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루살렘, 셧다운(shutdown)되다!
예레미야애가 5장 15~22절
서론
[이 설교는 코로나가 극성을 떨던 2020년 마지막 주일 설교입니다.]
2020년 마지막 주일 설교입니다. 2020년 들어올 때만 해도 기대감이 컸습니다. 2020년. 우선 숫자가 좋았어요. 또한 경자년 쥐띠해입니다. 쥐는 왕성한 번식력을 자랑합니다. 보통 임신 기간이 24일로 한배에 6~7마리 새끼를 낳으며 6주 후면 젖을 떼고, 그것들이 한 달 후면 다시 새끼를 배면서 한 쌍이 1년에 1,250마리 정도로 번식합니다. 그래서 쥐띠를 좋아합니다.
이런 띠를 참고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도 “마른 뼈로 살아 춤추게 하라”로 정했습니다. 열심을 더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더욱 수가 늘고 활기 넘치는 공동체를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경자년에 조심해야 할 삼재띠는 소띠, 뱀띠, 닭띠… 1년을 살아보니 세 띠에만 화(禍)가 든 것이 아니라 전국민 모두에게 재앙이 들었습니다. 코로나라는 쥐새끼가 들면서 인간의 존엄, 자존, 공존이 무너졌습니다. 확진자는 연일 1천명을 넘고, 사망자도 8백 명(793명) 가량입니다. 영세업자들이 무너지고 오늘 오후에는 어쩜 3단계가 나올지 모릅니다.
3단계로 격상되면, 어린이집과 사회복지시설은 휴관 및 휴원 권고, 긴급 돌봄 등의 필수 서비스는 유지합니다. 모임은 10명으로 제한되고 모든 스포츠 경기는 중단됩니다. 교통시설 KTX, 고속버스 등은 50% 이내로 예매가 제한, 학교 등교는 중단되며 원격수업으로 전환됩니다. 직장은 필수 인력을 제외한 재택근무 의무화, 예배는 1인 기준, 영상을 통한 예배만 허용됩니다.
이 정도면 대한민국이 거의 멈춰서는 셧다운(shutdown) 수준입니다. 정부도 선택할 다른 게 없습니다. 이제 자영업자들이 특히 힘들고 비축된 생활비가 없는 사람들이 많이 힘듭니다.
저 혼자 예배당에 나와 예배한다?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드릴 수 없는 예배,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영상예배, 그래서 저도 마음 단단히 먹고 있습니다. 올해 초반부터 계속되어 왔기에 이제는 울 일도 없고 실망할 만한 여력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갑갑하고 탄식만 나옵니다. 이런 한 해의 마지막, 마지막 주일에 우리는 와 있습니다.
셧다운(shutdown)의 현실
1905년 11월 20일 을사조약(11.17)이 체결되자 위암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논설을 실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비판했습니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은 ‘이 날, 목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뜻입니다. 내용 말미에는 “아! 원통한지고, 아! 분한지고. 우리 2천만 동포여, 노예된 동포여! 살았는가, 죽었는가? 단군. 기자 이래 4천년 국민정신이 하룻밤 사이에 홀연 망하고 말 것인가. 원통하고 원통하다. 동포여! 동포여!”라는 탄식이 나옵니다.
이런 답답함은 2,600년 저쪽에 살았던 예레미야의 심정과 같습니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도성이 적들에게 함락되어 무너지고 초토화된 상황을 보면서 너무 기가 막혀 이렇게 울먹입니다.
1절, “여호와여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당한 것! 코로나로 인해 하루아침에 회사 문을 닫아야 하고 실업가가 실업자가 되었습니다. 매출은 10분의 1, 10분의 2도 채우지 못합니다. 확진자가 되면 죽고 사는 문제만 아니라 회사 이미지에 심각한 손해를 끼쳐 미안해서 출근할 수가 없습니다. 나 혼자의 확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전체가 폐쇄됩니다. 두고두고 주홍글씨 낙인이 찍힙니다. 코로나가 불러온 참화(慘禍)입니다.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1절,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보옵소서”
우리가 받은 치욕! 교회는 10년 먹을 욕! 금년 한 해에 모두 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코로나 확진의 온상처럼 되어 비난 받고…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한 해였습니다. 교회승합차가 나타나면 경계하는 분위기를 느낄 때 미안하기도 하지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고 속상한지….
