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나무의 성령 열매⑨ - 온유(溫柔)
갈라디아서 5장 19~24절
서론
오늘은 성령의 열매 여덟 번째, 온유입니다. 온유(溫柔)는 어떤 이미지인가? 선천적으로 마음이 부드럽고 따듯한 사람, 큰소리로 떠들지 않고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 착하고 유순해 보이는 사람, 화를 낼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고 온순한 사람⋯ 태생적으로 성질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사람… 이런 사람들은 믿음이 없어도 믿음이 좋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온화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지만 때로는 두리뭉실 넘어가고⋯ 우유부단합니다. 사람 좋다는 말은 듣지만 영향력이 없습니다. 자기주장이 없어 답답해요! 이것이 성령의 열매, 온유라면 바울이 굳이 그런 열매를 맺으라 했을까요? 바울이 얼마나 끊고 맺는 것이 정확하고 옳고 그름이 확실한 사람입니까? 바울은 어떤 온유함을 열매로 맺으라 할까요?
온유는 길들여졌다! 는 의미가 있습니다. 야생마(馬)가 잘 길들여져서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때 온유하다고 합니다. 내 혈기와 고집은 쏙쏙 뽑아버리고 예수님의 온유로 길들여져 가는 사람… 그래서 평정을 유지하는 마음상태가 바로 온유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신 분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마 11:29)
예수님의 온유는 그냥 성품이 너그럽고 부드러운 것일까요? 이래도 허~ 저래도 허허~ 웃는 그런 성품일까요? 아니에요! 예수님의 온유는, 힘도 있고 능력도 있고 실력이 있으면서도 종(servant)의 자세로 상대방의 무례함과 무대뽀에도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수용하며 받아들이는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무례한 자들에게 굴복 당하고 그들의 영향을 받아 변질되는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마음이면서도 그들을 굴복시키고 길들이는 사랑의 힘입니다.
1. 온유는 무엇일까?
㈀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건강한 정서적 상태입니다.
온유는 내가 남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고 상처 받으나 상처를 받지도 않습니다. 온유는 배의 폐타이어와 같은 것입니다. 배에는 사방으로 돌아가면서 폐타이어가 있습니다. 배들끼리 아니면 바위에 충돌하지만 쇼크를 덜 받도록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배들끼리 부딪쳐도 서로 간에 깨지고나 침몰하거나 손상 받지 않도록 하는 역할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공동체 생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다보면 항상 좋을 수는 없습니다. 고슴도치처럼 껴안는다는 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럴 때 온유한 사람은 타인도 상처받지 않도록 하면서 자신도 상처를 받지 않는 마음입니다.
어떤 이들은 항상 남을 상처 줍니다. 어떤 이들은 남에게는 잘해주면서 자신이 상처받습니다. 겉은 멀쩡한 데 속은 상함으로 멍들었습니다. 부글부글 속을 끓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는 척 웃고 삽니다. ‘바른생활표’ 신자 노릇하기가 힘듭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골병듭니다. 이런 온유는 기쁨을 잃어버립니다. 정신건강에 매우 해롭습니다.
예수님의 온유는 충격을 받으나 충격이 완화되는 지혜입니다. 예수님의 온유를 배우면 배울수록 쇼크도 그만큼 덜 받게 됩니다. 스펀지와 같습니다. 스펀지는 쳐도 치는 사람이나 맞는 사람 누구도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상처를 가해서도 안 되고 상처가 왔을 때 받아서도 안 됩니다. 어떤 말을 들었을 때, 상처를 덜 받으면 온유가 그만한 것이며 큰 공격에도 내가 아무렇지 않는 평정의 마음을 유지하면 그 마음이 바로 온유함입니다.
㈁ 온유함은 남들이 나와 함께 있을 때 편안하게 느껴지는 마음입니다.
매사에 너무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은 온유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자기주장만 내세우고 남들의 주장을 무시합니다. 나와 의견이 맞지 않았다고 사방팔방 비난하고 다닙니다. 이해능력, 포용능력이 약한 것이지요! 성인아이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곁에 있으면 불편합니다.
매사에 너무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성령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고집이 꺾어져야 합니다. 눈에 띄게 개성이 강하고 지나치게 모나게 행동하는 것도 무엇인가 잘못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식당에 가면 유별나게 음식을 주문합니다. 물론 꼭 같은 것을 주문하라는 것은 아니지만 하여튼 이상하게 행동합니다.
이런 사람들 좀처럼 자기 생각을 포기하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으면 편치 못합니다. 그러니 내 생각이 있고 뜻이 있지만 남들을 배려하고 즐거움으로 함께 하는 성숙함들이 온유의 열매입니다. 스펀지의 흡수역할, 이해능력을 넓혀가야 온유함의 성령열매가 익어갑니다!
㈂ 온유한 사람들은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남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습니다.
