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데스다에서 아둘람으로…
요한복음 5장 1~9절
오늘 5남전도회와 8여전도회가 공동으로 헌신예배를 하면서 한 주간 전에 두 남여회장님이 목양실로 찾아왔습니다. 어떤 설교를 기대하는가, 했더니 남녀전도회의 유래, 취지에 관한 말씀을 해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한국교회에서의 남녀전도회의 유래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남녀전도회의 유래, 취지
[여전도회]
1898년 2월 20일. 마포삼열 목사에게 세례를 받은 널다리골 교회 여신도 신반석, 김정신, 이신행 등을 중심으로 63명의 조직회원으로 여전도회 역사는 공식적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설립목적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여성교육 및 여성해방, 복음전파와 사회봉사를 위해 설립되었습니다.
여전도회는 한국교회보다 더 급성장합니다. 1923년 평양신학교 안에 여자신학부를 설립하였으며, 1931년 중국 산동성에 김순호를 최초의 여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1961년 ‘서울여자대학’이 창립되었습니다다. 1990년 한국교회여성연구소를 개설하여 교회여성의 잠재능력 개발과 지위향상에 힘썼으며, 연지동에 엄청난 여전도회관을 신축하였습니다. 남전도회원들은 꿈도 꿀 수 있는 대단한 일을 여성도님들은 해냈습니다. 여성도님들이 지니고 있는 잠재 능력을 교회와 사회의 발전에 적극 활용하면서 지난 100여년 이상을 개교회 성장에서도 중심축이 되어왔습니다. 교회의 성장 80% 이상을 여성도님들의 헌신과 수고에 돌려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전도회]
1924년 12월 2일 신문로 피어선신학원 강당에서 출발했다. 피어선신학교는 평택으로 이전해서 평택대학교, 종합대학교가 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라는 슬로건과 함께 18세 이상 40세 이하의 청장년(남녀목회자 포함)으로 구성되어 물산장려, 문맹퇴치 등 애국애족운동을 일으켜 한국과 한국교회에 희망을 선포했습니다.
설립 목적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위하여 선교, 교육, 봉사의 사역을 연합하여 추진하겠다는 것입니다. 남선교회는 3대 사역 중 특히 '선교'에 주안점을 두어왔습니다.
우리교회의 역할
1) 선교(전도)
2) 친교
3) 후원
남5전도회는 연령적으로 중년에서 장년으로 이동하는 연령대입니다. 슬슬 자녀들을 독립시킬 지점인 것이지요.
-사회적으로는 벌써 은퇴까지를 고려해야 하는 등 어깨가 무겁습니다.
-부부관계는 아내라는 개념에서 누님이라는 개념으로 이동합니다.
-의존도는 아이들보다 아내에게 갑니다.
-밖의 활동보다는 점점 가정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만큼 중년 남성들은 점점 여성화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8여전도회는 중년에서 중년으로 조금씩 이동합니다, 역시 자녀들을 독립시킬 지점에 있습니다. 자녀들이 멀쩡히 제 집과 방이 있는 데도 밖에서 방을 얻어 나가고 군대와 결혼으로 집을 떠납니다.
-특히 신체적으로 변화가 일어납니다.
-의존도가 남편보다 아이들에게 갑니다.
-그러다보니 부부관계는 남매관계로 이동한다. 나이와 관계없이 남편이 아래로 보이고 그만큼 남성화가 됩니다.
-가정보다는 교회나 동창회 모임이 더 재미가 있어 집에 있는 시간보다 외출이 잦습니다. 남편이 슬슬 부담스러워집니다.
이런 때이기에 여전도회, 남전도회는 공동체로서 매우 필요합니다. 그건 우리를 세상의 유혹에서 막아주는 울타리이고 남자들도 수다를 떨 수 있는 모임입니다. 앞으로는 이렇게 진정한 친교공동체를 만들어 주는 교회, 서로 간에 아픔과 기쁨을 나누는 중보기도공동체, 기회가 주어지면 동년배들끼리 단기선교를 나가면서 우정을 다지는 그런 공동체가 많은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본문을 봅시다. 아주 잘 아는 익숙한 장면입니다. 그러면서도 갑갑한 공동체입니다. 유익한 공동체가 아니라 서로에게 악연이 될 수밖에 없는 악성공동체입니다.
다윗의 아둘람 공동체와는 다릅니다. 다윗을 찾아 그 험악한 험지 아둘람까지 찾아온 400명의 사람들은 일종의 먹고 살기가 힘든 떠돌이 신세들입니다.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삼상 22:2)
인생 낙오자들! 실력이 없어서라기보다는 세월을 잘못 만나고 사울 정권에서 부당하게 대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사울의 정부에서는 도무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아둘람에서 훈련과 공동체의 삶을 통해 숫자만 부흥될 뿐만 아니라(삼상 23:13) 조무래기 같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군대, 하나님의 군사(역대상 12:22)로 성장합니다.
