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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당신은 어떤 제자입니까?(요한복음 14:1~10)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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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떤 제자입니까?

요한복음 14장 1~10절

 

서론
요한복음은 이방인, 특히 헬라문화권을 가진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성경입니다. 헬레니즘은 우주를 다스리는 통치원리를 로고스로 봅니다. 로고스는 우주의 원리’ ‘우주를 지배하는 힘’, ‘우주의 법칙입니다. 로고스가 있어 우주가 생성되고 운행된다는 철학적 사고입니다.

 

요한은 헬라인들의 이런 헬레니즘을 기독교에 접목시킵니다. 우주의 창조적 힘, 통치적 힘을 로고스라 하는데 너희들 말처럼 우주의 근원이 있는 게 사실이다, 뭐가 우주의 근원이냐! 이제 내가 그 로고스를 정확하게 알려주겠다! 그 로고스는 내가 전하는 예수다! 그게 1절이요 요한복음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왜 인간 예수가 되어 세상에 오셨나? 두 가지입니다.

 

10 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니라

 

첫째, 인간의 죄를 없애고 영생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성육신입니다. 그게 3 16절입니다.

 

둘째, 구원 받은 이들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구원 받은 삶을 더욱 풍성하도록 오셨다는 것입니다. 

풍성한 삶! 

유진 피터슨은 그들이 꿈꾸던 것보다 더 나은 삶으로 해석합니다. 그것은 고아의 삶이 아니라 좋은 부모양친 밑에서 사는 행복한 가정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은 억지가 아니라 당연히 예수님과 함께 삶은 춤추는 삶입니다. 단순히 동작만을 말하는 춤이 아닙니다. 마음의 기쁨! 외부에서 공급되는 기쁨이 아니라 마음에서 생성되는 기쁨과 행복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확신하면 이런 기쁨으로 행복으로 충만하게 된다! 이런 춤의 세계로 우리 주님께서 초대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모두에게 있기를 기원합니다. 죽지 못해 살고, 사는 게 사는 게 아닌, 날마다 아침이 새롭고 살아있음에 고맙고, 영생의 보험에 들어있기에 죽음마저도 삶의 한 과정으로 생각할 만큼 성숙된 사고와 믿음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최고의 현자(賢者)입니다.

 

요한복음 14장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던 일입니다. 만찬석에서 제자들은 들떠 있었습니다. 다음 날을 거사(擧事) 일로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예루살렘의 열광적인 분위기로 보아 거사(擧事)는 거의 성공으로 보입니다. 그때부터 서열 문제로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유다의 배신, 베드로의 배신등을 예고하자 분위기는 우울해졌습니다. 거기다 2,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이별까지 나오니 모두 공황상태에 빠져버립니다.

 

공황상태는 정신없는 모습입니다. 너무 두려워 근심하는 모습, 그것은 더 이상 춤을 추는 사람, 행복한 사람, 남을 춤추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맨붕 상태가 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세 유형의 인물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근심하는 사람들-제자들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얼마나 걱정들 했으면 이렇게 달래고 있을까요? 근심은 여러 가지로 마음이 쓰이는 감정, 불안, 비슷한 말로 심려, 염려, 걱정입니다. 얼마나 근심을 크게 하는지 의기소침(意氣銷沈)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난 사람들처럼 와들와들 공포에 떨고 있습니다. 근심이 마음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공포는 외부로부터 오는 압박입니다. 왜 근심하고 있는가요?

 

무지 때문에 근심합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으며 왜 십자가를 져야하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몰라서 근심합니다. 13장에서는 몰라서 좋아했습니다. 지금 14장에서는 몰라서 근심합니다.

 

사람이 몰라서 좋을 때도 있습니다. 병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세상일에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면 사서 걱정합니다.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은 마음 편하게 삽니다. 그러나 모르는 게 약의 전부가 아닙니다. 알아야 합니다. 이때는 알았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오셨는가, 왜 십자가를 지시는가? 어디로 가신다는 것인가? 오신 곳이 있었다는 사실들을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면 이렇게 공황상태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에게는 하나님의 계획이나 예수님의 의중(意中)은 없습니다. 오직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중심적인 욕망은 이처럼 근심을 불러옵니다.