무뚝뚝함, 퉁명스러움, 매사에 아니꼽게 보는 마음⋯ 이런 마음을 버리고 항상 남을 배려하며 친절하며 양보하고 상냥하고⋯ 너그러움⋯ 등을 보여야 합니다. 원칙을 고수한다는 빌미로 성경의 자구(字句)에만 매달리는 바리새인들의 편협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전장로님이 행복반 성경학교에서 어머니의 믿음을 회고하면서 사람을 둘로 나누었어요! 점점 딱딱해지는 사람! 점점 부드러워지는 사람! 누가 성공자가 되고 존경을 받을까요? 당연히 부드러움의 사람, 온유의 사람입니다. 사람이 갈수록 유연해져야 합니다. 그래야 건강한 사람입니다. 유연성이 없으면 얼굴 표정이 굳어집니다. 느린 자살이 되는 것이지요!
동물이나 생물도 호전적이고 성질이 급한 놈, 덩치가 큰놈들은 빨리 죽습니다. 곤충도 투구벌레처럼 등딱지가 딱딱한 놈들이 빨리 죽습니다. 그러나 연체동물들, 온유한 동물들은 오래 삽니다. 공룡은 멸종되었고 지렁이들은 살아남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하셨습니다. 세상은 아이큐(IQ)가 아니라 이큐(EQ)가 좋은 사람들이 번영합니다.
㈃ 결국 온유는 말을 부드럽게 하는 친절로 시작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간판급 특성은 말이 부드럽습니다. 말에 은혜가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입니다. 안 좋은 큰일이 생기면 작게 말하고 작은 일은 아예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잘 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잘 말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어떤 성도가 물었습니다.
“목사님, 담배 피우면 지옥 갑니까? 성경 어디에 담배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러자 목사가 말했습니다.
“담배 피운다고 지옥 가는 것이 아닙니다. 담배를 피우면 천국에 빨리 갑니다.”
폐암으로 일찍 죽는다는 것입니다. 교리문제로 접근하면 논쟁이 되는데 얼마나 부드럽고 지혜로운 대답입니까? 이런 대답을 듣고 싸우자고 덤비는 사람은 없습니다. 같은 말이라도 듣기 좋게 부드럽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온유함은 "거친 질문에 부드럽게 대답하는 것"입니다.
온유함은 "거칠게 구는 이들에게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입니다.
온유는 부드러움, 이해심, 관대함, 따뜻함입니다. 이런 온유함을 주님은 가지라고 하십니다.
2. 온유의 모델
성경에서 온유의 모델은 예수님과 함께 모세입니다. 모세는 원래 강직하고 꼿꼿한 사람입니다.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그는 혈기 방장한 청년시절을 보냈습니다. 혈기를 이기지 못해 살인했고 망명했습니다. 십계명 돌판을 들고 내려오다 우상 숭배하는 동족들에 분노해서 깨버렸습니다. 길들여지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이 늘 들끓었습니다.
그러나 목자로서 40년을 살았습니다. 양(羊)은 동물 중에 가장 미련합니다. 느려터지고 한 길 밖에 모르고 눈이 앞밖에 살피지 못합니다. 이런 양떼들과 40년을 살았으니 자기 성질 같았으면 어땠을까요? 밴댕이처럼 자기 성질에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목자로서 점점 온유한 마음-느긋한 마음을 가졌습니다. 참고 또 참고 별 소리에도 참았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 너그러움을 보였습니다. 애굽 궁궐에서 보였던 모습과는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성경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고 했습니다(민 12:3). 온유함은 수용력,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로 길들여진 마음, 상대방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이런 온유함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하나님을 대면할 때, 아버지의 측은지심의 마음을 알았고 목자의 심정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점점 온유함으로 나아갔습니다. 때로는 급한 성질 때문에 살인도 했습니다. 십계명을 받아들고 오다가 팽개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온유함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지 않고 120세 장수했습니다.
통계적으로 치매에 쉽게 걸리는 사람들은 고집불통에 의혹이 많은 사람, 미움과 증오가 많은 사람, 남의 말을 안 듣고 자기 본위로 사는 사람, 잔소리가 많고 모든 것을 챙기려 하는 사람… 결론은, 남에 대한 배려-온유함이 없는 사람입니다. 유교적이라면 어질 인(仁)이 없는 것입니다. 장수하려면 어질어야 합니다. 그래야 마음이 건강합니다. 교회생활을 잘 하려면 온유함이 필수입니다. 남들을 볼 때 온유함이 있어야 넘어갑니다. 온유함이 없는 사람, 공격적이고 남을 인정하지 않는 성격들은 그것부터 먼저 부드러워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도 좋은 내용은 그때그때마다 반응하시고 마음에 걸리는 부분들은 내가 회개하고 자세를 고치고 다음 설교를 기다리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담아두면 그게 고름이 됩니다. 우리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번씩 예화가 나옵니다. 그러면 집사님들이 걱정합니다. 집에서 물어봅니다. 기분 나쁘냐? 그랬더니 아들이 “우리가 한 솥 밥 먹은 지가 어디 한 해입니까?” 합니다. 소화하는 위(胃)-이해력이 큰 것입니다.
