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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세 비유의 공통 분모(누가복음 15:1~7)

by 강정훈말씀닷컴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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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비유의 공통 분모

누가복음 15장 1~7절

 

서론

기독교는 인간 구원의 종교입니다. 죽음을 전제로 살아가는 인생들에게 구원만큼 좋은 단어가 어디 있겠으며 그보다 더한 행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중심은 구원이고 성경의 중심도 구원입니다. 구원이란 말을 빼면 만사형통이나 건강축복이나 기도응답 등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구원을 전제로 하니 예배도 좋고 찬양도 좋고 교회도 좋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입니다. ‘예수라는 말이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해 내실 분  구원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구원에 관한 말씀을 참 많이 하셨습니다.

 

1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에게 나아왔고 바리새인들은 당시 조상의 유전이나 율법 해석을 기초로 해서 만든 수많은 금지사항과 의무 조항들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간주했습니다. 비도덕적인 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간음한 자, 속이는 자 18:11), 불명예스런 직업(이들은 공민권, 법정증언권을 박탈당한 자들로 세리, 목자, 행상인, 피혁공 등)입니다. 이들을 통틀어서 죄인이라 합니다. 특히 동족의 고혈을 짜내는 세리와 창기들을 죄인의 대명사로 여겼습니다.

 

유대 율법은 이들을 부정한 자로 여겼습니다. 바리새인이라 할 때, 그 뜻은 분리자입니다. 세속과의 분리도 있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도덕이지 못한 사람들, 불명예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의 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2, 음식을 같이 먹습니다. 비스듬히 눕거나 발을 뻗거나 가장 편한 자세입니다. 유대인에게 음식은 가족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족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이를 보고 2, 수군거립니다. 개역성경에는 원망하여’, 즉 불평불만으로 와글와글 떠들었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일은 이미, 5장에서 있었고 그때도 주님께서 분명히 자신의 의지를 밝혔습니다.

 

31, “예수께서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오늘 그 장면이 반복입니다. 바리새인들, 참 나쁩니다. 말귀를 못 알아듣거나 몰라서 그러면 가르치면 되지만 이들은 뻔히 알면서 예수님을 탄핵하기 위해 수없이 공격을 일삼습니다.

예수님은 같은 말로 그들을 설득시키려 하지 않고 이번에는 예화로 답합니다. 3~7절 잃은 양, 8~10절 잃었던 은전, 11~32절 탕자 비유입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세리와 죄인들에 해당하는 부류의 사람들입니다.

 

세 이야기에는 공통분모 단어가 있습니다.

공통분모1: 잃었다!

잃은 양 비유에서 길 잃은 한 마리는 어떤 양입니까? 문제가 있는 하나, 연약한 하나, 잘못된 하나입니다.

잃었던 드라크마(은전) 비유에서 한 드라크마는 한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로서 오늘날의 일반 노동자 하루 품삯에 해당되는 금액이니 10만원 정도가 됩니다. 열 개이니 백만 원 정도가 됩니다. 이걸 잊어버렸습니다.

탕자 비유에서 둘째 아들은 못된 놈 실패한 놈, 더러운 놈, 아버지의 명예 가문의 명예를 더럽힌 놈입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탕자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잃었다는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잃었습니다. 4 잃으면

여인은 드라크마를 잃었습니다. 8, “잃으면

아버지는 아들을 잃었습니다. 32, “잃었다가

 

잃었다는 것은 실족했다는 것이고 제 자리를 이탈한 것입니다. 어린 양에게는 목자의 기쁨이 되는 그 자리, 드라크마는 부인이 남편의 정표를 확하며 기뻐하는 그 자리, 탕자는 아버지의 기쁨이 되는 그 자리 그들은 제 소유주 내지는 부친을 기쁘게 해 드리는 그 자리에서 실족한 것입니다. 위치 이탈입니다.

 

다윗왕도 실족했고 게하시도 실족했습니다. 아브라함도 베드로도 잃어버린 적이 있어요. 누구든 위험부담이 있습니다. 불안한 하나 비딱한 하나. 문제 갖고 있는 하나-그것이 인간입니다.

 

잃어버린 양은 100 마리의 양 중 몇 번째의 양일 것 같습니까?

100(꼴찌)-뭐든지 잘못은 꼴찌가 일으킵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 100번 양은 앞의 놈을 따라갑니다. 100번은 시야가 많이 확보되어 있기에 길을 잃어버릴 가능성이 높지 않습니다.

 

1번 양-잃어버린 적이 없습니다. 목자는 1번만 붙들고 갑니다. 99마리는 저절로 따라옵니다.

50-앞에 반 뒤에 반, 눈감아도 그냥 갑니다. 대충 어울려 가다가 잘못 나갑니다.

100마리 중 누가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모두 잃어버릴 가능성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도 언제나 실족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그러기에 특정 인물들-세리와 창기를 죄인으로 낙인찍고 그들만 죄인으로, 자신들은 의인 행세했기에 구원받을 기회, 구원의 기쁨을 놓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들을 안다면 남들에 대해 말 못 합니다. 우리 구원을 늘 조심해야 합니다.

공통분모2: 찾았다!

세상 종교관은 내가 찾아가는 것입니다. 명상과 구도와 철학을 통해 내가 신을 찾아갑니다. 그 신 앞에 서면 윤리와 선행을 통해 자격을 취득하고 구원을 받으려 합니다. 기독교는 이런 구원관과는 다릅니다. 사람이 신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가인을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느냐?