 

외로움도 걱정입니다. 주님께서 가시면 누가 우리를 먹여주며 지켜주며 보호해 줄까? 그들은 고아와 같은 심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두려움에 크게 근심하게 된 것입니다이때만큼은 나이도, 그동안 배운 바도, 예수님의 제자라는 사실도 소용없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모든 것이 끝났다, 끝장이다, 라는 생각에서 떨었습니다. 이것은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염려와 걱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신경이 예민한 분들입니다. 그래서 걱정이라는 잡초 때문에 믿음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고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100배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믿음에도 30배 밖에 얻지 못합니다. 염려를 달고 사는 소심함, 예민함, 과민함 때문에 춤추지 못하는 것입니다.

 

노먼 빈센트 필 박사는, 사람은 절대로 발생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이 40%, 이미 일어난 사건에 대한 걱정이 30%, 별로 신경 쓸 일이 아닌 작은 것에 대한 걱정이 22%, 어떻게 바꿀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걱정이 4%, 나머지 걱정의 4%만이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것, 바로 그 4%만을 걱정해야 하는데 96%의 쓸데없는 걱정 때문에 기쁨을 쏟아버립니다. 그래서 어니 젤린스키는 차라리 모르고 사는 즐거움이 좋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4%에 대한 걱정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걱정을 나 혼자 다 감당하고 사는 그런 사람들은 아닙니까? 그 걱정이 우리를 춤추지 못하게 하고 풍성한 삶을 훼방합니다.

만성적인 의심꾼-도마

우리 주님께서 거처를 예배하러 간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예루살렘이 최종목적지로 알고 있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또 다른 곳으로 간다하십니다. 그랬더니 도마가 말합니다.

 

5,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겠거늘

 

여기에서 교육의 한계를 봅니다. 3년을 기숙하면서 온갖 교훈과 기적을 보여주었건만 도마의 의심증은 치유가 안 됩니다. 그래요! 도마는 의심증 환자입니다.

 

도마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진짜 쌍둥이였을까요? 쌍둥이는 자칫 부모들의 사랑을 의심합니다. 나보다 언니를 더 예뻐하는 것은 아닐까? 동생을 더 사랑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다보니 누구도 잘 믿지 못합니다. 모두의 마음을,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도마는 며칠 후에 벌어진 예수님의 부활사건도 의심합니다. 내 손으로 만져보기 전에는 내 눈으로 목격하기 전에는 못 믿겠다는 것입니다. 동료들이 보았다면 되잖아요? 스승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동료를 믿겠어요? 그래서 더디 믿는 자라는 꾸중을 듣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남편이 되면 의처증 환자이고 아내가 되면 의부증 환자가 됩니다. 병중에서도 아주 괴로운 병입니다. 사실은 본인이 더 괴로워요! 매사에 의심하고 매사에 꼬리를 다는 사람들-이런 사람들이 교회에 있으면 교회 일을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게 될까요?”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

믿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의심병 환자들은 대부분 만성입니다. 그래서 고치기가 힘든 것입니다. 의심병 환자들은 매사에 의심하기에 자기도 춤추지 못하고 남도 춤추지 못하게 합니다. 의심하는 말로 교회의 춤판을 깨버리고 맙니다. 이런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면 한국교회는 장례식장이 될 겁니다.

엄격한 실증주의자-빌립

빌립은 매사에 계산하고 따지는 사람입니다. 벳새다 들판에서도 주님께서 먹을거리를 좀 만들어 보라! 했을 때 대번에 이 많은 무리들을 어떻게 먹인단 말입니까? 이백데나리온 갖고도 모자랍니다!”(6:7) 받아쳤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를 시험했다고 합니다(6:6).

 

물론 빌립의 태도는 의심과는 달라요. 의심은 질이 나쁜 것이지만 실증은 확실하게 하자는 것이지요! 빌립은 의심이 아니라 계산하고 증명하고 과학적 데이터가 있을 때에만 예스! 합니다.

 

빌립. 전통적 유대이름은 아니라 헬라식입니다. 빌립은 헬라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 이름입니다. 유대 아버지가 자식 이름을 빌립이라 작명한 것은 헬라영향을 받은 상당히 진보적이고 깨어있는 가문으로 보입니다. 빌립은 지성인입니다. 나다나엘과 벗이 되었다는 것도 두 사람 모두 지적인 분위기를 풍깁니다.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어부출신입니다. 어부들은 충동적입니다. 감성이나 계산, 조심스러움이 결여되어 있습니다. 풍랑이 몰아닥치는 데 언제 계산하고 있겠어요? 그러다보니, 제자그룹은 상당히 역동적입니다. 일단 일을 저지르고 생각하는 행동스타일입니다. 초대교회가 역동적으로 부흥한 것은 제자그룹의 적극적인 성격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이들은 단순합니다. 단순한 사람들은 목숨을 겁니다. 어디든 달려갑니다. 계산하면 전도 못합니다. 이것저것 따지면 순교도 못합니다. 바다에서처럼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라는 사람들에게 신중함은 금물입니다. 그래서 뱃사람은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 교회를 세우시면서 뱃사람 중심으로 제자를 삼았다는 것은 가장 효과적인 전략으로 보입니다.