예레미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당하고 있는 고통과 수치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15절, “우리의 마음에는 기쁨이 그쳤고…” 기쁨도 셧다운(shutdown)!
15절, “…우리의 춤은 변하여 슬픔이 되었사오며” 춤도 셧다운(shutdown)!
16절,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면류관도 셧다운(shutdown)!
17절, “…우리의 마음이 피곤하고” 마음도 셧다운(shutdown)!
17절, “…이러므로 우리 눈들이 어두우며” 눈도 셧다운(shutdown)!
18절, “시온 산이 황폐하여 여우가 그 안에서 노나이다”
거룩한 성읍이 셧다운(shutdown)! 예루살렘 성전의 기능이 셧다운(shutdown)된 것입니다. 성전은 그 자체가 기쁨이요 춤이요 면류관인데 이방인에게 함락되고 무너져서 수치와 모욕의 대상된 것입니다. 언약 백성에게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없습니다. 그러니 1장, 2장, 4장을 그 1절에 “슬프다”로 시작합니다.
4장 1절,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22절,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여 순금 항아리들이 질항아리 신세가 되었으니, 하나님의 진노가 너무 큰 것입니다. 그러니 애가서 곳곳마다 나오는 “슬프다!” “슬프다” 어찌 슬퍼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대한민국, 한국교회는 코로나 앞에서 원통하고 분하고 슬프고 통재라, 이런 상황입니다.
셧다운(shutdown)된 원인
그러나 선지자는 슬픔과 탄식으로만 밤을 지새우지 않습니다. 누구 탓으로만 돌리지 않습니다. 그는 셧다운의 원인을 찾아 나섭니다. 원인은,
16절, “우리의 머리에서는 면류관이 떨어졌사오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코로나 셧다운은 분명 원인이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이 불러온 자연재앙입니다. 전염병의 대부분은 동물에게서 옵니다. 동물과 조화롭게 살았다면 이런 전염병들이 창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국내적으로는 초기대응이 잘못된 것입니다. 중국을 무서워하지 말고 막았어야 했고 K방역을 지나치게 과신 말고 더 엄격하게 단계를 격상시켰다면 오늘의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그걸 몰라서 못한 것도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경기가 죽고 국민들 생활이 불편하기에 확진자 발생을 최소화하려다 보니 오늘 자칫 3단계 격상까지 가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여당은 야당 탓, 언론 탓, 교회 탓을 하고 야당은 여당 탓, 대통령 탓을 합니다. 오죽했으면 대학교수들이 올해의 사자성어를 ‘팬더믹’을 상징하는 '첩첩산중'을 4위로 제치고 '아시타비(내로남불)', '후안무치' '격화소양'을 1위 2위 3위로 선정하겠어요?
유대인들에게는 뛰어난 점이 있습니다. 국가 재난이 발생하면 그걸 항상 신학적 관점에서 풀어나갑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기에 이런 일을, 수치를 당한다 자인합니다.
16절, “…오호라 우리의 범죄 때문이니이다….
우리의 범죄…. 그건 누구의 죄, 누구 탓이 아니라 ‘우리의 범죄’, 곧 내 죄입니다. 우상숭배, 성전의 세속화, 율법을 무시, 선지자들의 경고를 무시… 지나치게 주변 강대국을 의지하는 불신앙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게 되었고 오늘의 참화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회개하지 않는 백성들을 대신하여 죄를 자백하고 울지 않는 백성을 대신하여 오호라~ 가슴을 치며 울고 있습니다. 원인을 제대로 진단한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회개기도입니다.
