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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달란트를 활용하자(마태복음 25:14-21)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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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란트를 활용하자

마태복음 25:14-21

서론

본문의 말씀은 모두가 잘 아는 내용입니다. 잘 안다는 것이 때로는 방심하기가 쉽습니다. 아는 내용은 항상 삶에 실천으로 나타나야 하는 데 아는 것만큼 그냥 살아가고 있다고 느껴지기에 성경을 잘 아는 이들이 오히려 실천력이 약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1. 불공평 속에 공평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그 재능대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음을 봅니다. 각각의 재능은 모두가 꼭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꼭 같다면 세상은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너도나도 꼭 같은 일을 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고 누군가는 유권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세상이 됩니다. 얼른 보면 하나님은 불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누구는 정말 좋은 집에 태어나서 좋은 교육을 받고 사랑을 받으며 살아갑니다.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건강하게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참으로 사람을 불공평하게 만드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각각의 재능대로 맡겼지만 찾으실 때도 그 재능대로,  맡긴 것만큼 찾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우리들은 한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성실이고 충성입니다. 하나님은 결과를 찾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놓치기에 기독교적인 윤리관, 세계관이 없습니다. 내가 꼭 성공해야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으로 압니다.

*그래서 잘못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잘못된 교회 부흥이 나타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러니 세상이 교회에 대해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기독교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출세지향적인 기독교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을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내가 성공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올라가겠습니까? 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는 것이 뭐 대단하겠습니까?  이것이 말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한 인본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이 결국은 부끄러운 기독교를 만들어 버렸습니다.

 

여기 주인을 보십시오. 주인은 엄청난 재벌입니다. 종들이 벌어다 주는 몇 푼의 돈으로 자기의 부(富)를 더 증대시키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이미 큰 부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인은 종들에게 돈을 원한 것은 아닙니다. 주인에 대한 변함없는 충성과 헌신을 원한 것입니다. 돈의 액수가 아니라 주인이 있으나 없으나 열심하고 충성하고 감사하는 그 마음을 원했던 것입니다.

 

한국사회는 너무 업적위주가 되어있습니다. 당대에 수고도 하고 영광도 누려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졸속행정이 있고, 사고가 터집니다.

이스라엘은 나무로 만든 다리도 천년 이상을 간다고 하는데 우리 나라는 어찌 십 수년도 제대로 못되어 붕괴되고 다시 뜯어고치고… 이런 일들이 있습니까? 모두 업적위주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이와 같은 업적위주가 교회 안에도 들어와 있습니다. 교회가 크면 하나님의 영광이 올라간다고 생각합니다. 충현교회를 보고 그 교회 크다고 탄복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것 때문에 전도가 되어 나오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삶입니다. 예배당이 아니라 그 예배당 안에 있는 사람들의 정결한 신앙심입니다. 이런것들이 없는 채 교회당 짓기에 급급하다면 한국교회는 2백년도 못가서 망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여러분들의 재능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그 분은 그 재능으로 얼마나 성실하게 그분 앞에서 살려고 하는 지 그것을 원하십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모습을 그분은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 분은 성실을 원하십니다. 

2. 주인에 대한 신뢰가 달랐습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있습니다.

한 달란트는 대략 3억원 정도됩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이 맡은 것입니까? 15억, 6억 정도를 맡은 것이 아닙니까? 그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었습니다. 주인의 신뢰를 읽었습니다.

 

주인은 지금 타국으로 갑니다. 언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두 사람이 그 많은 돈을 떼어먹어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을 믿고 그 엄청난 액수를 맡겨준 것입니다.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들은 그 돈보다 더 큰 주인의 마음, 주인의 사랑을 읽었습니다.

 

그것은 자신들을 위한 달란트가 아니었습니다. 주인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신들을 신뢰하고 엄청난 금액을 맡겨주신 주인의 신뢰에 감사하여 그 즉시로 나가서 열심히 장사를 했습니다.

그냥 돈놀이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장사를 했습니다. 돈이 많으면 일도 많습니다. 그것들은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힘들다고 짜증부릴 사람은 바로 그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인과 바른 관계, 주인을 존경하고 주인의 것을 잘 되게 해 드려야겠다는 선한 마음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히 하나님의 것, 청지기 의식이 강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녀들도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랍비가 강론을 하고 있는 그 순간에 랍비의 두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랍비의 부인은 죽은 두 아들을 이층 침상 위에 눕혀 놓고 남편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립니다. 남편이 돌아왔을 때 부인은 이렇게 묻습니다.

"누가 나에게 보석을 맡기고 갔다가 이제 다시 돌려달란다. 어쩌면 좋겠는가?"

랍비는 쉽게 대답을 했습니다.

"제 주인에게 돌려주어야지"

그때 부인이 다시 묻습니다.

"하나님께서 두 아들을 돌려달라고 오셨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자녀관입니다. 그들은 자녀들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맡겨주신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뜻대로 키웁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성공과 출세는 무엇인가요? 바로 유대인을 지켜나가고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에게 있어서는 최고의 영광이요, 충성입니다.

 

이런 마음들이 있기에 그들은 유명한 사람이 되어도 조국을 버리지 않고 부모들의 믿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그 자체가 그 어떤 성공보다도 우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은 어떻습니까? 성공하면 부모 알기를 우습게 알고 거추장스러워합니다. 왜 성공해야 하는가 그 목표가 없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목표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의 성공은 더 많은 것에 헌신하고 싶은 데 부모들은 이미 그들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니 그들은 방황하고 여기에 갈등이 생기고 세대차가 생기는 것입니다.

