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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사랑의 복원사
요한복음 13장 34, 35절
서론
가장 행복한 설교자는 좋은 청중을 갖고 있는 설교자입니다. 설교자에 대한 신뢰의 마음으로 경청하고 아멘 아멘! 말씀에 응답하는 이런 훌륭한 청중들만 있으면 설교자는 행복합니다.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빨아들이고 제비새끼들에 엄마아빠가 물어다 주는 먹이에 경쟁하듯이 받아먹을 때 아빠엄마제비는 행복한 것처럼 목회자들도 그런 심정으로 행복합니다.
어떤 청중들은 튕깁니다. 말씀을 넣어줄 때 외면하거나 대리석이 물을 튕기듯이 말씀이 흡수되지 않고 튕겨 나오면 설교시간은 고역입니다. 설교를 하면서 분하고 스스로도 설교가 지루하다고 느낍니다.
이런 청중들이라면 수천 명 앞에서의 잘 준비된 설교이지만 역사도 능력도 일어나지 않을 뿐 아니라 행복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청중들을 춤추게 할 수 없습니다. 설교자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춤추지 않는데 어떻게 청중들이 춤 출 수 있겠습니까?
오늘 13장을 준비하면서 그런 장면을 그려보았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 상황은 도무지 춤출 분위기가 아닙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합니다. 만물을 창조하실 때 보기에 좋았더라며, 스스로 만족하며 춤추시던 성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춤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찾아다닙니다. 그들로 춤추게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요한복음의 춤이야기입니다.
그러던 분위기가 13장에서는 다운됩니다. 우선은 예수님 자신이 춤출 기분이 아닙니다.
1절,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다음 날이면 체포가 되고, 십자가에서 죽습니다. 이런 상황에 무슨 춤입니까?
배신자가 있습니다.
2절,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배신자가 보이는데 무슨 춤입니까? 스승을 배신하는 칼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둔한 수제자 베드로. 귀한 교훈을 전하는데, 발까지 씻겨달라고 쓰윽 내밀어 분위기를 망칩니다.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답답한 사람들과 무슨 춤입니까? 그들은 몽환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모든 제자들⋯. 4절, 아무도 발을 씻어줄 섬김의 종으로 자처하지 않습니다.
3절, 저녁 먹는 중⋯
4절,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예수님의 돌발적인 행동,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려 식사를 하시다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얼마나 속이 터졌으면 식사하다 일어납니까?
여러분이 주님의 입장, 심정이라면 상상해 보세요! 저들은 모두 유대인입니다. 식사 때에 유대인의 정결의 결례는 손과 발을 씻은 후에 시작됩니다. 초대한 집의 하인이, 아니면 주인이⋯ 그것도 아니라면 추대를 받은 사람들 중에서 가장 낮은 자가 씻겨드려야 합니다. 그걸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눈치작전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 왕이 되는 줄 압니다. 여기서 타인의 발을 씻어주면 경쟁력에서 밀립니다. 물론 예수님의 발만 씻겨드리면 되는데 그게 예수님 발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그래서 서로 간에 눈치를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의 동태를 살핍니다. 식사를 시작하면 누구라도 일어나 발을 씻겨드린다, 그렇게 할 줄 알았는데 아무도 모른 척 식사만 합니다. 한마디로, 싸가지(?)없는 제자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식사 도중에 참다못하여 일어난 것입니다. 제자들이 해도 너무하다 싶은 것입니다.
갈릴리바다에서 그물을 던지고 세금을 걷어 폭리하고⋯ 열심당원 노릇이나 하고⋯ 이런 사람들 불러 3년을 열심히 가르쳐 보았으나 도루묵입니다. 그런데다가 유다는 가증스럽게도 예수님 옆에서 천연덕스럽게 빵을 떼고 있습니다. 그러니 춤출 기분이 나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 주님의 춤은 중단되지 않습니다.
춤의 동력은 딱 하나!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기대감이 있고 기대감이 있기에 춤의 무대를 내려오지 않습니다.
1절,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여기 “자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랑에 대해 갖는 태도에는 세 유형이 있습니다.
