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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새로운 피조물이다!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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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운 피조물이다!

고린도후서 5:16-19

서론

대한민국에 여러 정권들이 들어섰지만 대부분 실패했습니다. 개혁을 어설프게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수십 년 동안 누적되었던 부정과 부패를 5년 정권이 완전히 새로운 나라로 돌려놓으라는 것도 지나친 것이지만 사람이 변하지 않은 상태에서 제도개혁으로 개혁을 하려고 했던 대통령들의 자만심도 잘못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가를 구성하고 있는 것은 국민들 자신인데 우리는 변하지 않고 국가만 변하라고 하니, 개혁의 실패를 한 두 사람의 지도자에게만 전가하는 것은 교회의 침체를 목회자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과 같습니다.

 

영국의 수상 처칠이 과속에 걸렸습니다.

"이봐, 내가 누군줄 아나? 그냥 보내주게"

"얼굴을 수상과 비슷한 데 법을 어기는 것은 수상과 같지 않습니다"

그게 기특하여 경시총감을 불러 1계급 특진 명령.

"우리 나라 법에는 과속 차랑을 적발했다고 특진시키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개혁하려면 제도나 여러 법들이 개혁되어야 하지만 사람들이 개혁, 개조되어야 합니다. 군사정권에 길들여 있었던 사고와 정신을 문민정부에 맞게, 민주시민다운 소양들로 거듭나야 됩니다. 그래야 다음에 어느 대통령이 나오더라도 우리나라가 제대로 나라의 틀을 잡아가고 지금 실패했다 거니 틀렸다 거니 하는 것도 다시 성공적인 개혁으로 일어날 수 있습니다.

 

비록 갑신정변의 개혁파들의 노력은 무위로 끝났지만 그 자체가 불꽃이 되어 한국의 근대화가 앞당겨졌던 것처럼 지금의 문민정부는 개혁을 시작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그 의미를 부여해야지 당장 눈앞에 보이는 개혁만을 하려고 할 때 업적주의가 나타나고 인기에 치중하는 정책으로 일관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얼마남지 않은 문민정부가 주는 교훈은, 개혁은 국민들 스스로가 해야한다, 국민들이 변하지 않으면 국가도 변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1. 믿음도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고 세례를 받을 때는 나름대로의 기대가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이제 신앙으로 나의 삶을 다시 시작해 보리라,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 신앙 안에서 의미를 찾아보리라, 등등의 결심을 하고 희망을 갖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만하면 상당한 수준에 올라가야 합니다. 성자는 못되더라도 성자 발바닥이라도 따라가야 하는 데 항상 신앙의 지진아들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도인들이 왜 신앙생활에서 실패합니까? 셍활의 곤란함 때문인가요, 아니면 박해 때문인가요? 그것도 아니라면 바빠서 그런 것일까요? 그것보다는 믿음의 첫 길을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시작하면서 너무 태도나 행동에만 집착합니다.

`나는 담배를 끊어야겠다'

`교회를 다녀서 착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어떤 이들은 그보다 더 절박한 심정으로

`복을 받아야겠다'

`병을 고침받아야겠다' 라며 매달립니다.

이것이 잘못입니다.

 

신앙의 근본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잘못된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결심을 하고… 신앙은 이것보다 한 수 위로부터 출발을 해야 합니다.  

새 피조물, 재창조된 심정으로 시작을 해야하는 데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관 위에 고스란히 믿음의 집을 쌓아놓았기에 우리의 신앙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교회는 3백년 동안 복음을 간직해왔고 그것때문에 무수한 박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주후 323년 경,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승인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들은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중생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 위에 기독교의 옷을 또 하나 입었을 뿐입니다.

그 결과 로마 가톨릭이라는 종합종교가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의 종교행사는 경건하게 보이고 요란하지만 그러나 그것이 기독교는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 역시 잘못된 바탕 위에 지어져 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신앙의 본질을 놓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신앙과 신앙생활은 다릅니다. 신앙은 무엇인가, 어떤 대상을 믿는 것입니다. 그가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에게 남은 생과 내세까지 맡겨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이 하신 일을 믿는 것입니다. 그분은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분이 하신 일을 믿으며 그분을 의지하는 자들은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처럼 어이없는 일이 없습니다. 너무 우습고 싱겁고 사람의 이성에 도무지 불합리합니다. 그러기에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기독교신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은 무엇인가? 이런 신앙생활에 걸맞는 삶이요, 행동이요, 태도이요, 습관입니다.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에 나오는 일이요, 봉사하는 일을 말합니다.

 

우리의 좋은 습관들이 신앙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윤리요, 도덕인 것입니다.

바로 교회 안에서 우리는 도덕을 배우고 있고 도덕적인 생활에 주력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에게서 도덕적인 삶만을 보고, 기대에 어긋났을 때 우리는 실망하고 비난하게 됩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면 어떤 실수에 대해서만 그 사람을 나무랄 뿐이지 그 사람 자체를 불신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 우리도 늘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으니까요. 