 

이런 제자들에 비해 빌립은 신중한 사람입니다. 대강대강 넘어가지 못합니다. 어떤 계획을 세울 때 예산은 얼마이며 조달방법은 어떻게 하며 얼마만큼 효력이 있는가. 세심하게 따집니다.

 

그렇다고 매사에 아니오!” “싫어요!”하는 부정적 마인드는 아닙니다. 성격이 까다로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정확히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일을 벌여놓고 무책임할 만큼 믿습니다!”보다는 이것저것 따져보고 계산해보고 일하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누군가가 자세하게 정확하게 이야기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매사에 너무 계산적이면 춤을 못 춥니다. 너무 계산적인 사람들이 교회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습니다. 교회 안에서 으쌰 으쌰~ 춤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열 살 나이에 대학교수도 풀 수 없는 수학문제를 척척 푸는 천재 소년이 있었습니다아이는 주변의 지나친 기대로 심리적 압박을 받았습니다그래서 아버지는 같은 반(여학생과 셋이 영화를 보러갔습니다집으로 돌아오면서 소녀가 말했습니다.

 

"어땠니너무 감동적인 영화였어그녀가 울 때 따라서 울 뻔했어."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너도 감동적이었니?"

"아버지감동이 뭐예요그 영화에는 22,369개의 문장이 나왔고 98,332개의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수학방정식은 능해서 금방 숫자적인 계산은 끝났지만 숫자 이상의 사랑의 방정식행복의 방정식은 모르는 외로운 천재였습니다이런 사람들은 숫자만이 그들을 흥분시키고 계산적인 결론만이 믿을 수 있는 신념입니다신비가 없고 초월이 없기에 춤이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13 1자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고 그 생명으로 풍성한 춤의 세계로 나아가야 할 사람입니다그래서 주님은 다운되어 있는 제자들춤을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춤은 계속된다고 말합니다염려의 춤의심의 춤계산적인 춤이 아니라 성령으로 춤추는 날이 올 것이라며 확신을 줍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그렇습니다제자들은 염려 중에서도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의심하면서도 도마는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믿음과는 쉽게 동거할 수 있는 이성과 과학의 증거를 요구하면서도 빌립은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자 제자들은 춤을 춥니다.

 

도마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의심쟁이에서 확신주의자가 되어 춤을 춥니다.

 

빌립기독교전승에는 소아시아에서 순교했다 나옵니다더 이상 계산적이 아니라 다른 제자들처럼 일단 춤을 추고 계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무모함이 없으면 순교할 수 없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요염려와 근심에 사로잡았던 제자들은 1세기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1세기 초대교회 문서들을 살펴보면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는 별칭이 붙어 있습니다티테디오스 바울티테디오스 요한. ‘디테디오스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바울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도마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아무개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강아무개 목사너무 멋진 별칭입니다예수님으로 100% 마음을 채운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춤추는 풍성한 삶의 모습입니다.

결론

한국사회는 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특히 장년노년세대들이 춤을 잃어가고 있습니다은퇴 이후에도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는 장수무대가 오히려 춤을 잃게 만듭니다산업화세대가 쌓아놓은 대한민국의 성장과 발전을 헬조선이라 너무 쉽게 처단해 버리고 자기들끼리만 말춤을 추는국민성이 달라도 너무 다른 아랫세대들에게 기성세대는 말문이 닫히고 춤을 출 흥()겨움을 잃어버립니다

 

그건 아랫세대도 마찬가지입니다고정된 신념에 세계에 사로잡혀 있는 꽉 막힌 기성세대를 보면 말춤이라도 추지 않으면 살판이 없습니다그래서 각자 자기들의 춤을 추면서 상대방의 춤을 거부하고 공격합니다이것이 대한민국의 오늘로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대한민국에 오셔서 그런 춤들은끝나면 허무하다고부끄럽다고시시하다고나랑 춤을 추자고 나랑 성령으로 춤을 추자고 손을 내미십니다우리가 그 손을 잡고 말춤에서 성령 춤으로 갈아타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삶이 더욱 풍성해질 것이며새로운 이름디테디오스 아무개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아무개라는 이름으로 살다가게 될 것입니다여러분들의 이름은 이제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는 사람, ‘디테디오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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