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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의 성령열매⑦-양선(良善, goodness)
갈라디아서 5장 19~24절
서론
생명나무에 열리는 성령열매 일곱 번째입니다. 처음 성령열매 설교를 시작할 때는 성격, 성품문제로 접근하려던 계획이었습니다. 좋은 성품으로 나도 행복하고 너도 행복하고 존경을 받는 크리스천 인격자가 되자, 그런 내용을 미리 ‘스케치’ 해 두었습니다.
지금도 그런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를 하면서 이건 성품성화 정도가 아니라 성령열매는 믿음의 본질이구나, 우리가 그동안 믿음의 본질을 많이 놓치고 믿었구나, 믿음의 금맥은 왼쪽에 있는데 오른쪽으로만 계속 수십여 년 파고들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믿음이 이러다보니 어느 시점부터 믿음성장이 멈추고 교회생활 이력履歷)만 쌓아가고 교회봉사 노하우만 생기고 그걸 믿음의 전부다 생각하니⋯ 똑똑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들은 많은데 존경의 대상들은 이외로 많지 않는 기현상이 한국교회에 일어나고 있습니다.
믿음은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수용함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입니다. 유일신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우리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 그 내용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게 하사 우리 죄를 사해주시고 부활시켜 우리를 의인신분으로 만들어 주신 것! 이것이 믿음의 내용이자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서 하신 내용을 믿지 않고 다닌다면 종교동아리활동을 하는 셈입니다. 헌금은 회비, 주일은 동아리모임 날, 물론 초신자들은 그렇게 시작하지만 교회 좀 다녔다 하면 이제는 믿음의 대상으로 하나님을! 믿음의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 이후의 그 다음이 중요합니다. 바른 믿음, 정상적인 믿음을 가져 종교동아리멤버가 아니라 신앙인이 되면 하나님의 자녀라는 멤버십(membership), 신분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멤버십 자격이 바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열매는 신앙생활의 2순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에서 1순위는 무엇인가요? 성경을 잘 알고, 기도를 잘하고 주일성수, 헌금, 교회 봉사⋯ 술 담배 금하는 것⋯ 이런 것들이 1순위였습니다. 이런 것에서 점수가 높을수록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대접이 직분-직책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교회의 중요한 요직을 거치는 일이지요!
그래서 교회직분을 섬김으로 생각하지 않고 믿음의 목표로 생각하기에 욕심들 내지요! 나는 믿음이 좋으니까 장로가 되고 권사, 안수집사가 되어야 한다! 되지 않으면 내 1등 믿음이 거절당했다고 속상해 합니다.
과연 이런 것들이 믿음의 1순위입니까? 당연히 믿음의 1순위입니다. 문제는 이런 것들만 믿음의 1순위로 생각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1순위가 이런 것들이라면 믿음이 좋고 직책(?)이 좋은 분들이 교회안팎에서 덕망이 있고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한국교회만큼 믿음과 열정이 좋은 교회가 드믈 것입니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존경의 대상! 신뢰의 대상이 되어야 하지요! 지금 우리가 존경 받고 있나요? 신뢰의 프로세스(process. 일이 처리되는 경로나 공정. 과정, 절차)가 형성되고 있나요?
아쉽게도 대단한 믿음에 비해 좋은 점수를 따지 못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좋은 일들 많이 합니까? 다른 종교에 비하면 우리가 훨씬 큰 믿음이 있고 열심이 있습니다. 불교도들, 1년에 한 두 번 가면 됩니다. 천주교인들, 1년에 두 번만 고해성사하면 가톨릭 멤버입니다.
우리는 이에 비하면 믿음생활이 굉장합니다. 이건 동아리수준이 아니라 선수 수준입니다. 최소한 1주일에 한 번은 가고⋯ 두 주만 빠지면 관리대상(?)이 됩니다. 그러니 타의에 의해서라도 열심할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기에 기독교인들은 타종교인에 비해 믿음이 좋습니다.
문제는, 정작 세상이 믿음챔피언 우리를 믿음 동아리수준의 불교나 로마가톨릭보다 못하게 보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나쁜 사람들일까요?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들인가요? 교회가 얼마나 선행을 많이 합니까? 동남아지진이 나면 타종교는 10억 미만인데 우리는 한 교단에서만 5,60억씩 모금해서 보내줍니다. 사회복지시설에 교회가 감당하는 지분은 엄청 큽니다.
