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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생명나무의 성령열매③ - 희락(喜樂)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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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나무의 성령열매③ - 희락(喜樂)

갈라디아서 5장 19~24절

서론

성령나무의 열매시리즈, 지난 주일에는‘사랑’이라는 성령나무 열매를 전했고 오늘은‘희락’이라는 성령나무 열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 날 때 우리는 성령나무가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아홉 개의 작은 열매들을 주셨습니다. 아홉 그루의 나무를 주신 것이 아니라 나무는 하나만 주셨습니다. 성령나무. 아홉 개의 성령나무가 달린 한 그루의 나무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아홉 종류 열매를 맺는 나무라니… 신기하잖아요? 누구든지 이런 나무를 생산하면 대박입니다. 나무 한 그루에 감 배 사과 귤 호도 복숭아 능금… 아홉 개가 안 채워지네요! 바나나 옥수수 토마토… 그것도 모자라면 감자 고구마… 계절마다 달리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열린다, 상상해 하세요! 한 그루에 수십 억, 신기한 열매를 1억에 사 먹으라고 해도 부자들은 사먹을걸요? 도시락 하나에 백만 원짜리도 있다 잖아요?   

 

세상 사람들은 처음 들어보는 열매겠지만 우리는 생소하지 않습니다. 천국에는 이보다 더한 나무가 있어요. 계시록 22:2에는 천국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우리가 맺는 열매는 아홉 가지인데 천국 생명나무는 12가지, 종류가 세 개가 더 많아요! 혹시 이게 에덴에서 아담에게 주신 바로 그 생명나무는 아닐까요? 그러면 아담부부는 엄청난 축복을 누렸겠네요! 12종류 열매를 먹었으니! 선악과는 더했을까요?

 

생명나무-성령나무에 열린 아홉은 각각의 열매면서 각각의 열매가 아닙니다. 삼위일체 원리에 비유할 수는 없지만 좀 비슷한 데가 있어요! 아홉 열매는 각자 다른 열매지만 사실은 유기적인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그루의 나무, 한 몸체에서 달린 열매들이니까요!

 

그래서 바울은 사랑을 1번으로 앞세웁니다! 성령나무 모양은 쭉쭉 뻗지 않고 하트모양으로 상상해보세요! 사랑의 열매 안에 여덟 열매가 맺어가요! 사랑이 없으면 희락도 화평도 오래 참음도… 시들해져요! 사랑이 있어야 기쁨이 있고 서로 간에 화평하고 사랑이 있어야 오래 참습니다. 바울이 사랑장 고전 13장에서 그랬잖아요.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그러니까 성령 열매를 맺으려면 사랑의 은사를 가장 먼저 구하고 사랑의 열매가 풍성하도록 성령님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조건 따라 사랑하는 율법방정식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는 사랑, 측은지심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사랑… 이런 사랑의 방정식이 나머지 일곱 열매를 맺어가게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받쳐주지 않으면 믿음의 연수가 늘어나고 직분이 생길수록 나무는 자라고 잎은 무성해도 열매는 잘 안 보여요! 타고난 성품만  보일 뿐이지요!     

 

오늘은 두 번째 열매, 희락을 맺어가는 미션이 성화과정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어요! 희락은 기쁠 희(喜) 즐길 락(樂) 기쁨입니다! 영어로는 조이(jOY). 기쁨의 열매, 이거 맺으려고 굳이 평생의 미션으로 정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쁨은 본성이고 상황에 대한 반응이 아닐까요? 기쁨의 열매를 맺으라, 하지 않아도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지 말라 해도 기뻐합니다.

 

사랑해 봐요! 기뻐하지 말래도 기뻐하고 행복하지 말래도 행복합니다. 원하는 대학 들어가고 돈 생겨 봐요! 기뻐하지 말래도 기쁨이 절로 나오지요!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자식들 잘 되어보세요. 저절로 기쁨이 표현됩니다. 좋은 상황만 주어지면 저절로 기쁨이 나오는 걸, 굳이 열매를 맺으려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요? 기쁠 때 기뻐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요?

