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큰길(大路)인가, 족장로(路)인가!
민수기 20:14~21
서론
본문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거의 마감하려던 시기입니다. 모세는 사해 남쪽에 위치한 에돔 땅을 지나 요단 동편(Trans Jordan) 지역으로 진입하려 했습니다. 이 지역 주변에는 에돔과 더불어 모압, 암몬이 자리 잡았고 그 틈새에 아모리 남왕국이, 북왕국이 세력을 굳혔습니다. 이들 왕국들은 세력권 다툼에 온힘을 쏟았으며 아모리 남 왕국이 모압을 쳐 아르논강에 이르기까지 영토를 확장했습니다(21:26). 모세는 이 같은 정치 상황을 이용하여 에돔과 모압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로 자신들이 통과할 수 있도록 에돔에 요청합니다.
17절, “우리가 당신의 땅을 지나가게 하소서…”
모세는 에돔 왕이 당연히 청을 들어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에돔과 모압을 통과한 후 가나안 땅으로 가려면 두 왕국의 적대국 아모리와 충돌합니다. 대신 싸워주니 오죽 좋아요? 이런 경우를 적을 이용(利用)하여 다른 적을 제어(制御)하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작전이라 합니다.
17절, 통과 시에 도로만 이용할 뿐 지역에는 어떤 손해도 끼치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모세는 자신들이 통과할 이 길을 17절, ‘왕의 큰 길’이라, 개정판 성경에는 ‘왕의 대로’라 했습니다.
21장 22절에도 ‘왕의 큰길’이라고 말합니다.
‘왕의 큰길’ ‘왕의 대로’, King's Highway는 고유 명사로서 트랜스 요르단 북쪽으로부터 아모리와 모압과 에돔을 통과하여 아카바 만의 어귀인 '에시온 게벧'에 이르는 거대한 국제도로입니다. 군사적 목적에서 주변국들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하여 건설한 것으로 보입니다. 평화 시에는 다메섹에서 아라비아를 왕래하는 대상(隊商)이 주로 사용했습니다. 200만 명 이상의 백성을 인솔하는 모세로서는 넓은 길에서 백성들이 좀 편하게 행군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모세의 청은 거절당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대충 이런 이유였을 것입니다.
-오랜 민족적 감정으로 통과를 불허했다(창 27:41). 에돔은 에서의 후손이니 피해의식이 크다.
-현실적으로 복잡한 일이 생길 것이다. 성읍의 물건 하나 건드리지 않겠다, 하지만 과일 따먹을 때 물마시다 그 값을 언제 계산하고 있겠나? 200만 명의 대소변 처리 문제는?
-성읍의 모든 정보가 누출된다. 훗날 정식으로 양국 간에 전면전이 벌어지면 이스라엘은 에돔
모세는 전투 대신에 21절, 길을 돌렸습니다. 21장에서는 헤스본 시혼 왕에게서도 꼭 같이 거절당합니다.
그러나 이건 인간의 관점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다릅니다. 눈앞의 상황으로는 민족적 악감정으로 거절한 것처럼 보이지만 신명기는 하나님께서 왕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고 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기에(2:30)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에돔과 아모리왕의 성품을 완강하게 하셨을까, 전쟁을 일으켜 그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소유지로 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서편만 약속의 땅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의 쌈으로 요단강 동쪽 이들 땅도 이스라엘의 땅이 되었고 요단 동쪽 땅로 이스라엘 땅으로 귀속시킴으로 광활한 국토가 되었습니다.
다른 이유로는 ‘왕의 대로’를 싸우면서 지나가도록 하는 섭리입니다. ‘왕의 대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걸어갈 길이 아닙니다. 이런 길은 맛보기로도 걷지 못하게 하신 것입니다. 만약 평탄한 길의 편함을 알게 된다면 여기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 길은 군사도로요 상업도로입니다. 넓고 평탄한 길입니다. 만약 넓은 길이 주는 안락함을 알게 되면 가나안 입성 이후에 여호와와 함께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 고된 율법의 길, 오직 유일신만을 섬겨야 하는 성민의 길을 기피하려 할 것입니다. 좁은 길이요 협착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왕의 대로를 막으시고 다시 광야의 고된 길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 대한민국이 예수님을 잘 믿는 민족입니까? 한국교회는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기독교입니다. 한국 교회의 부흥은 원인들이 있지만 가난과 고난의 길이 큰 몫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살아왔던 가난, 중국의 침략과 약탈을 당했고 일제 36년, 6.25 전쟁, 민주화가 되기까지 자유가 억압되었습니다. 그래서 힘드니까 신앙의 힘에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살만하니 어때요? 슬슬 편하게 더 편하게… 넓은 신앙의 길로만 나가려 합니다. 초신자들이 아니라 오랫동안 좁은 길을 걸어왔던 중직자들이 대로(大路) 쪽으로 방향을 돌리고 있는 게 눈에 보입니다. 코로나19는 왕의 대로를 택하는 심리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름길을 제쳐놓고 에돔 땅을 우회해서 다시 광야 길로 나가도록 하시니까 백성들은 마음이 상했습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이 달랐기에 생긴 분노입니다.