그런데 우리가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이 보는 기준과 우리가 보는 믿음의 기준 사이에 뭔가 다른 것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교리적인 면에 상당히 믿음의 비중을 높이 두는데 저들은 생활로 믿음을 평가하고 있더라 그 말입니다.
교회가 불교나 로마가톨릭보다 믿음이 못하거나 생활이 못해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믿음이 훨씬 좋다고 인정하기에⋯ 그래서 더 친절하고 깊은 인격을 기대하고 있는데 믿음이 없는 타종교인들보다 나은 게 없기에 눈에 거슬려 존경하지 못하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단체로는 좋은 선행을 많이 하는데 개인적으로 사회에⋯ 직장에⋯ 친교 교제권에 들어서면 그렇게 남달리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합니다. 교회가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것은 인정한데 그 선행이 교회부흥이라는 조건부 빅딜이 숨어있다고 생각하기에 교회 선행을 100% 인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한국교회는 교리적 믿음, 예배당에서의 봉사적 믿음은 A+인데 생활에서의 믿음은 C-라고 한다면 자학적인 평가일까요?
갈라디아서는 교리서입니다. 지금 교리의 최첨병이라는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에게 책망을 듣고 있습니다! 복음을 율법으로 변질시키고, 복음교리가 유대교율법교리로의 역(逆)개종을 하는 것에 대한 책망입니다. 교리가 이러니 인격이 19절~21절의 육체열매로 요란만 떨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에 대해 성령의 열매를 권고 합니다. 성령의 열매는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바로 믿음 자체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으로 죄사함과 부활의 신분을 얻는 멤버십 회원이기에 예수님으로 체질화되고 성화되고⋯ 이런 삶이 교리와 함께 믿음의 1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이걸 믿음의 1순위 속에 포함시키지 못해 종교적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고 그걸 성령열매로 착각하는 착시현상, 그러나 세상은 자기 기준에서 금방 그런 것들이 자기들보다 더 우수한 열매가 아님을 알기에 존경심을 보내지 못합니다. 우리들도 서로 간에 진정한 존경을 못합니다. 인품과 생활이 없는 기독교가 만들어 내는 비(非)교회적인 모습입니다.
오늘은 여섯 번째 열매 양선입니다. 양선(良善, goodness), 어려운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나 사용되지 거의 사용되지 않는 사어(死語), 죽은 언어입니다. 양선(良善)! 좋을 양(良), 어질양, 편안할 양(良)에다, 선할 선(善), 종합하면 어질고 착하고 의로운 행동이 양선입니다.
친절이 타인에 대한 배려라면 양선은 그보다 더 강합니다. 친절이라는, 마음이 부드러운 차원을 넘어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접붙임 당해 생명나무가 된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에 지배되는 성화과정에서 남에게 유익을 끼치는 적극적 선행이 양선입니다. 영어로는 ‘goodness’ 선량함, 마음과 행실이 선한 사람⋯, 바로 양선의 열매입니다.
성경 <표준새번역>도 자비를 친절로, 양선을 선함으로 번역합니다. <우리말번역> 성경도 꼭 같이 자비와 양선을, 친절과 선함으로 번역합니다. 이웃에게 친절하고 마음과 생활에서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들⋯ 그것도 이해관계나 자기를 들어내기 위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마음으로 선행을 한다면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제가 지난주일 설교에서, 우리 동네 40대 초반 남자에게 보인 친절을 소개했습니다. 이 남자뇌졸중으로 손과 발을 절어요. 작년부터 보는데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 대부분 얼굴에 표정이 없어요. 차문을 열고 많이 좋아진다고 했더니, 감사하다고 행복한 얼굴이 됩니다. 나도 참 기뻐요! 말 한 마디로! 이것이 친절입니다. 그러나 선행은 아닙니다.
우리 옆집에서 글짓기학원을 하다 이사를 가신 분! 길 반대편에 있기에 안녕하세요? 했더니⋯ 자기를 알아주어서 고맙다고 수박 한 덩이 사다주었어요! 이거 친절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선행, 양선의 단계는 아니어요! 이게 양선이 되려면 더 가까이 다가가서 행동으로 친절을 실천해야 해요! 말로의 친절이 행동친절로 가야 양선이 됩니다.