 

바울이 말하는 희락은 그냥 기쁨이 아니에요! 성령나무 열매로서의 기쁨입니다. 그것은 성령의 기쁨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어 성령나무가 되었으니 성령의 기쁨을 평생토록 지속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화성품이 되고 경건하게 복된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기쁨은 무엇인가요? 성령의 기쁨을 알아야 우리도 희락의 열매를 맺지요! 성령은 삼위 하나님입니다. 삼위는 사랑으로 유기적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요?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1 4:8)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랑을 혼자 하나요? 짝사랑도 사랑의 대상은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다, 라는 말은 하나님에게 사랑의 대상이 있다는 거예요!

삼위 하나님은 유기적인 사랑의 관계입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존경, 경배, 기쁨… 영광의 하나님을 방출합니다. 그러니 삼위하나님 사랑은 상황에, 장소에, 어떤 사건으로 기쁨이 올라가고 내려가지 않아요. 성경에서 인간의 죄로 하나님께서 근심하셨다 하는 순간에도 그건 인간을 대하는 하나님의 측은지심을 표현하는 것이지 삼위의 유기적인 톱니바퀴의 관계는 사랑으로 연결된 기쁨이 충만합니다. 스바냐는 하나님의 사랑 기쁨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습 3:17) 

 

더 이상의 기쁨이 없을 만큼 기쁨이‘만땅’이라는 거예요. 기쁨이 차버리면 내일은 더 이상 올라갈 기쁨의 꼭대기가 없다? 아니에요! 항상 오늘이 최고인 그런 사랑입니다.

 

사람들 사랑은 그게 쉽지 않아요! 처음 만났을 때, 결혼 앞두고, 결혼했을 때, 아기가 생겼을 때… 사랑이 팔팔 끓어요! 그러다 언제부터 사랑이 식는다는 느낌을 받지요! 삐뚤어졌던 눈이 제자리로 돌아온 거예요! 처음에는 한 사람만 보이고 예쁜 것만 보이니 맨날 두근거리고 행복하지요! 세상에는 오직 두 사람 중심으로 돌아가니 왜 안 기쁘겠어요? 비뚤어졌던 눈이 제 자리로 돌아오면 보이는 것도 많고 챙겨야 할 것도 많고 단점도 보이고… 아이가 생기니 사랑과 관심이 분산 되요! 그러면 사랑이 식어졌다고 이번에는 입이 삐뚤어져요!  

 

정말 사랑이 식어진 것인가요? 식어지는 것! 그거 정상이에요! 그렇게 계속 끓기만 하면 터져요! 시부모도 생기고 처가도 생기고 아기도 생겼는데도 두 사람만 있고 누가 보든 말든 저들끼리만 죽고 못 살면 그건 사랑이 아니고 철딱서니가 없는 거예요!

 

사랑은 식은 느낌이 정상이에요! 그거 식은 거 아니에요! 사랑의 방식이 달라지고 느낌이 달라지는 거예요! 우리의 사랑은 어느 선에서 상황과 온도를 맞추어야 그게 성숙된 사랑이 되는 거예요! 그러기에 사랑에는 기쁨도 있지만 아픔도 있고 속상함도 있어요! 무슨 말인가? 인간의 사랑에는 완벽한 기쁨이 없다는 거예요!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쁘게도 하고 기쁨을 앗아가기도 해요! 꼭 같은 사람인데 어찌 그래요? 사람이니까 그래요!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랑은 안 그래요! 하나님의 사랑은 어제나 그제나 오늘의 사랑이나 꼭 같은 사랑이지만 삼위일체 사랑은 매일매일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더 이상의 사랑이 없을 최고조의 사랑으로 영원히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기뻐하고 서로를 공경하고 서로의 영광이 됩니다. 이 정도가 되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기쁨은 사랑이 만들어 내는 열매입니다.

