온 지 석 달 정도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시내산으로 올라오라 부르셨고… 백성을 지도할 계명 매뉴얼을 주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래서 하나님께서 돌판을 깎으시고 새겨 놓으실 때까지 40일을 기도면서 기다렸다가 돌판을 받고 산을 내려옵니다.
그런데, 우상을 숭배하는 백성들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습니다. 두 돌판을 금송아지 우상을 향해 던졌습니다. 금송아지도 깨지고 두 돌판도 깨졌습니다. 돌판이 자폭한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께서 당회를 하다 성경책을 집어던졌습니다. 꼭 그런 상황입니다. 모세의 손에서 돌판은 사라졌고 빈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야단치시기보다 재작업을 명하셨습니다.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네가 깨뜨린바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34;1) 두 번째 돌판은 처음 것과는 다릅니다. 이번에는 모세에게 돌판을 직접 만들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준비된 돌판에 글씨만 새겨주겠다고 하십니다.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돌판 준비는 네가 하고, 글씨는 내가 쓴다!” 여기에서 어떤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까?
교훈1. “처음 것을 잘 간수하라!”
모세는 잘 간수하지 못했습니다. 상대방 잘못입니다. 백성들이 해서는 안 될 우상숭배 행동을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결국 돌판을 깬 것은 백성들이 아닙니다. 아론도 아닙니다. 모세 자신이 돌을 던져 깨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모세 자신의 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잘못은 상대방이 했지만 결과에 대한 책임은 모세가 감당해야 했습니다. 재수하면서 엄청 고생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행히도 십계명 돌판을 다시 만들어 주시는데 첫 번째 돌판 제작과는 다릅니다. 처음 돌비 돌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께서 해주셨습니다. 모세는 시내 산에 올라 기도하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됩니다. 두 번째는, 돌도 모세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것도 산 아래에서 준비하고 그걸 산꼭대까지 이고 가야 합니다. 시내산 정상이 2285m, 한라산 백두산 높이의 중간입니다. 그러니 두 돌판을 들고 이고 올라간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과정입니까?
믿음은 체력관리와 비슷합니다. 살을 뺄 때는 엄청 힘들었는 데 찌는 것은 순간입니다. 믿음을 키우는 데는 엄청 힘이 드는데 믿음을 까먹는 것은 단기간입니다. 그러니 첫 사명 잘 붙들어야 합니다! 한번 실패하고 시험을 들면 재기하기는 것이, 다시 열심을 내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내가 참아야 합니다! 욱~ 할만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대방 잘못으로 돌비가 깨어진 것처럼 내 믿음과 내 기쁨의 돌비도 깨져버립니다.
교훈2. “처음 것과 꼭 같이 만들라!”
34:1,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깎아 만들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처음 것과 ‘같게’ 두 돌판을 만들라 하셨습니다. 커도 안 되고 작아도 안 됩니다. 두꺼워도 안 되고 얇아도 안 됩니다. 무거워도 안 되고 가벼워도 안 됩니다. 처음 하나님께서 내주신 것과 꼭 같게 만들라 하셨습니다. 모세는 석공(石工) 기술자 돌장이도 아닙니다. 애굽에서의 40년은 왕자 신분이었고 미디안 광야의 40년은 목자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니 돌을 다듬을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두 번째 돌비는 모세가 직접 만들라 하십니다. 그것도 하나님께서 주셨던 돌판과 꼭 같이 만들라 하십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34:2, “아침까지 준비하고 아침에 시내 산에 올라와 산꼭대기에서 내게 보이되”
하루 만에, 밤사이에 만들어야 합니다. 똑같이 만들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만들면 안 됩니다. 깨뜨린 당사자가 만들어야 합니다. 모세는 밤을 지새우며 두 돌판을 깎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을 탓하기 이전에 자신의 불같은 성격을 탓했을 것입니다. 백성들이 분노할 원인은 제공했지만 그걸 대응하는 자신의 방식, 방법도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밤새도록 자신의 혈기를 회개하면서 돌을 다듬어 냈을 것입니다.
코로나19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단어가 ‘부득이하여’(삼상13:12)…. 사울이 자신의 조급함을 숨기느라 한 말입니다. 선지자님이 늦게 와서 부득이 내가 번제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부득이하여’ 라는 말속에 예배 판을 깨버리고 주일성수 판을 깨버리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사정을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깨었다는 것은 이유 불문하고 잘못입니다. 잘못을 만회하는 길은 밤새도록 고생의 대가를 치루어 처음 돌판을 만들어 내라! 처음의 예배를 만들어 내라! 처음의 주일성수를 만들어 내라! 이렇게 대충~ 아무 돌판이나 들고 올라가서는 하나님께서 거기에 아무 것도 새겨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왕년에’는 우리의 단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단어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에나 동일하신 분입니다.(히13:8). ‘왕년에’ 라는 말, ‘부득이하여’는 사탄의 단어입니다. 그러기에 ‘무너진 예배를 회복하라’ 깨어진 예배의 돌을 다시 깎아내야 합니다. 깨어진 기도의 돌을 다시 깎아내야 합니다. 깨어진 주일성수의 돌을 다시 깎아내야 합니다. 깨어진 교회생활의 돌을 다시 깎아내야 합니다. 돌이 없으면 하나님께서 써주실 내용도 없습니다. 오늘 내 손에 무엇이 있는가, 내 돌판은 어떤가… 깨어진 돌판은 아닌가, 살펴보고 따져보아야 합니다!