하나님께서 하갈을 찾아오셨습니다. 네가 어디로 가느냐?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그들의 특징은 잃은 자들입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잃은 자가 되었고 가인은 아버지에게서 잃은 자식이 되었고 하갈은 주님의 집에서 잃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들을 제자리로 돌려놓기 위해 찾으시는 것이 오늘 비유들입니다.

 

그래요! 세 비유의 공통점은 찾는 이야기입니다.

 

잃은 양을 찾아서 4,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니 5절 찾은 즉

한 드라크마 8,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니니 9절 찾았노라

한 아들 24,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왜 찾는가? 불쌍해서? 자기 것이니까 찾습니다. 내 양이니까! 사랑의 정표니까! 내 아들이니까! 그래서 찾는 것입니다.

목자와 양-누가 더 아픈가? 목자가! ? 내 양이니까! 그것은 값으로 매길 수가 없습니다. 목자에게 양은 가족이여 내 자식과 같습니다. 100명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럽습니다.

 

여인과 은돈-누가 더 답답할까? 여인입니다. 유대 여인에게 열 드라크마는 결혼반지, 결혼목거리에 해당됩니다. 남자가 결혼 지참금 형식으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주는데 여인은 그것으로 자신의 머리를 장식했습니다. 그러니 여인에게는 사랑의 징표이고 어머니가 남겨준 유산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찾아 나섭니다.

집을 나간 아들과 아버지-누구 속이 더 탈 것인가? 아버지가! ? 내 아들이니까!

그냥 찾는 것이 아닙니다.

 

잃은 양 4,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니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는 것입니다.

한 드라크마 8,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아다니

탕자. 20,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왜 우리를 구원하시는가? 우리가 불쌍해서가 아니라 우리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애착 때문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그 사랑 때문에 아들을 보내고 우리를 대상으로 구원의 드라마를 만듭니다. 바울은 이를 우리가 아직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셨다”(5:8) 합니다.

 

구원은 모두 하나님께서 찾아내신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다윗, 베데스다 병자, 삭개오-모두가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고 찾아내십니다. 구원은 하나님이 주인공입니다. 기독교의 구원관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구원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공통분모3:즐거운 잔치

목자는 양을 찾아 잔치했습니다. 잔치 해버리면 양 몇 마리를 더 없앱니다. 손해가 났습니다.

돈 한 닢을 찾아서 잔치해버리면? 손해입니다.

재산 떨어 먹은 아들 위해 잔치 베풀면 이중으로 손해입니다. 이러면 찾으나 마나! 그래도 찾습니다. ? 내 것이니까! 사랑하는 내 소유물이니까! 손해와 상관없이 찾아냅니다. 찾아내면 매우 즐거워하시고 잔치를 엽니다.

 

동전은 새로 만드는데 필요한 비용 대비 사용빈도와 효율성을 고려하면 경제적 부담이 큽니다. 실제 10원짜리 동전 하나를 발행하는 데 30원 정도 듭니다. 동전이 잘 회수되지 않아 매년 동전 발행에만 500억원이 소요됩니다. 파손된 동전을 폐기하는 비용으로도 100억원을 지출합니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그래도 손해에 관계없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돈들이 효율적으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앞으로는 동전없는 사회가 되기에 10원짜리는발행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원은 은 막대한 투자이고 적자입니다. 하나를 위해 천국의 자원들이 너무 많이 투자됩니다. 독생자를 주신 투자는 막대한 적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즐거워하십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 큰 즐거움이 됩니다. 그래서 손실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교회도 영혼 구원에 대한 아낌없는 투자가 필요합니다.

주님께서는 죄인 하나가 돌아오면 하늘에서 큰 기쁨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잃은 양. 6절 함께 즐기자, 7절 기뻐하는 것이

은돈. 9절 함께 즐기자

24, 24절 즐거워하더라 32,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모두가 주인의 즐거움으로 갔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아 5 어깨에 메고 너무 즐거워서!

구원은 이익이 없는 투자입니다. 이스라엘도 우리들도 별로 투자가치가 없습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을 택하시고 성자를 희생시키며 구원해주십니다. 우리 구원이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100마리 중의 하나는 100분의 1, 은전 10개 중의 하나는 10분의 1, 두 아들의 비유에서는 11, 이로써 1%, 10%, 50%의 구원 비율입니다. 이런 하나도 있고 저런 하나도 있습니다. 11에 해당되는 영향이 있는 하나, 100분의 1에 불과한 초라한 하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구원하실 때에는 차별 없이 같이 구원하십니다. 작은 사람이나 큰 사람이나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무명의 신자들에게는 100분의 1이겠지요. 유명목회자나 유명인들은 11에 해당되는 귀한 분들이겠지요. 그래도 하나님의 구원은 차별이 없습니다. 다 귀한 구원입니다.

이것이 목사의 마음입니다. 목사에게는 100분의 1에 해당되는 분들이나 5분의 1에 해당되는 장로님들이나 모두 귀한 분들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큰 희생이고 투자이고 계획입니다. 굉장한 값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값진 것이기에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에게는 굉장히 소중하고 귀한 존재들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희생시키면서까지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기독교의 구원은 은혜요 감사 감동입니다.

 

결론

한 남자가 위험한 파도 속을 헤엄쳐 가서 바다에 빠진 소년을 구조했습니다. 얼마 후, 의식을 되찾은 소년이 자기를 구해준 남자에게 말했습니다.

내 생명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떻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남자는 소년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말했습니다.

괜찮다, 꼬마야. 다만 너의 생명이 구조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음을 앞으로 너의 인생에서 증명해 보이거라.”

 

구원은 공짜로 받았지만 구원을 위해 지불한 가격표의 값을 우리가 해야 합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에 우리가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원받은 우리, 구원해 줄만한 가치가 있는 존재였다는 것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이후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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