팔레스타인 요단계곡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계곡입니다. 요단에서 이집트, 에티오피아까지 내려가는데 인공위성 사진에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보이고 다음에 요단계곡이 보일 정도로 엄청난 계곡입니다. 지구상에는 그 이상의 계곡이 없다 합니다. 계곡 위에는 넓은 평지인 골란고원이 한없이 펼쳐지는 신비한 땅입니다. 이 계곡을 사이에 두고 양편으로 두 길이 있습니다.
왕의대로(大路)-요르단, 사우디 아라비아, 레바논, 시리아 쪽의 길은 팔레스타인에서는 소위 ‘실크로드’ 비단길입니다. 도로가 좋아 다니기도 편해서 장사꾼들이 행렬을 이룹니다. 돈방석의 길이고 성공과 명예의 길입니다.
반대쪽에 족장로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국경 안에 있는 길로 아브라함을 비롯한 족장들이 다니는 길이라 해서 족장로(路)라 합니다. 이 길은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이 간 모험이 길이요, 야곱이 밧단아람으로 도망갈 때 걸어갔던 외로움의 길입니다. 요셉이 형들 음모로 팔려서 애굽으로 가던 눈물의 길입니다. 신구약 성경의 4분의 3은 족장로를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아브라함이 헤브론에서 살았는데 해발 1,200m입니다. 예루살렘이 800m, 베들레헴도 족장로에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의 제단이 있던 실로도 해발 800m, 사무엘 집도 족장로에 있었고 그 길로 다녔습니다. 대관령이 800m입다. 이처럼 족장들은 높은 곳에서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걸었던 지명들이 창세기에 나옵니다.
*우르(11:28, 31). 수메르문화의 중심지대로 살만했고 풍성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문화적인 혜택이 많았지만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땅입니다. 이 땅을 걸어 나왔습니다.
*하란(11:31). 기원전 2500년 건설된 도시로 앗수르제국이 바벨론에게 멸망(B.C. 609년경)할 때까지 수도였습니다. 세계최초의 대학의 터가 있고 천문대와 수리시설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우상숭배가 심했습니다(왕하 19:12). 아브라함은 부친이 죽자 즉시 하란을 떠납니다. 돈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워킹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성공과 출세가 아니라 하나님을 목표로 이동합니다. 이런 원칙 있는 걸음이 ‘족장로’라는 유대인의 삶의 기준, 행동의 기준을 만들어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처럼 높은 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들은 산의 민족입니다. 산은 하나님과 가까운 곳입니다. 그곳에는 기도가 있고 제단이 있고 영혼이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곳입니다. 평야에는 조건이 아주 좋습니다. 그러나 아래로 내려갈 때는 언제나 시험이 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위로 가고 롯은 아래로 갔습니다. 롯은 평지로 갔다가 망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엄청나게 고생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야곱은 세겜땅에 내려가 살다가 디나의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높은 지대를 선호했습니다.
고산지대는 불편합니다. 춥습니다. 그러나 족장들은 이 길을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고 불편했지만 믿음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고지대에는 세속과 멀기에 영적인 것들이 먼저이고 정신적인 깨끗함이 있었습니다. 육신적 물질적으로는 궁핍했지만 영적으로는 깊고 풍부했습니다. 그들은 산지에서 장막을 치고 살았지만 풍성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기에 족장로를 중심으로 살았고 그것을 경계로 그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도 다니는 길이 따로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길입니다.
십자가의 길은 왕의 대로와는 다릅니다. 왕의 대로는 넓은 길이요 성공의 길이요 유행의 길입니다. 그 사는 방식이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런 길입니다. 이런 길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지 못합니다. 요즘 교인들이 좁은 길로는 들어왔지만 넓은 길로 살아버리고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세속화되어 간다는 말은 이런 경향을 말합니다.
한 시대가 망하는 데에는 경제적인 문제, 군사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망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그 이면에는 항상 정신적인 위기가 있었습니다.
바울은 말세의 특징을, 사랑이 식어지며 돈을 사랑하며 모이기를 폐하며… 그러다보니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은 상실된 믿음들이 나타난다, 예고합니다(딤후3:15 참조)
이것이 바로 왕의 대로를 선택한 현대 크리스천의 모습입니다. 모든 것은 살아가기에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의 얄팍함-사람들은 깊은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얄팍하기에 쉽게 택하고 쉽게 버리고 그러다 보니 자살, 동성애, 마약, 점들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얄팍함이 가져다주는 결과입니다. 그것은 넓은 길이지만 패망의 길인 것입니다.