인간 고난에도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야곱, 요셉, 욥. 모두 지독한 고난을 당하지만 고난을 당하게 된 원인은 다릅니다.
야곱은 자기 죄와 기질 때문에 쫓고 쫓기는 스트레스 삶을 살았습니다. 욕심, 거짓, 교활, 경쟁심, 고집… 이런 것들로 험악한 세월을 보냅니다.
바른생활표 요셉은 자기 죄가 아니라 남의 죄 때문에 힘들었습니다. 아버지의 편애, 이론 인헌 형들의 시기, 여주인의 농간으로 인한 감옥행, 모두가 남의 탓으로 불행이 왔습니다.
욥의 고난은 내 탓, 남들 탓 아닙니다. 사단이 욥을 탐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사탄의 중상(中傷)모략의 부당함을 드러내기 위해 시험을 허용하셨고 욥은 영문도 모르고 고난당합니다.
우리가 고난의 길을 걷고 있다면 고난 자체만 보지 말고 어디서 고난이 오는가? 나의 삶이 왜 이처럼 힘든가?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기 시작한 곳을 찾아야 합니다.
야곱의 고난은 죄에서 왔기에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요셉의 고난은 타인의 죄로 왔기에 참고 있으면 오해와 누명이 풀리는 날이 옵니다. 욥의 고난은 사탄으로 왔기에 순금의 믿음으로 올라서면 고난은 사라지게 됩니다.
오늘 예루살렘의 고난은 불신앙과 불신행동이 원인입니다. 그래서 선지자는 범죄함을 용서해주시고 수치가 떠나가게 해 달라, 애가(哀歌)를 부릅니다. 한국교회가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셧다운(shutdown)에서 소망
예레미야 선지자는 자신들의 범죄를 자백하며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구합니다.
20절,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잊으시오며 우리를 이같이 오래 버리시나이까”
유대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잊어버리는 것! 오랫동안 버려두심을 가장 무서워합니다.
예수님도 십자가의 육체적 고난보다는 하나님께서 버리시는 상황을 피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둠이 짙었을 때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한 것입니다.
작가들도 그러잖아요? 진짜 무서운 것은 미움이 아니라 무관심, 아예 잊어버리는 것이라고!
선지자는 제발 잊지 말아 달라며 오랫동안 버려두지 마시라며 이렇게 간청합니다.
21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선지자의 간청은 두 가지입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게 하소서”
“옛적 같게 하옵소서”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금 하는 짓들로 보아 그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하나님 역시도 쉽게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22절 부정적인 말로 애가(哀歌)를 끝냅니다.
22절, “주께서 우리를 아주 버리셨사오며 우리에게 진노하심이 참으로 크시니이다”
이런 참상이 쉽게 끝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루살렘의 상황에 비통하고 애달픈 것입니다.
우리가 한 해를 마감하고 새해를 목전에 두면서도 사실 기대와 희망이 많지 않습니다. 내년에도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때마다 예배는 중단될 것입니다. 정치는 내년에도 우리에게 희망을 보여주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리도 답답한 것입니다!
결론
그러나 예레미야는 울고 탄식하면서 그렇게 부정적으로 끝맺음을 하고 말았지만 후대의 유대인들은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애가가 22절, 부정적인 내용으로 끝맺음하고 있기 때문에, 공적인 낭독시에는 22절을 읽은 다음 21절을 읽는 관례를 만들어 냈습니다.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
이 설교를 준비하는데 문득 모세의 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시편 90편 15절입니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너무 좋은 간구 아닙니까? 너무 희망적인 소원 아닙니까? 우리도 같은 소원을 품읍시다.
“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2020년 코로나로 많은 괴로움을 당했고 많은 화를 당했지만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해주실 2021년의 하나님을 기대합시다! 3단계가 나오더라도 믿음으로 잘 견디어 냅시다! 믿음을 지켜냅시다! 다른 것도 셧다운이 되어선 안 되지만 믿음만큼은 결코 셧다운이 되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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