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우리 시대의 면죄부인가?
갈라디아서 2장 16절
서론
종교개혁 500주년(2017년). 개혁이니 뭐니 요란을 떨었지만 대부분 이벤트로 끝나고 다시 도루묵입니다. 개혁에 대한 구호나 심포지엄이나 있지 구체적인 로드맵(Road Map)이 없기에 행사로만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백석대학교 장종현 총장은 대신교단 심포지엄에서 한국교회가 “500년 전 타락한 중세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답습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지적합니다.
한국교회. 단시간에 부흥했고 장로교 중심이기에 교리적으로도 상당히 성경적이고 복음주의인데 왜 중세기 종교타락 교회타락의 재판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루터의 종교개혁 중심교리 이신칭의가 한국에서 잘못 이해되고 적용되는 바람에 생활개혁에 실패함으로 500년전의 중세기로 컴백하고 있습니다. 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3대 정신은?
-성경의 권위. 모든 권위는 성경 아래로 내려서야 한다. 교회도 교황도!
-이신칭의.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을 받는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
-만인제사장설. 모든 그리스도인은 누구든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루터가 찾아낸 진리입니다. 이전에도 이런 가르침은 있지만 교황청에 말하지 못하고 대중들에게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루터가 성경대로 하자며 교황청의 종교개혁을 외쳤습니다.
500주년이 지난 지금 개혁을 외치고 분리되었던 개혁주의교회가 개혁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가 루터의 교리 때문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천국에서 루터가 가슴을 칠 일입니다.
개혁주의교회는 루터의 3대 정신 중에서 2대 교리는 잘 지켜오고 있습니다.
-성경의 권위. 개혁주의교회, 특히 한국교회는 성경 66권을 절대적으로 신봉합니다. 성경 한 구절이라도 잘못 해석하면 가차 없이 이단으로 정죄합니다. 아직은 보수성을 띄고 있습니다.
-만인제사장설. 모든 그리스도인은 제사장이다! 베드로전서에 나온 왕 같은 제사장설을 받아들이고 어느 나라 교회보다 더 많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직접 상대합니다. 잘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신칭의’(以信稱義)교리입니다. 이신칭의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입니다.
칭의란 법정적인 선언입니다. 죄인이지만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신분이 법적으로 변경된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구원은 믿음과 행위가 결합한 결과라는 교황청의 구원론에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로워지며 구원이 가능하다며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다른 말로는 이신득의(以信得義), 루터가 최초로 사용한 신학적 용어입니다.
이신칭의 교리는 에덴동산에서 등장합니다. 범죄한 아담부부에게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동물의 희생과 그 피에 근거해서 아담을 의인의 신분이라 칭해주시면서 그 자손-여자의 후손을 통한 에덴으로의 복귀를 보장해 주셨습니다. 의인에게 걸맞은 보상입니다. 아담하와는 은혜로운 약속에 아멘! 믿은 것입니다. 죄인의 상태이지만 의인의 신분으로 칭함을 받고 그에 맞는 보호를 받은 것입니다.
아담하와가 의인이 될 만한 행동을 했나요? 하나님이 될 것이라는 거짓말에 속아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신이 되지 못했습니다. 무슨 결과만 남았습니까?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아담하와가 불순종의 죄로 떨고있을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셔서 가죽 옷을 만들어 입히고 몸을 가려주십니다. 그리고 은혜롭게 의인이라 칭함 받게 됩니다. 이것이 이신칭의라는 교리입니다.
이런 속죄교리가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창세기 15장입니다. 아브라함은 포로가 된 조카 롯을 구하느라 가나안원주민들과 적대적 관계가 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사병 318명이 전부입니다. 계속적으로 원주민 군대와의 싸움에서 이겨낼 수 없습니다. 가나안의 벌집을 건드린 것입니다. 당연히 두려움에 떨었지요! 그때 여호와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말씀하십니다.
“걱정마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내게는 소생 하나 없는데 민족의 조상이라는 큰 상급이 가당한 일입니까?”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그때 아브람이 아멘! 믿습니다!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 얼른 수용합니다.