소가 왜 하루 종일 먹고도 위장병에 걸리지 않습니까? 위가 네 개라서 지금 소화가 안 되면 다음에 다시 되새김질을 해서 먹고… 그러니 위장병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해력 소화력이 바로 온유함에서 나옵니다. 그래서 소는 온유함의 대명사입니다.
3. 온유함의 열매를 맺으려면?
㈀ 온유한 성품을 정말 기르고 싶다는 마음을 먹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부녀들에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3장!
3절, “너희의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4절,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사람입니다. 온유는 겉으로만 척! 해선 안 됩니다. 그것은 위장입니다. 마음에서 온유가 나와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간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 온유하지 못하고 관대하지 못한 구체적 상황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까탈스러운 사람입니다. 마가가 1차 전도여행에서 도중하차했다고, 2차 전도에서 제외시켰습니다. 바나바는 온유한 사람, 마가를 품습니다. 훗날 바울이 많이 뉘우칩니다. 그래서 죽을 때가 되자 더욱 챙겼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날마다 온유를 점검했고 키워나갔습니다. 예수님의 온유-관대함, 부드러움을 배웠습니다. 그래서 디도에게 이렇게 훈계합니다.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딛 3:2).
㈂ 하나님께서 온유함을 요구하시는 영역은 어떤 영역인가? 살펴야 합니다.
누구에게 덜 온유한가? 어떤 경우에 온유가 부족한가? 온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실제적인 방법은 무엇인가? 그 방법을 늘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야생마를 경주마로 길들여가야 합니다. 고분고분! 그것이 온유요, 상처를 주지도 받지도 않는 수용능력이 온유함입니다.
결론
지금은 분노의 시대입니다. 엊그제 미국에서 인터뷰를 진행하던 방송기자와 카메라맨을 같은 방송사 전직기자 베스터 리 플래내건(41)이 총질을 했습니다. 증오 범죄입니다. 경찰의 추적을 받자 자살했습니다. 그는 노트에 이렇게 썼습니다.
“난 폭발을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이었다”
폭발을 기다리는 인간 화약통! 분노가 만들어 낸 증오심입니다. 이런 화약통들이 곳곳에 있습니다. 분노, 증오… 온유함과는 반대의 언어입니다.
요즘 20대 30대의 젊은이들은 대한민국을 '헬조선'이라고 합니다. '헬(hell), 지옥+'조선(朝鮮)'의 합성어로 '지옥 같은 대한민국'이라는 자조적 표현입니다. '망한민국' '개한민국' 이라는 냉소적 국가관입니다. 이들이 욱! 하고 일을 저지르면 옆에 있다 불벼락 맞습니다.
헨리 패일리는, 분노를 ‘감정의 용광로’라고 말합니다. 분노가 해소되지 못하고 부글거리면 ‘고름’이 됩니다. 분노는 감정의 고름입니다. 기쁨이 되어야 할 감정이 고름이 되면 분노, 우울증, 치매… 증오범죄라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우리 안에 이걸 찾아내고 다스려야 합니다.
다윗은 온유한 자로 자처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발을 통해 아직도 남아있는 분노라는 감정의 잔재(殘在)를 드러냅니다. 다윗은 위엣 사람에게는 잘 참지만 아랫사람에게 모욕당하는 것은 견딜 수 없어 했습니다. 큰일에는 잘 참다 사소한 일에 크게 분노합니다.
나발의 험한 말은 다윗의 험한 반응을 촉발시켰습니다. 반면에 아비가일의 부드러운 말은 다윗의 분노를 사그라지게 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무기 한 번 쓰지 않고 다윗의 분노를 잠재우고 집안을 응징하려 출동한 군대를 물러서게 만들었습니다. 다윗은 분노 때문에 일을 망치려 했으나 여인은 온유함으로 분노에 찬 사람을 순식간에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냈습니다. 온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무엘은 큰 사람입니다. 사사시대를 끝내고 이스라엘의 왕정을 수립한 국부(國父)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왕으로 세운 사람입니다. 그의 탁월한 지도자 능력의 비결은 뭘까요?
“…주의 온유함이 나를 크게 하셨나이다”(삼하 22:38).
온유함이 큰 사람이 큰 그릇입니다. 이해능력이 큰 사람이 큰 인물입니다. 그런 이들은 큰 일은 크게 처리하고 작은 일은 작게 처리합니다. 다윗은 감정에 휘둘리어 파리채로 정리할 것을 대포로 박살내려 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온유함으로 다윗의 분노를 풀었고 집안을 살렸습니다. 온유함의 덕(德)은 지는 것 같으나 이기고, 뺏기는 것 같으나 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팔복에서,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 말씀하셨습니다(마 5:5).
분노(憤怒)는 반드시 청산해야할 감정입니다. 분노라는 감정의 불길을 꺼나가는 것은 온유(溫柔)의 힘입니다. 온유를 더욱 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도움을 구하기를 기원합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덕(德)이 넘치는 존경받는 ‘늘빛맨’들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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