-사랑하고 사랑을 받는 사람. 성도로서의 향기를 발하는 사람
-사랑을 하지도 않고 받지도 않는 사람. 자기중심적인 사람
-사랑에 배신하는 사람. 배은망덕한 사람
예수님 주변은 3번 유형입니다. 이들과 4절, 저녁을 잡수십니다. 먹는다는 것은 즐거움, 흥겨움, 춤입니다. 그러나 춤출 기분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이런 타이밍에 웃으시며 춤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모두를 자기 사람들로 끌어안고 끝까지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왜냐? 그들은 1절, “자기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대상입니다. 지금은 그 사랑을 몰라도, 지금은 철딱서니가 없어도, 배움이 더디고 하는 짓들이 엉망이어도 저들은 자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사랑했고 그들 역시도 당신처럼 서로 사랑하면서 초대교회 공동체를 일으켜 세워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랑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무슨 계명? 새계명! 사랑의 새계명은 어떤 방정식이라고요? 서로 사랑하라!
유대인의 옛 계명은, 어떤 사랑의 방정식일까요? 자기들의 사랑의 조건에 맞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사랑의 조건은 동족입니다. 선민(選民)이라는 동족만이 사랑의 대상입니다. 혼혈민족 사마리아인들은 개처럼 취급했고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을 계속 타오르게 할 땔감 정도로 알고 멸시하고 증오합니다.
유대인의 사랑의 대상은 사랑을 받을 자격조건이 구비되어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에 어긋나는 세리들이나 창기들, 이런 비율법자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모세의 율법 규례에 어긋난 장애인들은 접촉만으로도 죄가 됩니다. 그러니 사랑 금지대상입니다.
유대인들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굳이 애정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니 저희끼리는 똘똘 뭉치고 동족들끼리는 엄청 사랑했지만 사랑의 조건에 맞지 않는 대상들은 거룩이라는 이름으로 철저히 멀리하고 경멸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대인의 옛계명식의 사랑의 방정식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받을 자격을 갖추었으면 자기 목숨처럼 사랑하고, 자격을 구비하지 못하면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미워하고 배척하고 상종하지 말라! 그게 하나님의 법을 따르는 줄로 알았습니다. 이것이 옛계명이요 유대식 사랑의 방정식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파격적인 사랑의 새방정식을 내놓습니다.
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예수님께서 주시는 새계명의 사랑방정식의 원리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은 바로 요한복음의 중심 주제입니다.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여기에 나오는 ‘세상’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랑의 조건이라는 것은 하나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세상은 하나님께서 혐오하시고 분노하시는 죄인들이 사는 세상입니다. 죄는 자기중심입니다. 이기심입니다. 그러기에 이타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이 상당히 헌신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 같지만 그 안에는 부모의 이기심이 들어있습니다.
남녀 간의 목숨을 건 순애보적 사랑도 사실 내 사랑의 조건에 채워지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고 불행합니다. 억지요 그야말로 빼도 박도 못하는 애물단지의 사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세상을 사랑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 하나님을 왕좌의 자리에서 몰아내 버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살아가는 세상~ 하나님께서는 이런 세상을 사랑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를 보내는 사랑!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사랑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그리고 나를 가장 사랑하는 독생자를 희생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는 아가페사랑이라고 합니다. 조건이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입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말은 조건을 걸기 시작하면 사랑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했고 세상에게서는 그 사랑을 외면당하는 짝사랑을 오래도록 해왔던 것입니다. 그것은 ‘서로사랑’이 아니라 짝사랑이었습니다.
짝사랑은 슬픈 사랑이고 외로운 사랑입니다. 가는 사랑만 있지 오는 사랑은 없어 열매와 기쁨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사랑하면서 항상 상처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상처를 받은 사랑! 그러면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사랑! 끝까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보여주고자 호세아를 부릅니다.
호세아에게도 해서는 안 되는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라도 하면서 하나님의 상처 받은 사랑, 끝까지 그 사랑을 끌고 가고 완성시키려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라 호세아 선지자는 희생을 치릅니다. 어떻게 보면 호세아에게 못할 짓 하셨지요!