어떤 조건이 만들어 내는 기쁨… 상황으로 오는 기쁨이 아닙니다. 서로가 있어 그냥 기쁩니다. 일체를 이루어 항상 기쁩니다. 거룩하신 분이기에 서로에게서 흠(欠)이 없어 항상 서로를 사랑으로 받고 기쁨으로 영접합니다. 하나님의 근심이 되었다… 는 표현도 나오지만 삼위 하나님의 원동력은 친밀한 관계에서 오는 희락입니다. 그런 기쁨을 첫 사람에게 주고자 오픈한 동산이 에덴동산입니다. 에덴동산은 가든(Garden)입니다. 기쁨의 동산, 극락(極樂)의 정원입니다. 다른 의미로는 파라다이스(paradise) 천국,  낙원(樂園)입니다.

 

즐길 락(樂), 동산 원(園), 그러니까 에덴은 즐거운 동산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희희낙락하라고 생명과일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희락을 누리라고….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에게 말합니다. 로마서 14장 7절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천국은… 희락이라! 믿음은 기쁨입니다. 믿음이 정상대로 가동되는 증거는 기쁨입니다. 희락이 없다면 내 마음은 종교 창고입니다. 육신의 열매로 채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기뻐한 바울은 약함과 모욕과 환난 중에서도 사랑을 성령의 열매 1번으로, 희락을 두 번째 열매로 추천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기쁨의 열매를 맺는데 실패 내지는 더디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 하나님과의 느슨한 관계

성령의 기쁨은 어디에서 발원되나요? 삼위 하나님간의 관계!  쌍방형 사랑이 서로에게 기쁨이 되고 그 기쁨이 어느 정도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최상의 기쁨, 거룩한 기쁨… 계속 더 좋아질 기쁨들입니다. 이런 기쁨을 한도 끝도 없이 무한으로 이어가시는 삼위일체의 사랑… 성령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오는 기쁨의 열매를 맺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나 같은 것을 사랑하시다니… 내가 하나님을 몰랐을 때조차 나를 사랑하시고… 아직 죄 중에 있을 때도 나를 사랑하시다니… 측은지심의 사랑입니다. 내가 감히 이런 사랑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나를 위해 독생자를 희생하시기까지 사랑한 그 사랑을 내가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래서 기독교를 종교라 하지 않고 복음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영어로 굿뉴스-복된 소식,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기뻐해야 합니까, 무덤덤해야 합니까? 그 기쁨이 복음에서 오는 것이어야 합니까? 상황에서 오는 것이어야 합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복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걸 누가 공급해 주십니까? 성령님이 공급해 주십니다. 그래서 사랑의 기쁨으로 충만하면 낙천가, 낙천주의라 하지 않고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것입니다.

㈁ 죄의 본성을 억제하라!

우리가 성령열매를 맺지 않으면 원뿌리 탱자나무 근성이 올라와서 탱자를 맺습니다. 비싼 비닐, 기름 값, 설치비용 감수하면서 천혜향 비닐하우스를 만들고 탱자나무에 천혜향을 접붙이는 것은 탱자를 얻으려 함이 아닙니다. 천혜향 열매를 수확해 기쁨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에게 접붙임을 받아 성령나무-생명나무가 되었지만 탱자성향이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천혜향보다 탱자를 만들어 내려 애씁니다. 이걸 말씀과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로 누르지 않으면… 19절 이하의 육체의 열매, 들을 맺습니다. 특히 20절,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 시기 분냄과… 이건 성령의 상품이 아닙니다. 불량품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화나게 하는 불신의 죄는 없는가? 시기와 분노,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는 마음과 같은 죄된 태도를 붙잡고 있지는 않는가? 이런 태도를 고수한 채 성령의 열매만 구하는 일은 가라지를 심어놓고 알곡을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육체 열매만 달립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일로 기쁨, 구원의 즐거움을 잃었습니다. 매사에 소극적이고 귀차니즘이 왔습니다. 자원하는 심정은 사라지고 매사가 힘들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에게 기도합니다.

 

“내게서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하게 하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시편 51:10~12)

 

이와 같은 회개기도를 통해 다윗은 즐거움을 회복하고 더욱 겸손해져서 성웅 다윗이 됩니다. 성웅이라는 영광은 골리앗을 이긴 승전의 열매가 아니라 우리야를 죽인 죄에서 회개와 고백을 통한 성화의 칭호입니다. 이렇게 죄들을 청산하는 것만큼 성화기쁨이 회복됩니다.  