어떻게 오합지졸 조무래기들이 하나님의 군사가 됩니까? 그들은 다윗에게서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비전입니다. 그들은, 환난 당하고 빚진 자로 야반도주를 했고 그만큼 마음이 원통한 자들이었지만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아둘람공동체가 그들에게 건강한 세계관을 갖게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건강한 공동체의 힘입니다.
1) 그러나 베데스다 공동체는 생산적인 공동체가 아닙니다. 자신들이 모두 가련한 형편이었지만 서로 간에 힘이 되어주지를 못했습니다. 오히려 경쟁관계를 만들어 버립니다.
7절,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앉은병이 병자의 대답에서 베데스다 공동체는 돕는 공동체가 아니라 경쟁의 공동체요, 서로간에 시기와 질투와 원망이 있는 악성공동체가 되어버렸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 교회에, 전도회에 이런 악성 바이러스가 들어와 있는 것은 아닙니까? 교회공동체는 경쟁이 아니라 협력하는 예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상대방을 멸시하는 핼쓰장이 아니라 서로의 재활을 도와주는 재활기관이 되어야 합니다. 몸이 비틀어지고 장애인이 되었지만 괜찮다고 조금만 노력하면 되겠다는,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격려와 덕담이 있는, 아둘람의 비전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베데스다 공동체는 현재의 상황에서 제 몫을 못하는 희망이 상실된 공동체입니다. 앉은뱅이 환자의 나이는 38세입니다(5절). 이곳에 얼마나 있었을까요? 그는 이곳에서 허구한 날 연못에나 기대고 있고 모두를 경쟁자로 삼으면서 원망하고 타박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고 있을까요? 잘못된 신화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베데스다는 간헐적인 온천입니다. 어쩌다 이곳에서 장기간의 온천욕을 통하여 나은 환자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 ‘어쩌다’가 아주 일반화가 되어버리고 치료가 되는 병원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게 사실이 아닌데 사실인 줄 잘못 알거나 아닌 줄 알면서도 더 이상 도피처가 없기에 여기에 자리를 깔고 뭉그적거리고 있습니다. 희망을 깔고 앉아있는 줄은 모르고 희망을 잡으려 하니 어디에서 희망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베데스다 여기에서 희망을 찾으려면 여기에서 문제 해결, 경쟁력이 될 만한 것을 찾아내야 하지 않겠습니까. 걸을 수 없는 사람이 걸으려면 다리가 건강한 사람과 같은 희망을 찾으면 됩니다. 두 다리가 튼튼한 시각장애인의 등에 업히든지 어깨에 올라타던지 공조해서 물이 동할 때 남들보다 먼저 달릴 수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실제적인 희망은 외면해 버리고 기어서 굴러서 가려니 다리가 튼튼한 사람들과 어찌 경쟁력이 있겠습니까.
천국은 개인 입장이 아니라 단체입장입니다. 성령은 언제나 ‘우리 가운데’ 임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개인을 선택하기에 앞서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 일하는 사람들보다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 잘 믿는 사람들보다는 같이 잘 믿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3) 베데스다는 각오가 결여된 공동체입니다. 예수님께서 앉은뱅이 환자가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래된 줄 아시고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6절). 참 눈치도 없는 질문입니다. 이곳에서 이런 상황에서 이런 사람에게 묻는 질문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질문을 하십니까? 그날은 바로 안식일입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병을 치료하고 치료를 받는 것도 일입니다. 병을 고쳐서도 안 되지만 병을 고쳐준 이가 예수라면 문제가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닙니다.
당장 10절의 상황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런 추상같은 불호령이 있을 것이며 이씨조선의 왕과 사대부의 한 두 마디로 목숨이 끊기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은 이런 뜻입니다.
“내가 고쳐줄 수도 있는데… 이 일로 너에게 엄청 힘든 일이 발생할 것이다! 사회에서 완전히 소외되고 종교공동체에서 추방당할 수도 있다! 지금은 구걸이라도 하며 살고 부모 친척들이 불쌍하다고 도와주는 것으로라도 살 수 있지만 두 발이 나를 통해 고침을 받았다면 모든 먹고 사는 일이 힘들어질 것이다! 그래도 고치겠느냐?”
그 말씀에는 나음으로 오는 희생과 의무와 각오가 되어 있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중년의 나이에 날마다 이런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합니다.
{결론}
우리교회는 17개의 남녀전도회가 있습니다. 숫자로만 볼 때는 대형교회 수준입니다. 요즘의 교회들은 남녀전도회, 남녀선교회가 거의 유명무실입니다. 교회들이 1부~5부 6부…로 나눠지기에 같은 시간 대에 모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대로 운영될 수가 없는 것이지요.
우리교회는 이렇게 아름다운 17개의 공동체가 있어서 정말 좋습니다. 40여년의 목회를 여러분들과 함께 해서 큰 동역이 되고 기쁨이 되고 행복합니다! 이젠 여러분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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