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가던 길을 간다!
사무엘상 6장 10~16절
서론
본문에 암소 이야기가 나옵니다. 소(牛)는 개와 함께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가축입니다. 기원전 6,000년쯤 서남아시아와 인도에서 인간에 의해 길들여졌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눌지왕 22년(438년) 소로 수레 끄는 법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하고, 지증왕 3년(502년) 소를 써서 논밭을 갈기 시작했다고 기록합니다.
이후, 소는 오랫동안 ‘일소’ ‘농사꾼’ 소였습니다. 장정 여덟 명 몫을 했답니다. 소는 식구, 식솔(食口-한 집에서 같은 밥 먹는 사람)은 아니지만 하인이나 노비를 뜻한 생구(生口)로 부르며 사람대접을 했습니다. 소는 물건을 운반하고, 달구지나 마차를 끌어 교통수단으로, 쇠고기라는 식량으로, 재산목록 1호로, 성경에서는 희생제사에 사용되는 제물로, 때로는 우상숭배로 이용당했습니다. 이만한 용도로 인간사회와 밀접하게 관계를 맺고 살아온 가축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두 암소는 도시국가 블레셋 성읍의 재앙을 짊어지고 성읍 밖으로 갖다버린 애국적 소입니다. 금년 2021년 ‘소의 해’도 작년 1년을 괴롭히던 코로나재앙을 멀리 끌고 가버리는 해이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소의 특성에서 예수님의 삶을 살펴보고 우리의 사명을 다짐하는 시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우직하고 충직으로 사명의 길을 가다.
본문은 이스라엘 가나안 초기에 해당됩니다. 아직 왕정(王政)제도를 갖지 못하고 사사나 제사장이 왕을 대신했습니다. 12부족은 각각의 살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시대,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영광의 법궤를 빼앗김으로 영광이 떠나간 시대를 맞게 됩니다. ‘자기 소견대로 살았던 시대’의 결과물입니다. 자기 소견은 정도(正道)가 없는, 충성, 충직과는 거리가 먼 생활입니다. 이익이 되면 따르고 손해가 될 것 같으면 버리는… 우상숭배의 길입니다.
블레셋 진영으로 들어간 법궤는 축복이 아니라 애물단지가 됩니다. 독한 종기들이 생기고 사람들이 죽고… 계속해서 변고(變故)가 일어납니다. 블레셋 제사장은 문제 해결로 금쥐 다섯과 금독종 다섯의 형상을 만들어 수레에 싣고 두 암소로 이스라엘 지경에 갖다 버리라, 제시합니다. 암소들이 곧장 가면 재앙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지만 다른 곳으로 가면 하나님과 관계없으니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물로 선정된 두 암소는 법궤 실은 수레를 끌고 벧세메스로 올라갑니다. ‘젖 나는 소’(7절)로 애처롭게 우는 송아지에 울음이 나왔겠지만 좌로 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묵묵히 갑니다. 날뛸 수도, 달아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읍을 살리고 새끼들을 살리는 길이기에 죽음의 길 벧세메스로 묵묵히 올라갑니다. 소들이 그런 생각을 하겠습니까마는 대(大)를 위해 소(小)를 희생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모양새입니다.
소가 사랑받은 이유는 특유의 충직함 때문입니다. 옛사람들은 속상하면 밭두렁 소에게 넋두리했답니다. “처(妻)에게 한 말은 소문이 나도 소더러 한 말은 소문이 나지 않는다”는 속담은 소가 그만큼 가까운 친구였음을 뜻합니다. 그래서 “소귀에 경 읽기” 라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들은 주변의 이런 저런 소리에 따라 정도(正道)에서 흐트러지지 않습니다. 이런 우직함, 충직함, 묵묵함이 인간들을 살리는 큰일을 하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하늘영광을 버리고 육체를 입으셨기에 얼마나 버겁습니까? 당장 벗어버리고 싶었겠지요. 사단은 매일 유혹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 산위에서 뛰어내리라! 절을 하라! 쉽게 거절할 수 있는 유혹들이 아닙니다. 그래도 소와 같은 특유의 충직성으로 별 말들을 소화했고 환경을 수용했고 흔들리지 않고 사명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사람에게는 위(胃)가 한 개인데 소는 네 개입니다. 소는 씹기 전에 일단 아무거나 삼킵니다. 옷 단추, 열쇠, 호주머니용 칼, 시계, 심지어는 숟가락… 잡다한 것들입니다. 이쪽 위가 소화를 못하면 남겨두고 다른 쪽의 위의 것을 소화시킵니다. 다른 쪽이 안 되면 다음의 것을 소화시킵니다. 그래서 느릿느릿… 그러다보니 걸음은 느리지만 소화가 되며 우직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의 길을 갑니다. 이런 사람을 ‘진국'이라 합니다.