6절,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여호와를 믿으니⋯. 우리말로 아멘! 히브리어는 ‘아만’으로 '신뢰하다'(대하20:20), 아브람이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신다는 사실과 민족의 조상이 된다는 약속에 아만! 믿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가능성 제로지만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는, 어라~ 얘가 내 말에 100% 믿네! 그렇다면 내가 의(義)로우니 당연히 너도 의로운 사람, 의인이다! ‘의의 옷’을 입혀 주심으로 차다크, ‘의로운 상태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어떤 허물에도 불구하고 항상 의인으로 대해주시며 의인이라 칭해주십니다. 이런 은혜가 이신칭의 개념입니다!
이신칭의(以信稱義). 이(以), ⋯로부터, 까닭에, 믿을 신(信), 그러니까 믿음으로써, 믿음까닭에⋯ 칭(稱), 일컬을 칭, 옳을 의(義)-의인이라 칭해진다~
이신칭의 교리는 히브리인들의 전통적인 신앙입니다. 율법을 받은 후로도 율법을 통한 구원에 의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했습니다. 대표적 인물이 모세, 다윗입니다. 특히 다윗은 자기 속에 의(義)가 없다 했습니다. 죄악 중에 출생했다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고 구원 받을 수 없다는 자기부정이요 죄인의식입니다.
이랬던 민족들이 언제부터 율법구원, 행위구원을 말하기 시작했는가? 바벨론 70년 포로와 그 이후입니다. 시대적 배경이 행위구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저들은 나라와 성전과 민족을 잃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축복을 몰수당한 것입니다. 국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주변 강대국이 강해서도 아닙니다. 근본적인 원인을 저들은 죄에서 찾았습니다. 율법을 버렸기에 하나님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버렸던 율법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릇된 행위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율법의 스승 에스라 주도 하에 의해 율법준수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게 너무 강하게 일어나고 도(道)가 지나쳐, 율법이 그들의 육체적 행실을 정결하게 한다는 것이 자신을 의롭게 하는 공로사상으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그러면 의(義)는 누구의 것이며 어디서 옵니까? 스스로에게서 생성됩니다. 계명 지키고 율법 지키면 의로운 자가 되고, 하나님은 스스로 의로워진 자들에게 너는 이제는 의인이다! 하늘나라에 입국할 자격을 취득했으니 너는 내 거룩한 백성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없어요! 하나님은 그들의 선한 행위 결과를 보고 의인이다, 결과만 발표한 격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렇게 율법지상주의가 은혜의 종교를 율법종교로, 행위구원 종교로 만들어 내고 만 것입니다. 구원문제에서 하나님을 아주 우습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하실 일을 하셨습니다. 은혜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지키신 것입니다. 그건 에덴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을 통한 구원입니다. 이 약속을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신다는 이신칭의 계약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약속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는 마리아 동정녀 몸에서 예수를 낳게 하셨습니다.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 죄에서 구원해주실 구세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어 피를 흘리시고 그 피의 옷을 우리에게 입히셨습니다. 피의 옷을 입히니 죄가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예수를 믿는다 하면서도 우리 속에 죄가 있음을! 그러나 예수의 피만을 보고 그 죄가 속했다고 간주하십니다. 그래서 내가 지은 죄들은 간과하시고 의인이라 간주하시고 의인이라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사실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 믿음까닭에 하나님께서 의인이라 칭해주십니다. 물론 그 믿음도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셨으니 의인됨에 우리가 한 일은 하나도 없고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우리가 의인이 되기 위해 할 일도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 그 자체가 의인 칭함의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가능하다! 이게 바울신학의 중심입니다. 초대교회가 이런 은혜복음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의 무거운 짐에 눌려있던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이라 칭함을 받는다는 교리는 복음 자체였습니다. 율법행위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의인이 안 된다는 사실을 오랜 종교생활을 통해 뼈저리게 느꼈기에 복음은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나 사설(邪說)이 있고 이단은 있게 마련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이단이 들어왔습니다. 그 이단이 바로 율법주의, 행위구원자들입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거짓 교사들이 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 의인이 되고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전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답이 16절입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내가 이런 사실을⋯ 3:1,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박힘으로 우리 죄가 도말되고 부활하심으로 우리가 의인의 신분을 얻었음을(롬 4:25)⋯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이런 사실을 플래카드에 적어 만천하에 전시했거늘 누가 너를 꾀어 다른 길로 가게 하더냐?