주후 300년 동안 로마의 교회는 카타콤에서 믿음의 순결함을 지켜냈습니다. 그곳은 족장로였습니다. 그것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죽어갔습니다. 물질의 혜택은 전혀 받지 못했지만 삶은 풍성했습니다. 그러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했고 교회는 땅굴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때부터 교회는 타락해갔습니다. 교회가 족장로를 버리고 세속로를 걸어갈 때 교회는 타락할 수 없었고 종교개혁은 족장로를 포기하고 왕의 대로를 선택한 교회에 필연이었습니다.
요즘 신자들은 자꾸 왕의 대로, 성공의 대로만 찾아다닙니다. 왕의 대로는 넓은 길, 성공의 길, 유행의 길입니다. 그 사는 방식이 세상 사람들과 살아가는 하향평준화입니다. 성공을 위한 길이라면 주일성수도, 그리스도인의 의무도 벗어버립니다. 믿음생활에 요령만 늘어납니다. 이런 길에서는 하나님과 깊은 교통을 나누지 못합니다.
우리가 제대로 된 믿음의 길을 걸어가려면 세상에서는 불편하고 힘들어야 합니다. 남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작은 일에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비난 받고… 얼마나 힘들어요. 그게 당연합니다. 우리가 들어온 문(門) 자체가 좁고, 좁은 문을 통해 들어왔으면 큰 길이 나타나야 하는데 갈수록 길 자체가 협착합니다. 참 힘듭니다.
그래서 믿음의 길에서 떠납니다. 편한 길로! 더 편한 길로! 그래서 기독교 안에도 요즘에는 보수적 교단보다 진보적 교단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진보교단들은 주일성수도 강조하지 않고 주초(酒炒)문제도 강제성이 없습니다. 그래서 편하게 갑니다. 그런 사람들치고 성경적 믿음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편하나 멸망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족장로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좁아서 거칠고 그만큼 힘들지만 거기에 영생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결론
미국 펜실베이니아 중심으로 ‘아미쉬(Amish) 마을공동체’가 있습니다. 현대문명과 단절한 채 자신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며 생활하고 있는 기독교종파의 재세레파 공동체입니다. 스위스에서 시작되었다 해서 ‘스위스 형제단’이라고 합니다. 아미쉬의 관심은 초기 원시교회의 신앙을 되살리자, 그리스도의 거룩하고 순결한 공동체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영성을 회복하자, 예수님의 재림만을 기다리며 거룩하게 살자는 것이 핵심입니다.
아미쉬의 기다림은 검소한 기다림입니다. 전기도, 전화도, 컴퓨터도, 텔레비전, 라디오, 냉장고, 가스레인지도 없습니다. 24시간 손만 대면 나오는 따뜻한 물도 없습니다. 수도꼭지도 없습니다. 난방이 안 되고 있습니다. 커다란 무쇠 스토브에 나무를 넣어 때는 것이 유일한 난방입니다. 카펫도 없고 마을 전체가 아스팔트 없는 흙길입니다. 자동차는 물론 일체의 기름을 쓰는 농기계도 없습니다. 대신 말이 끄는 마차를 타고 다닙니다. 순종과 겸손, 순결과 단순, 거룩한 삶을 살며 오실 예수님만 기다리자는 것이 아미쉬의 목표입니다.
16세~21세 사이에 결혼합니다. 17세~20세 사이에 세례를 받은 후 아미쉬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떠날 것인지 결정합니다. 보통 85%가 남습니다. 떠난 아이들도 돌아오는 이가 90%입니다. 이들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이렇게 덧붙인답니다.
‘하늘에 계신’ 하지 말라. 세상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 하지 말라. 아들딸로서 살지도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지 말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하지 말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하지 말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하지 말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하지 말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 하지 말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아미쉬공동체럼 살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세상처럼은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편한 길, 성공하고 명예를 얻을 수 있는 왕의 대로를 두고서도 굳이 가파른 해발 800미터의 산길로만 다니던 족장들의 삶, 족장로를 통해 불편은 하지만 세속과 멀리 떨어지려고 삶의 희생했던 족장들의 삶, 평생 장막생활만을 하며 살았던 레갑인들의 삶(렘35장), 아미쉬공동체의 정신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6월입니다. 현충일과 6.25가 있는 순국의 달 6월에 왕의 대로를 버리고 족장로를 걸었던 숭고한 희생자들의 정신을 기립시다! 6월 한달 만이라도 매일매일 나는 지금 왕의 대로 세속로를 걷고 있는가 족장로를 걷고 있는가… 살피며 걷도록 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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