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과 저주의 산
신명기 11장 26-32절
서론
한국인들은 유독히 복을 좋아합니다. 집안 구석구석에 온통 복(福)으로 도배질을 합니다. 결혼 혼수감에도 복, 베개에도 복(福), 심지어는 수저에도 복(福)을 적어둡니다.
새해가 되면 복을 받으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한국인들은 늘 복에 굶주려왔습니다. 자신을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많지 못합니다.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초가 되면 축복 대성회를 열고 복을 받기 위해 애를 씁니다. 복을 받기 위해 금식을 합니다. 아주 결사적입니다. 그런데도 늘 행복하지 못합니다.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비유해보면 어떨까요? 내가 어떤 사람을 사모하여 그를 좇아다닙니다. 그 사람을 위하여 음악회 입장권을 사고 꽃을 선물하고…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는 데도 그 사람은 자꾸 나에게서 멀어지고 달아납니다.
이런 경우, 우리들은 계속 좇아 다닐 것이 아니라 왜 그러는지 왜 그 여자가 나에게서 달아나는 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지 무턱대고 짝사랑으로 괴로워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복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을 사모한다고 해서, 복을 받기 위해서 애쓴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닙니다. 복이 우리에게 머물도록 우리가 생각을 바꾸고 복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복을 소원하나, 복은 오지 않는다? 어디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왔을까요?
1. 복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복의 개념을 환경이나 물질에 둡니다. 그래서 그것이 없으면 불행하고 있으면 행복한 것으로 압니다. 이런 개념대로라면 돈이 없으면 불행한 사람이요, 돈이 많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좋은 자리로 올라서면 그만큼 행복하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 불행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자녀들이 없는 사람은 무조건 불행하고 많으면 행복한 줄로 압니다. 이것은 마치 소형자동차보다는 중형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더 복되고, 중형보다는 고급차,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더 행복한 것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월세, 전세, 20평, 50평… 순으로 행복을 논하려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복은 환경이 아닙니다. 어떤 자리가 아닙니다. 성경의 복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의 어떤 상태, 마음가짐을 말합니다. 즉 그 개인이 복을 가지고 있어야지 아무리 주변환경이 좋아도 마음의 상태가 편치 못하면 행복하지 못합니다. 우리 자신이 늘 즐거운 생각, 행복한 생각을 갖고 있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항상 기쁘고 복된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희랍 시실리아섬의 도시국가 시라쿠사에 레이오니스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디모크레스라는 충성된 신하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왕이 그 신하의 소원을 물었습니다. 그러자 왕좌에 하루만 앉아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왕은 신하에게 그 소원을 허락하였습니다. 신하는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점심상을 대하다가 우연히 천장을 쳐다보는 순간 그는 까무러칠 듯 놀랐습니다. 천장에 칼이 가느다란 실 가닥 한 올로 매달려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서 하루해가 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자기 집에 있는 하인이 더 부러웠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왕이 변장하여 행복한 사람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 사람의 속옷을 입으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노래하는 물방앗간 주인을 찾아냈습니다. 너무 행복하게 여겨 속옷을 달라고 했더니 `속옷이 무슨 소용이 있겠나? 나는 속옷도 없소'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인가에 있습니다.
시편 1편은 복의 장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복 받는 사람은", 이 아닙니다.
복 있는 사람-이것은 환경이 복된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 복이 머무는 사람은 어떤 환경, 어떤 처지하에서도 늘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복음으로 새로워집니다. 행복의 기준이 전혀 다른 곳에 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족합니다. 이런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자이며 복된 자입니다.
그러나 사람 자체가 행복을 느끼지 못하면 아무리 좋은 환경이 와도 행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들은 외부에서 오는 복을 평생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들 속에 복이 깃들게 하고 그 복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행복할 수 있습니다.
2. 복된 줄에 서야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함께 놓아둡니다. 그리심산(山)에서는 복을 선포하고 에발산(山)에서는 저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심산은 행복의 산이요, 에발산은 저주의 산입니다.
그리심산에 있는 자들은 항상 축복을 받을 것이고, 그만큼 행복합니다. 그리심산에 있다는 그 자체가 행복합니다.
인도네시아 중부에 위치하고 있는 발리섬이 있습니다. 인구는 약 2백 만명입니다. 그 섬은 행복 체감도가 세상에서 가장 우수한 섬입니다. 이곳은 공장도 없고 수익성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발리섬 사람들은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발리섬에 산다"고 확신합니다. 그만큼 그들은 행복합니다.
