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나는 이름들 사이에서
창세기 2:19~25
서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신도 업적도 사라지고 이름만 남는다, 그만큼 이름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좋은 이름을 가지려 하고 좋은 이름을 짓고자 합니다. 이를 체계적으로 연구한 것이 성명학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은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주팔자, 관상과 함께 후천적으로 주어지는 이름이 그 사람의 운세(運勢)를 결정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한다고 믿어왔기에 성명학이 발전한 것입니다.
현재는 이름이 대부분 한문이지만 조선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백성들 이름은 개똥이, 어진이… 등등 한글이름이고 한자 이름은 왕이나 귀족들이 중국 성씨와 결합해서 생겨난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름 짓기는 태초에 시작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모든 생물의 이름을 만들어주라 하셨는데 아담은 여러 이름들 중에 아내의 이름을 가장 멋지게 지어주었습니다.
23절, “…여자라 부르리라”
‘여자’는, 남자에게서 유래된 존재라는 뜻으로, 짐승과는 달리 아담과 동급이라는 의미입니다. 여자를 자신과 같은 존재로 대우한 것입니다. 불순종 이후에는 더 구체적인 이름을 줍니다.
3:20,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라 불렀으니…”
이렇게 좋았던 인연이 선악과를 따 먹게 함으로 부부간에 균열이 생깁니다. 아담은 하나님에게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창3:12)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먹었다고 합니다. 23절의 여자와는 뉘앙스가 다른 ‘여자’입니다. 그 여편네라는 뜻이지요. 하나님께서 왜 이런 인연을 나에게 주셨냐는 것입니다. 이 여자 때문에 내가 망하게 되었으니 악연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한 인류 구원을 예고했을 때 아담은 그 여자가 세상에 생명들을 퍼트리고 그 생명에서 구세주가 오신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내의 이름을 개명합니다. 하와. 아래의 주(注)를 보니 ‘생명’입니다. 세상에 생명을 공급하는 존재, 여자의 후손을 염두에 두고 작명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담은 상당한 지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인간은 처음부터 원시인이 아니라 고등동물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이름들을 만납니다. 이름들이 붙은 나무숲을 거니는 것처럼 우리가 알게 되고 만나는 사람들의 이름은 수천수만 개입니다. 물론 다 기억하는 것은 아닙니다. 고마운 이름, 미운 이름, 평생 갚아야 할 은인의 이름, 도무지 용서할 수 없는 이름도 있습니다.
그런데 잠언 16장에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3절)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라는 묘한 말을 남깁니다.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한 때에 쓰일 용도가 있다! 그렇다면 나를 힘들게 했던 이름들, 내 인생을 망쳐버린 이름들도 어느 정도는 필요했기에 내게 보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남는 이름들을 보면 내 인생도 보입니다. 그런 사실들을 다윗의 일생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다윗의 일생에는 평생 잊지 못할 네 명의 이름이 있습니다.
골리앗. 이스라엘의 숙적 블레셋 장수입니다.
키는 약 283cm 정도, 글레드웰은 210cm, 갑옷 무게가 약 57.5kg, 창날이 약 7kg. 인간 백치이자 인간 병기입니다. 블레셋 골리앗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베들레헴 능선을 확보해서 사울왕국을 동강내려 합니다. 이스라엘도 사울과 병사들에게도 다윗에게도 골리앗은 위기였고 상황입니다. 다윗은 여호와를 의지하고 나갑니다.
골리앗은 그의 신들 이름으로 저주합니다(삼상17:43). 악담 퍼붓는 것이지요! 골리앗이 이름으로 위협하자 다윗도 이름으로 맞섭니다. 골리앗은 신들의 이름,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입니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삼상17:45)
다윗은 여호와의 이름을 두 번이나 반복합니다. 너는 너희 신들의 이름으로 나오느냐, 나도 내 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간다! 이름 대 이름, 신들 대 신들의 이름으로 나선 겁니다. 너하고 나하고 싸우지 말고 신들끼리 싸우자는 것입니다.