 

교회는 병원과 같다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병원의 환자들이 소독 냄새가 난다고, 대소변을 제대로 가리지 못한다고, 옷매무새가 바르지 못한다고 병원을 그만 두겠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있습니까? 교회를 윤리 교습소로 알기 때문입니다.

2. 새로운 피조물임을 알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17절,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은 새로운 창조물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창조(創造)라는 `크리에이션'은, 세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1) 무(無)에서의 유(有)를 창조.

전혀 없던 상태에서 무엇을 있게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창조가 아니라 있는 것을 이용하여 만든 것입니다. 하늘과 땅과 별,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무에서 유의 창조입니다.

 

2) 무기체(無機體)에서 유기체(有機體)로의 변화.

무기체는 흙이나 돌로 생명이 없습니다. 생각이 없고 성장이 없습니다. 돌이나 바위는 수백년이 지나도 무기체이기에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유기체인 생명은 신비로운 것으로 성장하고 자율적으로 번창해 갑니다.

 

3) 인격(영)적인 변화입니다.

사람은 복합체로서 육신은 흙으로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넣어주시니 그 흙덩이가 변하여 영이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육신은 썩어가지만 그 속에는 있는 속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 오기에 날로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은 메이크(make)가 아닙니다. 메이크는 있는 것에 다른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의 본질을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이런 것으로 압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입니다. 신앙 자체가 아닙니다.

 

우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고, 인격의 변화 없이 겉만 자꾸 포장하려고 합니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신앙의 경력은 쌓아 가는데 인격의 경력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신앙생활은 술과 담배를 끊고 교회에 나왔다는 것으로 만족해선 안 됩니다. 이런 개혁은 눈에 보이는 개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 속에 게신 그리스도가 점차 영향력을 넓혀 가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내가 새 사람이 되겠다는 것은, 그래서 내 힘으로 이런 저런 도덕적인 수양을 쌓으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의 주체는 내가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무엇인가요?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 안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조종하기 시작합니다. 그분을 통하여 나의 삶이, 인격이 교정됩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완전히 새로운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이나마이트가 아니라 다이나믹성 변화입니다.

3. 그리스도를 바로 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믿음과 열심은 조상들보다도 지나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신앙생활은 실패입니다.

16절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 대로 알았으나"

그의 신앙생활은 그리스도를 육체 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육체로 알았기에 예수를 유대교 이단자로 이해했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훼방시키는 거짓 무리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길인 줄 알았지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일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의 잘못이 어디에서 왔는가,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육체 대로 압니다. 그분은 2천 년전에 사셨던 분이십니다. 이천년 전에 병든 자를 고치시고 나그네된 자들을 위로하시며 상처받은 심령들을 고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이제 죽으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은 본받아 살려고 합니다. 그분을 하나의 표본으로 삼아 선한 행동을 쌓고 예절을 익힙니다.

 

어떤 필요에 의해 2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옵니다. 그분과의 교통은 2천년 전에나 하고 끝납니다.

인도 독립의 아버지 간디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에게 심취했습니다. 너무도 영국인들에게 당했기에 예수장이는 싫어도 예수는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비폭력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평생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조국이 독립될 때까지는 등을 바닥에 대지 않겠다고 했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의 원수들조차도 그의 인격에는 감화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인격은 `크리에이트'가 아닙니다. 그의 인격은 단지 모방하는 `메이크'일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신 것이 아니라 모방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의 생명은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는 새 사람은 되었어도 새로운 피조물은 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육체 대로 아는 길입니다. 그러니 새로운 것들이 나타나지 않고 우리 위에 종교를 덮어쒸울 뿐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와의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그분에 대한 이해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그분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천년 전에 사셨지만 지금도 살아계십니다. 영으로 우리들 속에 살아계십니다.

 

*그분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셨습니다.

*무기체에서 유기체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분으로 우리들의 인격은 변화를 받습니다.

 

이런 관계에서 신앙생활을 해야 이것이 바로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주님은 이런 자들을 원하십니다. 우리의 사고에 혁명이 일어나야합니다.

결론

1646년 프랑스의 한 의사가 얼음판에서 넘어져 골절상을 입은 환자에게 왕진을 갔습니다. 환자의 아들은 23세의 청년으로서 19세에 이미 계산기를 발명한 파스칼이라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는 오만한 천재였습니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증명되지 않는 진리는 믿지 않던 사람입니다. 신실한 크리스천 의사는 성경을 한 권 선물로 주고 떠나왔습니다. 파스칼은 아버지를 치료해 준 고마운 의사의 선물이라는 생각에서 아무 생각 없이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 책에서 그의 생애를 온전히 뒤집어 놓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는 39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떠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팡세'라는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수학이나 철학의 업적보다도 인류에게 더 위대한 유산을 물려주고 간 것입니다. 그가 죽을 때 그의 일기에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주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이것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천재적인 과학자가 자기의 삶을 완전히 맡기고 그분을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신앙생활이지, 신앙생활은 요란을 떠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년 한해, 예수가 우리 속에서 조용히 혁명을 시작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서 금년 한 해 정권교체가 이

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나의 정권이 무너지고 예수의 정권이 들어서는 정권교체의 해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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