이런 진국들이 많은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니체는 이런 말을 합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사람이 있다. 자기의 길을 걷는 사람과 남의 길을 구경하며 걷는 사람”
누가 옆에서 뭐라고 해도 정도를 걷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진짜 예수쟁이입니다. 타인의 말에 너무 연연하지 않고 소처럼 충성스럽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예수님의 길을 가는 사람이요, 벧세메스 암소처럼 우직한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나 잘 소화하고 누구나 수용하는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우직하게 충직하게 사명을 감당하는 길을 계속 걸어갑시다!
주인과의 교감(交感)으로 생구(生口)가 되다.
개는 자기중심이지만 소는 주인 중심의 교감입니다. 항상 주인을 바라봅니다.
*주인의 기침 소리를 기상신호 삼아 동료나 새끼들에게 음매~ 일어나라! 기상명령을 합니다.
*주인의 허락이 없으면 집안에 있는 어떤 먹이에도 입을 대지 않습니다.
*눈치가 빨라 주인이 챙기는 도구를 보고 밭일인지 논일인지 알아차립니다. 밭으로 간다면 물을 많이 먹고 논으로 간다면 입에도 대지 않습니다. 논에서 물을 많이 먹기 때문입니다.
*일하다 힘에 부치면 주인한테 쉬었다 하자고 머리를 숙여 좌우로 흔들어 가르쳐 줍니다.
*낯선 사람이나 도둑이 들어오면 목에 달린 방울소리로 알려줍니다.
*화재나 위급한 일이 생길 우려가 있으면 난동을 부려 고삐를 끊고 집안을 빙빙 돌아 주인에게 가장 먼저 알려줍니다. 도망칠 생각부터 먼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늑대나 곰, 맹수의 기습에는 주인 앞을 가로막고 뿔로 방어하며 목숨까지 아끼지 않습니다.
소는 이처럼 주인의 소리와 눈치, 채찍, 고삐의 교감 속에서 살다갑니다. 주인의 뜻을 너무 잘 알아차리고 항상 주인을 살피고 주인의 마음을 읽습니다. 새끼에게도 그런 교육을 시킵니다.
본문의 소들도 주인의 뜻을 잘 알아차렸습니다. 주인의 집에 재앙이 왔습니다. 그 재앙을 멀리 갖다버리는 사명을 알았기에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묵묵히 올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는 가벼우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로 비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중동지방에 오셨기에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되었지 만약 동남아시아 쪽에 탄생하셨다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송아지’로 표현되었을 것입니다.
금년 한 해는 하나님을 주목하십시오. 하나님과의 교감을 통해 안테나와 더듬이를 하늘로 높이 올리세요! 그리고 목자가 되는 목사의 심정을 살피며 깊은 교감을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죽도록 일하지만 보상은 바라지 않는다.
소는 평생 일만 하다 갑니다. 소가 깔고 앉은 볏짚에 똥오줌을 누면 그대로 거름이 됐습니다. 쟁기질 써레질에 필요했고 쇠등에 발채나 옹구를 얹어 볏단과 보릿단을 날랐고, 연자방아를 돌려 곡식을 찧었습니다. 달구지를 끌어 사람이 타고 다녔습니다.