선행이 되려면 여러 방법이 있겠지요? 늙은 어머니와 함께 사는 그 남자에게 1주일에 한번 정도 붙들고 산책할 수 있겠지요? 취미를 알고 책이야기⋯ 영화 좋아한다면 좋은 미드를 찾아 갖다 줄 수도 있겠지요? 벌이가 없는 이 사람에게 가벼운 옷 선물도 할 수 있겠지요? 이게 양선입니다.
친절이 1회적이라면 양선은 지속적입니다. 친절이 대부분 말이나 얼굴 표정이라면 양선은 자기 손해가 있어야 합니다. 시간이든 물질이든⋯ 귀찮음이든⋯ 지속적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려니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이 불편하고 힘들다, 이렇게 나와야 하고⋯ 이렇게 사니 너무 인생이 행복하고 보람되다⋯ 이렇게 나와야 합니다.
이런 수준이 되면 교회생활에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무슨 위원장이 되고 못되고⋯, 등등…에 목숨을 걸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즐거움을 나누는 인생의 행복과 보람이 이렇게 풍성한대요! 이런 사람들 죽을 때 후회를 덜 해요! 이게 성공이지요!
예수님을 믿는 게 골치 아픈가요? 지금도 잘 믿어왔고 행복했는데 왜 내 신앙생활을 흔들어 놓냐고, 왜 복잡하게 만드냐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가요? 그래서 대형교회들이 잘 되는 거예요! 자기 행동에 대해 점검하지 않는 상태에서 은혜 받기가 딱 좋은 시스템이에요! 그런 곳에 앉아 은혜에 취하고 찬송하고 있으면 믿음이 좋은 것처럼 착각해요! 그러나 너무 쉽게 다니는 분들이 많아요!
여러분! 세상에 힘들지 않고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 어디 있나요? 대학 가려면 힘들어야 해요! 음악이나 미술, 스포츠로 성공하려고 해도 힘들어야 해요! 영어공부도 힘들어야 해요! 힘든 것만큼 성적이 오르고 실력이 붙고 그 방면에서 1인자가 됩니다.
그런데 왜 신앙생활에는 힘들지 않는 길을 택합니까? 그렇게 힘들지 않으면 믿음동아리멤버십 밖에 없지요! 신앙생활 제대로 하려면 불편하게 살 줄도 알아야 합니다. 주일성수⋯ 일상이 되고 습관이 되면 쉬어요! 이런 쉬운 것으로는 성화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선행을 베푸는 일! 양선, 지속적인 선행⋯ 이거 힘들어요! 손해도 되고 귀찮기도 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별로 드러나지도 않아요. 그러나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양선이 있고⋯ 교회의 단체적 선행보다 크리스천 각자의 선행이 세상을 감동시킵니다. 그러면 오지 말라고 해도 교회 오고 믿지 말라고 해도 그 좋은 분 같이 믿자고 합니다. 이게 전도고 증인의 삶입니다. 이런 증인으로 살려면 너무 힘들어 내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기에 성령을 받아야 하고 성령으로 열매를 맺기에 성령의 열매 양선이 되는 것입니다.
어느 장로님이 계세요! 아들이 좋아요. 인물도 좋고 출신학교도 좋고 일류기업에 취업도 했어요! 그야말로 1등 신랑감입니다. 부모님이 얼마나 며느리를 기대했을까요? 내 자식이 잘 났으니 잘난 며느리를 기대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들이 초등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동창을 만나 사랑에 빠졌어요! 여자 친구는 청각장애인입니다. 듣지 못하니 말도 제대로 못합니다. 수화로, 입 모양으로 소통하는 거지요. 아들이 장애인 친구를 엄마에게 데리고 왔어요! 데려오면서 아들도 여자 친구도 얼마나 마음이 조마조마했겠어요? 아들이 결혼하겠다는 말에 엄마가 마음이 어떻겠어요? 내색은 못하지만 무너지지요!
엄마는 허락했어요! 문제는 장로님인데 허락이 쉽지가 않겠지요? 조심스레 사정을 남편장로님에게 말했어요. 가만히 듣고 있던 장로님, 동정심이 아니라면 허락해야지⋯. 예화로 전할 생각은 없었기에 제대로 전하는지 모르겠어요!