그러나 에발산은 저주의 산입니다. 그곳에서 저주가 나옵니다. 에발산을 들락거리는 사람들은 불행한 삶을 살 것입니다.
시편기자는 복 있는 사람은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어떤 길, 어떤 라인에 섰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나님 편에 서 있는 자들은 실패 중에서도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은 승리 중에서도 불행할 뿐입니다.
야곱과 요셉의 일생을 비교해 볼 때 더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곱은 잘못된 라인에 서 있었기에 많은 것을 얻고 있으면서도 늘 쫓기는 삶이었고 불행했던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으로는 많은 것들을 누렸던 사람입니다. 객지 생활 20여 년에 얻을 것은 다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삶을 험악한 세월, 즉 파란만장한 삶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야망은 다 이루었지만 행복은 얻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늘상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차라리 세상의 것들을 얻지 못했어도 행복을 선택했어야 하는 데 그는 야망을 꿈꾸는 사람들이 걸리기 쉬운 덫에 걸려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아들 요셉은 늘 역경의 바다를 건넜지만 형통했습니다. 바른 라인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배신을 당했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썼습니다. 감옥에서는 은혜를 입힌 사람에게 또 다시 배신을 당했습니다. 인간적으로 그는 항상 불행이 따라다녔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편에 섰습니다. 그는 늘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리심 산에 선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삶은 늘 형통했습니다. 바른 라인에 섰기에 환경과 처지에 관계없이 행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복을 지나치게 구하지 마십시오. 그냥 하나님 라인에 서십시오. 그러면 우리들은 복 있는 자들이 되고 복은 복 있는 자들에게 굴러오게 되어있으니 세상의 복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복을 나눠주는 자들이 되십시오.
우리가 복을 받으면서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그 복을 감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 복들이 남들에게 흘러 버릴까봐 마음 졸이기에 오히려 더 복이 없고 그 복을 누리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은 구조적으로 행복하지 못하는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젊은 연인들끼리 "자기 행복해?"라고 말합니다. 우리들은 그런 말을 들으면 저항감을 느낍니다.
"자기"라는 말도 그렇지만 `행복해?'의 그 행복이란 어휘가 낯설기 때문입니다.
전통적 한국사회에서 행복이란 단어는 대화에는 쓰이는 법이 거의 없습니다.
행복이란 단어는 최소한 부덕시했거나 금기시했으며 시가나 편지에는 사용했어도 일상 속에서는 죽은 단어였습니다.
그것은 행복의 개념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너무 행복을 나타내면 삼신할미가 질투해서 재를 뿌려 버릴까봐 사용을 절제했던 것입니다.
이에 비해 서양 사람들은 행복이란 말을 꽤 자주 씁니다.
안네 프랑크는 그 유명한 일기에서, 다락방에 사는 극한 상황 속에서도 가족들에게 "앰 아이 해피?"하면서 꾸준히 행복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폭풍의 언덕>에서도 여주인공 캐시는 히스크리프의 품에 안겨 죽어가면서 "아엠 해피"라고 합니다.
행복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늘상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복을 찾아 떠나지 않아도 자신들 속에서 행복을 발견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행복을 확인하며 사는 일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해주는 일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 행복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있는 복을 여려 사람들에게 나눠주려고 할 때 오히려 새 복이 고이고 그 복을 받는 사람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면 더욱 우리 마음에 복이 스며들어와 이중 삼중으로 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독차지하려고 할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들과 나누려 할 때에 하나님은 더 많은 것들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그리심산에는 복이 무한정있습니다. 우리가 복을 나눠주었다 하여, 하나님의 복 주머니가 고갈되는 일은 없습니다. 더 많은 것을 나눠주고 더 많은 것을 받는 복의 사람들로 살아야합니다.
결론
미국의 여류학자가 행복한 사람들을 인터뷰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한가?
1. 자신의 삶의 의미와 방향이 뚜렷한 사람.
2. 자기 인생에 대한 실망이 적은 사람.
3. 누군가를 사랑하는 사람.
4. 친구가 많은 사람.
5. 발랄한 사람.
6. 나에 대한 비평에 신경 쓰지 않은 사람.
7. 큰 두려움이 없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금년 한 해, 참된 복을 찾아 살아가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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