사랑에 3대 법칙이 있습니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견디기 힘들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이기기 힘들다.”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 힘들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하기를 두려워합니다. 사랑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사랑의 화신(化身)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눈에 보이게 호세아를 대리로 내세워 보여주었지만 성육신하신 성자 하나님께서는 직접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 조건 없은 사랑! 끝이 다함이 없는 그런 사랑을 새계명으로! 새로운 방정식의 사랑으로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지금 바로 그 식사 자리에서도, 십자가에서도 사랑을 받을 자격을 상실한 대상들조차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보여주시면서 서로 사랑이라는 새로운 계명의 사랑법을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를 하시던 중 중단하시고 제자들을 향한 사랑으로 본을 보이십니다.
베드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수제자로 언제까지 철딱서니 행동을 하겠느냐 나무라지 않습니다.
유다에 대해서는 끔찍할 정도로 “끝까지” 사랑했습니다.
26절, 이제라도 주님의 마음을 알라고, 유다에게 배신자를 상징하는 떡을 떼어줍니다. 그건 정말 조건 없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러나 가륫 유다는
30절,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 어둠으로 사라졌다는 것은 사랑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어둠을 향해 나간 유다를! 교권자들과 돈거래를 하는 배신자가 돌아오기를 끝까지 사랑했고 또 기다렸습니다.
왜? 그들은 예수님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 사랑의 꼭짓점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최고점이요 예수님의 제자사랑의 최고점입니다. 십자가는 플러스입니다. 플러스는 더하기, 얹어주기입니다.
사랑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내 행복을 다른 사람의 행복 위에 얹어주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내 기쁨이 아니라 타인을 먼저 생각해 주는 마음입니다. 교회 안에서 항상 남에 대해 내 행복을 얹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배려가 없는 믿음은 교리적으로 반듯하고 성경적이어도 참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타인의 행복에 내 행복을 얹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덮어주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는다고 했습니다. 허물을 덮어줄 때 목사도 조직도 성경공부로도 일어나지 않던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느 인류학자는, “사람은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상한 동물이라”고 했습니다. 사랑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고 행복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인내하는 것입니다. 인내는 기다림입니다.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킨 것은 하나님의 책망이 아니라 인내입니다. 하나님의 인내가 없었다면 광야 40년의 이스라엘도 가나안에서의 건국도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기다려 준 예수님의 사랑이 시몬을 베드로가 되게 했고 의심꾼 도마를 확신에 찬 순교자로 만들어 내었습니다.
사랑의 카드에는 한도액이 없습니다. 쓸수록 사랑은 더욱 풍성해지고 아름다워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금 써보고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한도액이 다 할 때까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카드를 버립니다. 한 사람을 버리는 것이 때로는 우리교회의 사랑을 버리는 일이요 한국교회의 사랑을 버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계명식의 사랑에서 나오는 인간본성입니다. 그랬기에 교회에 사랑이 없다고 세상은 교회가 사랑을 잃었다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아직도 우리의 사랑의카드에는 한도액이 충분합니다. 이런 카드로 서로사랑이라는 내용에 결재하세요! 그리고 사랑의 포인트를 더 올리세요! 언젠가는 그 사랑이 모두 내게로 옵니다. 결국에 서로사랑이라는 방정식의 사랑은 내 포인트를 올려주고 내 상급이기 때문입니다.
결론
<냉정과 열정 사이>는 복원사 준세이의 이야기입니다. 수백, 수천 년 전 그림을 복원해 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복원사-사랑의 복원사입니다. 다윗의 가슴속에 울면서 자원하는 심령을 주소서-사랑을 복원해주신 분입니다.
예수님도 사랑의 복원사입니다. 첫 사랑이 사랑이 식어진 사람들의 마음에 사랑을 복원시켰습니다. 베드로에게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십니다!” 고백으로 복원시켰습니다.
성령님도 사랑의 복원사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했을 때 제자들은 사랑의 불이 붙었습니다. 자신을 다 내어놓았습니다. 사랑의 불이 붙으면 아까운 것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목사도, 교회도 사랑의 복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다시 사랑으로 일어서야 하고 우리의 사랑을 시작해야 합니다. 상처받기를 각오하지 않으면 사랑이 안 됩니다. 상처받을 마음으로 사랑을 시작한다면 하나님의 교회는 사랑의 교회가 됩니다. 사랑을 다섯 가지 언어로 표현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세상을 춤추게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사랑으로 춤추는 교회를 주목합니다. 우리교회가 세상을 춤추도록 하기 위해 이제 성령춤을 시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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