결혼을 약속하고 아들이 군대를 갔는데 사모님은 운전대를 잡고 옆에 며느리후보 자매가 탔는데 얼굴을 보고 입 모양을 보면 소통이 될 텐데 그게 안 되니 얼마나 갑갑했겠어요?
여기서 자비와 양선의 관계를 봅시다. 자비는 친절, 아가씨가 두려운 마음으로 첫 만남을 가졌을 때 시어머니 될 분의 따듯한 마음은 자비요 친절입니다. 여기서 끝낼 수도 있습니다. 사랑이 낭만이라면 결혼은 현실이라고⋯ 그렇게 거절할 수도 있지만 두 분 모두 결혼을 허락했어요! 첫 만남에서 따듯이 대해주는 것이 친절이라면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것은 양선, 행동하는 선(善)입니다.
지금은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잘 살아요! 며느리는 공무원이 되어 행복한 가정의 며느리-아내-엄마가 되어 살고 있습니다. 친절한 그리스도인의 양선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인생입니다. 때때로 남들처럼 고부지간에, 시아버지와 며느리사이에 전화도 못하지만 불편한 것도 있지만 양선은 불편까지 감수하는 마음입니다. 이런 양선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빛이 됩니다.
어느 대형교회 권사님. 아들이 의사인데 며느리가 혼숫감을 적게 해왔다고 이혼을 시켰어요! 그것이 인터넷에 떴어요! 그때는 꼭 권사라는 말이 들어가요! 그래요 뉴스가 되고 공격성이 좋잖아요! 안티기독교가 바로 그런 즐거움에서 사는 거예요! 우리가 안티 동기를 제공하니 할 말이 없지요. 이런 중직자들은 친절도 양선도 없는 분입니다. 인분교수 장로처럼 육체의 열매일 뿐입니다. 우리는 지금도 이런 열매들을 맺느라 열심히 믿고 있습니다. 성찰의 기독교가 필요합니다!
결론
가수 김아무개. 얼마나 기부를 많이 하는지 기부왕이라고 해요! 그런데 그가 행복하다는 느낌이 안 들어요! 사람들도 처음에는 박수를 치더니 지금도 훌륭한 일이라 하면서 기부에 중독되었다고 해요. 어떤 것도 중독되면 기쁨이 없어요. 종교도 중독이 되면 안 됩니다.
이 사람, 왜 기부에 중독되었을까요? 언론이 그렇게 만든 거예요! 중독은 갈수록 액수가 커야하고 사람들의 박수가 커야 해요! 점점 많은 기부를 할 수 있나요? 사람들도 감동을 덜 받아요! 그러면 감동을 줄 더 큰 액수, 더 요란한 이벤트에 연연하게 되고⋯ 힘들어요! 친절이 가미되지 않는 양선은 힘이 듭니다. 물론 김아무개가 그렇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그럴 수도 있다는 예화입니다.
한 아이가 1등 선행상을 받았습니다. 어떤 일을 했냐고 했더니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무 일도 한 게 없어요. 아들이 죽어서 슬픔에 빠져있는 할아버지가 더 잘 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을 뿐이에요.”
아이가 할아버지를 보면서 인사하는 것은 친절이요 어린마음에도 자비입니다. 더 잘 울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찾아가야 합니다. 잘 울 수 있도록 방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불편하고 성가십니다. 그러나 잘 울도록 해드렸어요. 이것은 선행이자 양선입니다.
자비와 양선은 쌍둥입니다. 라이트푸트는, “자비는 잠재적인 양선이요 양선은 현실적으로 힘을 나타내는 자비”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자비와 양선은 쌍둥이라는 것입니다. 친절은 남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남의 행복에 관심을 갖게 되면 그가 행복할 방법이 보이고 그걸 행동으로 도와주면 그게 양선(良善)입니다.
교회는 그걸 연습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좋은 상황에서조차 성공하지 못하고 남의 허물이나 캐고 있으면 믿음이 아까운 것입니다. 이걸 믿음의 공회전이라 합니다. 공회전으로 육체의 열매를 맺는 신자가 아니라 선행으로 양선의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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