소는 살아서 온갖 힘든 일을 견디고 죽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사람에게 줍니다. 생골, 등심, 가죽, 갈비, 안심, 족탕, 꼬리탕… 아낌없이 주는 나무는 그루터기라도 남았지만, 소는 피 한 방울까지 선짓국으로 바칩니다. 하다못해 쓸개에 생긴 응어리(우황·牛黃)도 강심제로 쓰입니다. “소는 하품밖에 버릴 게 없다”는 말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닙니다. 소는 이처럼 죽어서도 고기와 뼈, 내장까지 사람에게 헌납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소는 번영과 풍년을 상징합니다. 정월 초하루 새벽에 소가 울면 그해는 풍년이라 여겼고, 정월대보름에 찰밥·오곡밥·나물 등을 얹은 키를 내밀었을 때 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라 점쳤습니다. 소가 편안하게 누운 모양의 땅은 명당으로 여겼습니다.
벧세메스 암소들의 희생으로 블레셋은 재앙이 멈추고 이스라엘은 법궤를 되찾았습니다. 암소에게 상을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러나 암소들은 희생의 번제로 드려(14절). 하나님의 노여움을 풀었습니다. 죽도록 고생만 시키고 보상이 없는 희생입니다.
예수님은 벧세메스 암소였습니다. 인류의 죄악을 지시고 골고다 길로 올라갔습니다. 십자가에서 영웅이 되어 돌아오지 않고 조롱당하시고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습니다. 죽도록 사명에 충성하셨고 희생만 하셨습니다. 그리할 때 인류 구원이라는 큰 보상을 받게 된 것입니다.
제가 목회와 함께 글 쓰는 일로 크게 축복을 받았습니다. 어찌 이런 일이 축복이…? 고등학교 때 서울에서 어느 집사님이 풍금을 보내주었습니다. 중문까지 수레를 끌고 가서 건영화물이던가, 풍금을 수레에 실고 오는데 소가 날뛰었습니다. 풍금이 너무 귀했기에 지켜내기 위해 소의 나이롱 줄을 손끝에 매었습니다. 소가 날뛰어 손의 껍질이 다 벗겨져 피범벅이 되었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제게 감동을 먹어(?) 내 손을 글 쓰는 손으로 축복해 주셨던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교회를 세웠던 것처럼 우리 희생에 주님께서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희생하는 삶이 아름답고 희생하는 믿음이 역사를 만들어 냅니다. 소가 보여주는 바입니다.
정초에 동창목사님이 세 마리를 소를 보내왔습니다.
‘수고했소!’ ‘그리웠소!’ ‘고마웠소!’
멋진 소 아닙니까? 그래서 제가 답신을 보냈습니다.
<목사님! 세 마리 소 잘 받았고 잘 키우겠습니다. 두 마리 보탭니다. ‘잘했소’ ‘행복했소’ 목사님도 잘 키우세요>
원래는 수고했다는 의미에서 ‘고생했소’를 보내려 했는데 계속 고생하라는 말처럼 들려 ‘잘했소’로 교체했습니다
2020년 12월 한 달 동안 고소·고발이 무려 5만여건으로 11년만에 월 최다입니다. 이러면 절대 행복한 대한민국이 될 수 없고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제는 ‘미웠소’ ‘망했소’ ‘꿈깨소’ ‘싫었소’… 이런 소들을 버리고 ‘힘내소’ ‘잘됐소’ ‘이겼소’ ‘잘 믿었소’… 이런 소들이 되어 코로나재앙을 이겨냅시다!
지금 시대는 3D업종(더럽고dirty, 힘들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교회도 편한 일만 원합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더욱 그런 현상일까요? 영상예배로 너무 편하고 봉사 없는 신앙생활을 알았기에 힘든 일은 하지 않으려 할까요? 그래도 저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한국교회를 믿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맛본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코로나가 끝나면 지난날의 예배 열심과 교회 봉사의 자리로 돌아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길을 (찬양으로)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나는 이 길을 가리라 좁은 문 좁은 길 나의 십자가 지고
나의 가는 이 길 끝에서 나는 주님을 보리라. 영광의 내 주님 나를 맞아 주시리....
주님 다시 오실때까지 나는 일어나 달려 가리라 주의 영광 온땅 덮을 때
나는 일어나 노래하리 내 사모하는 주님 온세상 구주시라 내 사모하는 주님 영광의 왕이시라"
사랑하는 성도님들! 코로나의 재앙에서도, 코로나가 끝났을 때도 우리는 걸어가던 길을 다시 걸을 것입니다. 올 한 해에도 묵묵하게 함께 걸어갈 모든 분들에게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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