교훈3. “내 돌에만 하나님이 쓰신다.”
모세는 밤새 돌을 깎고 돌판을 만듭니다. 그걸 이고 메고… 산꼭대기로 올라갑니다.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 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명을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두 번째 돌판을 얻는 재수(再修)의 과정과 재수생활의 작업은 너무 힘들었습니다. 40일 주야(晝夜)를 금식했습니다. 40일 주야를 묵묵히 침묵했습니다. 40일 주야를 멈추었기에 백성들의 가나안 행진이 지연됩니다. 우리가 제대로 믿음을 관리하지 못하면 이렇게 삶이 더딥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순종만 한다면 때로는 실패도 힘이 됩니다. 모세는 금식기도를 통해서 혈기를 빼버립니다. 그래서 훗날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최고가 되었습니다.(민12:3). 물론 다시 일어난 혈기 때문에 성난 지팡이로 반석을 내려쳤고 가나안이 거절당했습니다. 그래도 남은 날들은 온유함으로 존경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 돌판이 만들어 낸 축복입니다.
모세는 돌판을 깎음으로 돌비를 더 소중하게 여깁니다. 내가 찾아내고 깎아낸 돌판이라 애착이 더 갑니다. 다음에는 절대 던지지 않습니다. 혼나기도 했지만 아까워서 그렇습니다!
교회 사명이 그렇습니다.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화가 났다고 사명이나 열심을 깨버리면 안 됩니다. 교회도 내 손때가 묻어야 합니다. 내가 사다 놓고 내가 청소하고 내가 헌금 헌물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애착을 갖게 됩니다. 대형교회들이 이런 아름다운 마음들을 없애고 있습니다. 영상예배가 이런 아름다운 정신을 실종시키고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씨앗건축헌금’이라는 특이한 헌금이 있습니다. 처음 이 헌금명칭을 들으면 교회가 건축하려 하나, 생각하시겠지만 이건 예배당관리헌금입니다. 예배당이 낙후되고 뜯어 고치고 수리하다보니 틈새가 벌어지고 물이 샙니다.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곳곳에 양동이들을 갖다놓습니다. 나는 이런게 너무 익숙하고 재미가 있습니다. 없어서 그러면 서글픈데 선교사님 두 가정을 보내고 50군데 선교지 도우면서 비가 새는 것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닙니다. 씨앗건축헌금은 비가 새고 낙후가 되는 곳곳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헌금입니다. 그 헌금의 목적은 예배당에 내 손 때가 묻어야 내 집이 되고 내 교회가 되고 그런 신자가 되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우리교회가 리모델링 할 때 0장로님께서 헌금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이사를 다니다보니 교회건축에 참석할 기회가 없었고, 건축헌금은 제대로 한 번은 해봐야 하지 않을까, 늘 생각하던 차에 헌금한다는 것입니다. 누구는 건축만 하면 달아난다는 데 … 참 아름다운 마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내 돌판을 깎아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수고하고 깎아놓은 그 돌판에 복을 새겨주십니다. 모세… 베드로… 바울… 실패하면서도 스스로를 갈고 닦을 때 하나님께서 깨어졌던 그들의 생애에, 배신했던 그들의 실패 위에, 연약했던 그들의 육체에 글을 쓰셨습니다. 자신을 깎는 수고와 노력으로 돌판을 만들었을 때 하나하나의 업적이 새겨졌던 것입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님들! 코로나19, 2년을 우리는 잘 견디었습니다. 그래도 깨어진 부분들이 있습니다. 누구는 예배가 깨어졌고 누구는 삶이 깨어졌습니다. 누구는 평생토록 지켜왔던 주일성수가 무너졌고 좋은 일에 분노했음에도 욱~하는 마음에 인격에 크게 부상을 입었습니다
다시 돌판을 준비합시다. 깨어진 돌판에는 아무 글도 쓸 수 없고 하나님의 축복이 새겨질 수 없습니다. 남들이 만든 돌판으로 예배해서는 안 됩니다. 힘들고 어려워도 내 돌판은 내가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축복의 내용들을 써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깨어진 돌판을 들고 누구만을 탓하며 거기에 새겨주실 축복들을 기대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코로나19에 깨어져 버린 돌판을 보며 사탄이 좋아서 저렇게 웃고 있는데 말입니다.
(이 설교는 강문호 목사님의 설교를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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