㈂ 삶에 대한 긴 안목을 가져라!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일비일희(一悲一喜)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일비일희는 상황에서는 오는 조건들로 기뻐하고 슬퍼하는 시소타기입니다. 하나님께 접붙였는데 본드가 약해서 헐렁!해서 충동에 휘두릅니다. 어려움이 생길 때 욱~ 하는 마음으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반응을 보이거나 자녀들에 기쁨을 올인하면 그 자녀들로 그만큼 어려움 당할 수도 있습니다.

 

돈으로 기뻐하면 돈은 두 배의 고통을 안겨다 줍니다. 세상에서 얻은 기쁨으로만 채우려 한다면 세상은 하나의 희락을 주고 두 개의 고통을 요구합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에 너무 흥분하면 영혼이 자라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들을 배우세요! 성령의 열매를 키우면 세상의 것들은 기쁨도 슬픔도 하찮게 보일 것입니다. 당장 눈앞의 누구에게 기쁨과 슬픔으로 일비일희하지 말고 하나님께 못 박히세요! 하나님만이 반석과 같은 기쁨의 근원임을 날마다 고백할 때 성숙된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 주변에 좋은 기쁨의 공급원을 두십시오!

주변에는 기쁨을 빨아먹는 하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삼상 17장에서 골리앗을 가리켜 싸움을 돋우는 자, 느헤미야 11장 17절에는 맛다냐를 감사하는 말씀을 인도하는 자…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싸움을 부채질하고 한 사람은 감사를 인도합니다. 누구 옆에 있어야 육체의 열매를 맺고 성령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까? 모세는 아셀지파에 대해 예언합니다.

 

“…아셀은… 그의 형제에게 기쁨이 되며…”(신 33:24)

 

바울은 고린도교 신자들에게 “…오직 너희 기쁨을 돕는 자가 되려 함이니…”(고후 1:24)

유진 피터슨은 “기쁜 마음으로 여러분을 바라보는 동역자입니다”로 해석합니다.

 

설교를 준비하는 금요일 오전에 0집사님이 문자를 보내왔어요! 국민일보에 <신수성가>의 인용부분을 보면서 너무 반가웠다고… 그러면서 저를 위로하는 내용을 보내주었어요! 제대로 잘하지도 못하는데 좋은 말 해주면 부끄러우면서도 기쁨이 큽니다. 그래요 우리가 싸움 돋우는 자가 아니라 맛디야처럼 기쁨을 일으키는 서로에게 좋은 형제자매들이 되기 바랍니다.

결론

감사하게도, 저에게 희락의 열매가 커요! 참 기뻐요! 이만하면 기뻐할 이유가 많아요. 우리교회와 교사의벗은 제게 주신 큰 기쁨의 선물이지요! 교회를 통해서는 기쁨을 얻고 교사의벗을 통해서는 명예를 얻었어요! 두아들 가정도 제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지요!

 

그렇다고 모든 조건이 기쁨으로 둘러싸인 것은 아닙니다. 지치고 힘들고 슬픔의 날들도 있지요. 그래도 희락의 열매가 큰 것은? 매일매일 선택을 잘 하기 때문입니다. 지루하고 불평하며 살 거냐. 즐겁고 감사하며 살 거냐? 못 받은 거 원망하며 살 거냐, 받은 것에 기뻐하며 살 거냐? 용서하며 살 거냐, 미워하며 살 거냐? 상황을 볼 거냐, 하나님을 볼 것이냐?

 

어느 손잡이를 잡을 것이냐? 그때그때의 선택은 성령님 몫이 아니라 내 몫입니다. 내 선택에 따라 기쁨이 없는 그리스도인도 되고 기쁨에 찬 그리스도인도 됩니다. 내가 기뻐하지 않는 것은 내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의 영광을 무시하는 것이며! 성령으로 기뻐하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을 경험하며 나를 지켜보는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네랑 노는 물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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