11절,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만약에 이런 가르침을 전한다면 그건 복음이 아니라 1:6, ⋯다른 복음이요 다른 복음을 전하고 믿으면 8절⋯ 저주를 받을 것이요 9절,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구원의 믿음에 행위를 덧붙이고 인간의 의인됨에 인간노력을 가미하는 행위를 7절 ‘다른복음’이라 하고 갈라디아교회에서 이런 이단이 일어났다고 하여 갈라디안주의라고 합니다.
이런 갈라디안주의, 믿음+행위=구원이라는 교리가 사라지는 듯 했는데 어디로 흘러 들어갔는가? 로마교회로 숨어들었습니다. 로마교회가 왜 이런 ‘다른복음’을 쉽게 받아들였는가? 카타콤교회가 로마의 주류종교 바벨론교와 혼합되면서 바벨론종교의 제도와 교리를 수용합니다. 교황제도, 고해성사, 신전성당종교, 독신제도⋯ 이런 성당과 제도를 운영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면 교황이, 고해성사가, 보속이 무슨 돈이 되겠습니까? 돈으로 성당을 짓고 중세교회 사제들이 엄청난 수도원을 만들고 독실ㅇ한 신자들에게 기부금을 받아 운영하는데 돈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행위와 연결해놓으니 돈이, 헌금이 들어옵니다.
루터는 천성적으로 굉장히 엄격한 사람입니다. 친구가 눈앞에서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그 길로 수도원으로 들어갔기에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컸습니다. 수도원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소리에도 하나님의 분노를 느끼고 두려워했습니다.
루터는 수도사로 살면서 죄문제로 고민하고 바울처럼 내 안에 죄가 도사리고 있음에 힘들어 했습니다.
로마를 순례하면서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죄를 회개했습니다. 자기 행위로 의로움을 받기 위해 엄청 선을 행했습니다. 그래도 죄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면서 피가 납니다. 그때 로마서 1:17이 그의 가슴을 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때 복음을 안 것입니다. 아! 의(義)는 하나님께서 거저 입혀주시는 것이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죄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이신칭의’라는 교리, 단어를 발견하고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이런 평화를 모든 그리스도인들도 누릴 자격과 자유가 있음을 선포하는 종교개혁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신칭의 교리가 지금은 둔갑해서 오히려 이 교리가 믿음을 변질키시고 교회타락의 주범으로 몰리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지 믿음으로 완벽한 의로움을 얻은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인가? 내가 지금 의인이 아님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속죄사역 안에서 의인이라 칭해주고 간주해 주는 것이지 내가 현실적으로 의인이 되어 의인이라 대해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교리를 잘못 이해해서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되었다~ 더 이상 구원을 위한 노력, 거룩한 행위를 등한시하고 만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천국입장표는 받아놓았으니 열심도 필요 없고 죽을 둥 살둥 죄를 짓지 않으려 할 것도 없다! 주일 교회 가서 회개하면 이왕의 죄처럼 용서를 받을 텐데 죄 짓지 않으려고 고민하고 몸부림칠 필요가 없다? 그러다보니 오늘의 설교, “이신칭의, 우리 시대의 면죄부인가?”라는 제목이 있는 것입니다.
이신칭의가 제대로 하나님의 은혜가 되고 선물이 되려면 성화와 같이 가야 합니다. 장로교의 시조 칼빈은, “성화 없는 칭의만 경험할 수 없고, 성화 없는 칭의로만 구원받을 수도 없다”고 말합니다. 칭의와 성화는 결코 분리될 수 없는 단일한 은혜의 두 면입니다.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 것은 확실하지만 성화의 노력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믿음으로 의인이 되지만 그건 신분 영역이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살기위해서는 성화가 동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가 없기에 지금 한국교회는 다시 율법종교로 아니면, 율법이 필요 없다는 율법폐지종교로 흘러가고 있고 500년 전의 중세기 어둠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사는 길은 종교개혁의 3대 정신 중에서 이신칭의의 교리를 바로 세워 종교개혁가들의 “오직”이라는 5대 강령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께 영광”
이것은 제2의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함을 뜻합니다. 제1의 종교개혁이 제도와 교리에 대한 개혁이라면 제2의 종교개혁은 생활에 대한 생활개혁을 말합니다. 우리가 실제적인 삶에서,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구체적인 로드맵(Road Map)을 정해놓고 차곡차곡 생활과 성품에서 개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리가 좋고 제도가 좋아도 하나님의 눈에 들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은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은혜로 돌아가서 그분의 긍휼을 의지하도록 합시다! 그래야 개혁은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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