 

한국교회, 우리들은 주인의 마음을 읽는 일에 실패하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 역시도 우리에게 있는 것들을 달란트로, 그리고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달란트로 인정은 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어떤 일에 기뻐하시는가 그것을 생각못합니다.

 

우리 주인께서 원하시는 것은 단순히 달란트가 아닙니다. 달란트보다 그 달란트를 간직하고 있는 그 사람을 원하십니다. 그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어떤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가, 그것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모르니 `적극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마치 성경인 양 둔갑하고 있습니다.

 

적극적 사고방식은 무엇을 말합니까? 그것은 능력을 계발하는 것입니다. 적극적으로 능력을 계발하여 성공하라는 것입니다. 능력계발에 있어서는 과정이 생략됩니다.

그러다보니 무조건 성공, 무조건 부흥, 믿는자들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느니라....  이것 때문에 오늘 한국교회가 겁데기만 남아있는, 마치 두 눈 뽑힌 삼손의 모습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여기 한 달란트 받은 사람도 봅시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 대한 불신이 가득했습니다. 자기에게 작게 맡겼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자기를 우습게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뭘로 보았지? 장기판의 졸로 보았나?"

작게 맡긴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재능으로 보았습니다.

 

이 사람은 장사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것으로 제 주인을 얼마든지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재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장사할 타입은 아니었기에 한 달란트 맡겨주고 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종은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단지 주인이 자신을 무시한 것으로 압니다. 재능으로 보지 않고 신뢰의 문제로, 인격의 문제로 잘못 생각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 달란트도 작은 액수입니까? 3억이면 작은것입니까? 그는 액수를 본 것이 아니라 너무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경쟁의식을 가진 것입니다.

 

종은 제 주인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맡겨진 재능으로 전혀 수고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재산을 불리기 위해 나름대로 수고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일이었고 상이 될 것도 아니었습니다.

우리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처해있는 이런 현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각각의 재능이 달라야 함을 우리들은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에서도 어느 일이나 잘 감당할 수 있습니다.          

3. 주인에게 각각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주인이 돌아왔습니다. 주인은 셈하자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셈하자는 날이옵니다. 그 날이 가까운 분들도 있을것입니다. 아직도 셈할 기간이 오래 남아있는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저신의 인생을 셈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생은 플러스 인생입니까, 아니면 마이너스 인생입니까?

 

"사람에게 한 번 죽는것은 정해진 것이요. 그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성경의 말씀입니다.

항상 심판이 있음을, 셈하자는 날이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죽음 앞에서 당황해 하며 후회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음의 길을 걸어갔는데 왜 세삼스런 일이라도 되는양 절절 맵니까?    

 

종들도 셈하자는 주인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두 사람은 이윤을 배로 남겼기에 그만큼 좋은 대접을 받았습니다. 주인에게 여러 모양의 보너스를 받았습니다. 주인은 수고를 알아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인은 무정하고 인색한 사람이 아닙니다. 수고한 것에 대해서는 그만큼 보상해 주었습니다.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늘빛가족 모든 분들에게 많은 것을 주시기를 늘 소원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위해 목회자는 있습니다. 그 일을 위해 목회자는 말씀을 증거하며 모든 어려움을 참아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다른 사람들의  풍성한 결산을 도와주는 일을 합니다.

 

여기 또 한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인색한 사람으로 알았습니다. 그리고 주인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실패할까봐 땅에 묻어두었습니다. 그 종은 주인을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주인은 인색한 사람, 즉 무정한 사람으로 보앗습니다. 그러니 달란트를 활용하여 이윤을 남긴다는 것은 생각도 못햇습니다. 잘못되어 야단맞을가 걱정한 것입니다. 그는 실패도 하지 않고 활용도 하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보관이 아니라 활용을 원한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을 잘못 읽었던 것입니다.

 

우리 중에도 두려움으로 달란트를 사용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사업이 망할까봐, 주일성수하지 않으면 벌 받을까봐 억지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 일을 해도 억지로 합니다. 마지못해서. 매를 맞을까봐. 그런 이들이 무슨 기쁨이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감격이 있습니까? 이런 이들이 달란트를 땅에 묻어놓은 것입니다. 

당신의 달란트도 땅에 썩혀있는 것은 아닙니까?     

결론

이 말씀은 비유 속에서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말씀하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비유의 말씀입니다.

주인이 돌아온 것처럼 우리 주님도 오십니다.

그분은 셈하러 오십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은 자들을 가려내실 것입니다.

달란트를 활용한 자와 땅에 묻어둔 자를 가려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많이 맡긴 자들에게는 보너스를 주실 것입니다. 셈을 했는 데도 남은 것이 없는 사람은 부끄러운 흔적을 남기고 갈 것입니다.

 

"나무는 쓰러 뜨려보아야 그 크기를 알 수 있듯이 사람도 누운 후에야 그의 크기를 알 수 있다"(미국의 시인 칼 샌드버그)

 

당신의 달란트는 잘 활용되고 있습니까, 아니면 보관 중입니까? 그러는 사이에 우리의 인생은 늙어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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