골리앗과의 전투에서 사울은 그 전쟁을 인간의 대결구도로만 보았습니다. 무기의 힘, 전략의 힘, 강한 용사… 여러 요인들을 보니 골리앗의 상대가 되지 못해 막사에서 부들부들 떨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려 할 때도 자기의 갑옷을 입혀주고 무기를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을 용사와 용사, 무기와 무기의 전투로만 단순하게 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이 전쟁을 신학적인 문제로 봅니다. 전쟁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합니다. 전쟁을 실력의 문제, 무기나 전략의 문제로 보았던 사울 왕은 패했지만 신학적 문제로 접근한 다윗은 승리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이긴 것입니다.
다윗은 그 길로 나라의 영웅이 됩니다. 골리앗이라는 이름이 사울과 군대에는 공포의 이름이었지만 다윗에게는 영웅으로 만들어준 그가 죽인 이름입니다. 다윗은 골리앗을 죽인 것만 아니라 골리앗의 신들을 이긴 것입니다. 그러니 다윗은 평생 골리앗이라는 이름을 잊을 수가 없지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한 이름이요 그를 영웅으로 만들어 준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사울.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받을 만큼 특출한 사람입니다.
외모가 뛰어났고 용기와 애국심, 초창기에는 겸손과 진지한 애정… 등 지도자의 모든 자질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보다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죄가 그의 시기심을 자극하고 다윗과의 경쟁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사울에게 다윗은 엄청 고마운 대상입니다. 골리앗을 물리쳐 사울과 국가도 구해준 것입니다. 사위도 되었습니다. 요나단 왕자와도 친형제 이상으로 잘 지냈습니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러나 시기심이 인간관계를 망쳐버렸습니다. 사울에게 성신이 떠나고 악신이 들어왔습니다. 다윗에게 보여준 모습은 얼마나 비열하며 초라한지, 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다윗이 파멸되기를 원했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비상식적인 일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사울 때문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망명생활을 했습니다. 그에게는 악연과 같은 이름입니다. 그를 만나지만 않았어도 다윗의 생애는 평탄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이름을 만나는 순간, 다윗의 인생은 파란만장이라는 대문 안으로 들어선 것입니다. 차라리 골리앗은 원수였지만 그의 목숨을 앗아가려 했던 위협적인 이름이었지만 다윗의 이름을 전국중앙무대에 데뷔하게 만든 이름입니다.
그러나 사울이라는 이름은 그의 자존심을 밟아버렸고 85명의 제사장들을 죽임으로 다윗에게 평생에 짐이 되게 합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다윗의 부모와 형제들까지 유랑생활을 하게 만듭니다. 사울 때문에 얼마나 많이 울었고 광야에서 도망 다녀야 했는지… 블레셋 진중에까지 들어가 미친 사람의 흉내를 내면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사울 ‘사’자만 들어도 자다가도 경기가 일어날 만큼 악연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지나놓고 보니 다윗의 영성은 사울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사울이 두려워 기도하게 되고 하나님에게 울부짖으며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습니다. 그리고 성신이 떠나가고 악신이 들어왔을 때 얼마나 사람이 악해질 수 있는가, 시기심과 질투심이 얼마나 사람을 초라하게 만드는 것인가, 그걸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사울에게서 배운 것입니다.
이처럼 사울이라는 이름은 다윗에게 ‘저렇게 살아야겠구나’, 를 배우지 않고 ‘저렇게 살면 안 되는 것이구나’를 배우게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사울도 다윗에게는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악인도 ‘그 쓰임에 적당하게 지으셨’다는 말이 딱 맞는 것입니다.
밧세바. 골리앗과 함께 다윗에게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입니다.
험상궂은 골리앗의 이름에서는 패배를,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라는 이름은 늘 기쁨과 행복이 되어야 하는데 반대입니다. 골리앗과 밧세바는 두 사람의 인상과는 달리 원수요 험악한 골리앗은 다윗에게 영성과 승리를,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는 오히려 다윗의 영성을 파괴시켰으며 실패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밧세바와의 악행을 나단에게 지적당했을 때 다윗이 한 일은 죄를 자백하며 흐느낀 것입니다.
“나를 인자히 여기소서! 죄를 도말하소서! 말갛게 씻기소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소서! 깨끗이 하소서! 정결케 하소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새롭게 하소서! 건지소서! 내 입술을 열어주소서!”
다윗은 죄를 자백합니다. 죄의 청산을 위해서 우슬초로 나를 정결케 하소서! 호소합니다. 눈, 상상, 생각, 의지, 양심뿐만 아니라 그의 모든 오관이 피로 정결케 되어지기를 호소합니다. 그것이 평생 계속되었습니다. 밧세바의 이름은 두고두고 그에게 사랑스런 이름이었지만 수치스런 이름이고 그 이름을 평생 가슴에 달면서 회개의 자리로 나갔습니다.
그 결과, 성군 다윗으로 만들어 준 것은 놀랍게도 골리앗이 아니라 수치와 고통을 안겨주었던 밧세바입니다. 만약에 다윗에게 계속 승리가 있고 죄의 수치가 없었다면 영웅은 되어도 성군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밧세바는 수치와 실패의 명찰이 되었지만 가슴팍에 새겨진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니던 밧세바라는 이름 때문에 다윗은 성군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우리를 성스럽게 하고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빛나는 승리가 아니라 부끄러운 실패와 숨기고 싶은 과거, 그 사실을 뼈아프게 생각하며 괴로워하며 죄를 밀어내고자 하는 몸부림이 우리를 성자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입니다. 소크라테스를 성자로 만든 것은 그의 악처라는 말처럼 오히려 우리를 성스러운 삶의 자리로 만들어 가는 것은 나를 괴롭히고 가슴 아프게 하고 실패하게 만드는 바로 그 이름 때문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이름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욱 매달렸고 그 이름이 억울해서 하나님께 나아갔습니다. 그 이름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고 그 이름 때문에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이만큼이라도 된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인생에서 만나는 버거운 사람들로 무너지지 않고 오히려 더 빛났던 것은 사무엘이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사무엘은 선지학교를 운영할 만큼 말씀중심이고 기도를 쉬는 것을 죄의 개념으로 이해했던 기도의 사람입니다. 사무엘에게서 말씀을 배웠기에 사울을 용서했고 사무엘에게서 기도를 배웠기에 죄중에서 참회로 나갔습니다. 그래서 성웅이 된 것입니다.
결론
교우 여러분, 내게 영향을 끼친 이름들, 나를 힘들게 했던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 가시 이름들로 힘들고 괴로웠지만 내가 만난 모든 이름들은 나름대로 우리를 이롭게, 성숙하게 합니다.
골리앗의 위기는 다윗을 영웅으로 만들었습니다. 위기의 이름은 우리를 빛나게 할 것입니다.사울이라는 이름은 우리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는 이름입니다.
사울의 이름은 다윗에게 광야의 영성을 만들어 냈습니다. 사울이라는 가시들로 우리도 광야의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밧세바라는 수치스런 이름들, 수치스런 날들이 있습니까? 그것은 주홍글씨가 되어 다윗의 영혼을 맑게 해줍니다. 동일하게 그런 이름들이 우리를 겸손하게 하며 성화를 도울 것입니다.
모든 이름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셨고 만나게 해주신 이름들입니다. 그만큼 우리가 만나는 이름들은 모두 소중하고 모든 이름들이 내게는 나름대로 스승이 되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 교인들은 죽어서 무엇을 남길까요? 간증을 남깁니다. 내 주변의 이름들은 나의 간증을 위해 나에게 보내주신 소중한 이름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를 구원해 주신 이름이요 지금도 위로하시고 용기를 주시고 성화로 이끌어 가는 참 좋은 이름입니다. 세상을 이긴 예수! 그 이름을 앞세우고 올해도 많은 간증을 만들어 내는, '이기는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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