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밀알, 우리 교회
요한복음 12장 24, 25절
서론
우리교회가 설립 33주년을 맞습니다. 33주년,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잔이 넘치나이다!” 개척교회는 열에 열 개가 일어서지 못한다는 한국교회, 5만 교회 중 100명 미만 교회가 60%라는 열악한 목회현실에서 늘빛교회가 이만하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며 여러분들이 보여준 믿음과 헌신입니다! 한 주간 혼자 이 노래를 몇 번 불렀어요!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보아도 그 어느 것 하나 주의 손길 안 미친 것 전혀없네"
그래요! 우리교회 설립 33주년! 우리 주님의 보살핌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설립주년 예배는 그냥 축하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손길을 더듬어 보는 감사의 회고주일입니다.
우리교회 설립 33주년~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신 나이입니다. 공자는 예수님보다 500여년 일찍 출생했고(BC 551년~BC 479) 73세 사망합니다. 공자는 하늘에 관한 관심보다 땅에서 이상적인 국가를 꿈꾸었던 정치가요 군자(君子)였습니다. 사람의 나이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나이 15세에 지학(志學)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세에 이립(而立) 나의 입장이 뚜렷한 사람이 됐고 40세에 불혹(不惑)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는 사람이 됐고 50세에 지천명(知天命) 하늘의 뜻을 아는 사람이 됐고 60세에 이순(耳順)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공자는 30세에 뜻을 정했다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뜻을 정한 것이 아니라 그 뜻을 위해 죽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이 본문입니다. 24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33세의 청년은 죽음보다는 희망과 비전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야 신도들이 많아지고 제자로 입문하려 줄을 설 텐데 청년 예수는 뜻을 정할 나이에 죽음을 예고합니다. 공자와 같은 세상을 보았다면 오래 살면서 학업에 통달한 72명 수제자(72현)와 3천명 제자를 거느렸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 꿈꾼 세상은 정치를 통한 인본주의 세상!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위한 스승보다는 세상의 구세주였습니다.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은 가르침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역으로 가능합니다. 이게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심판을 잠재우기에는 누군가는 속전의 생명을 지불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하게 하셨은즉 그의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사53:10)
여기서 ‘씨’는 후손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 씨가 되고 밀알이 되는 속죄희생을 통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을 공자보다 100년 앞서 살았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하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바로 선지자가 말했던 희생제물이요 하나의 씨, 밀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양(羊) 한 마리가 죽어 백성들의 죄를 속하던 이스라엘의 속죄제사를 농사를 짓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양식에 맞게 당신의 죽으심, 속죄사역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 진리! 그 희생! 그 정신! 예수님의 그 가르침이야말로 33주년을 맞는 우리 늘빛교회가 간직하고 다음세대들에게 전해야 하는 교회의 존재목적이자 이유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죽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그 한 알은 어떤 밀알입니까?
1. 생명의 밀알입니다.
2002년, 중국 동북부에 가뭄으로 연못이 마른 웅덩이에서 씨앗을 발견합니다. 정밀검사를 해보니 500년 묵은 연꽃 씨입니다. 미국 과학자들이 배양했더니 놀랍게도 싹이 났습니다. 세상에! 500년 묵은 씨가 꽃을 피웠다? 믿어지십니까? 연못에 떨어진 꽃씨들이 많을 텐데 어찌 이 연꽃은 500년에 꽃을 피운 것입니까? 생명이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생명이 없다면 1년이 지나도 싹이 나지 않을 것이요 생명이 있으면 천년 묵은 씨에서도 싹이 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의 밀알은 생명의 씨앗이 있습니다. 아무 계란이나 병아리가 되지 않지요. 무정란은 생명이 없기에 부화기에 넣어도 부화되지 않고 식용일 뿐입니다. 씨도 생명이 있어야 싹이 나오고, 달걀도 생명이 있어야 병아리 울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성경은, 세상 모두에게는 영생의 생명씨앗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죄로 인해 죽은 씨앗으로 태어납니다. 모두 무정란 같은 땅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요6:51)
예수님에게는 영생의 생명이 있습니다. 떡을 먹으면⋯ 물을 마시면⋯ 나를 믿으면 영생하리라~ 예수님은 영생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영생하시는 하나님 본질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은 출생도 없기에 죽음도 없는 영생의 생명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알았습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6:68)
우리 생명은 땅, 어머니에서 출발합니다. 어머니의 생명은 죽음을 전제로 하는 한시적 생명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에게 접목되는 것입니다. 접목은 예수님의 영생씨앗이 내 생명에 이식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진실된 믿음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구세주라 고백한다면 내 안에는 예수 생명이 있고 영생하는 생명을 가진 씨앗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생명이 있으면 우리는 더 순결해지고 더 강해지고 더 생산력이 나타납니다.
우리교회는 예수 생명을 전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자꾸 종교화 됩니다, 세상에 이바지하는 종교, 내게 유익을 주고 힐링을 말하는 교회⋯ 인본주의 기독교를 만들려 합니다, 인본주의 기독교는 윤리도 있고 휴머니티도 있는데 생명이 없습니다. 영생을 도외시하는 기독교는 종교기독교는 되어도 영생을 주는 예수생명의 기독교는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밀알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나요? 거듭난 사람들에게만 영생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이 세속에 물들어 썩으면 안 됩니다. 썩은 것은 생명을 틔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명을 내 가슴에 품어야 합니다. 그래야 싹을 틔우는 한 알의 밀알이 됩니다.
2. 희생하는 밀알입니다.
아무리 생명력이 든든한 밀알이어도 그냥 있으면 하나로 끝납니다. 알이 알차고 맛있고 멋있다고 제 몸뚱이 뽐내다 간다면 그것 하나로 썩어버리고 맙니다. 싹을 틔울 수도 많은 열매를 맺을 수도 없습니다. 땅에 떨어져 썩으려는 그 희생을 통해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희생의 종교입니다. 가장 많은 핍박을 받았고 순교자를 냈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세상을 위해 희생하고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이슬람은 남을 죽여 순교자가 되지만 기독교는 자기를 희생해서 남을 살립니다. 성경에서 빗나간 인본주의 교회들은 남을 공격합니다.
진정한 기독교는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선교는 그 자체가 희생이요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는 각오입니다. 그런 사람들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한 사람의 복음이 세계화가 되었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인류를 위해, 나 하나를 위해 아낌없이 한 알의 밀알로 죽으시더니 제자들도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땅에 떨어져 희생했습니다. 불에 타서 죽고 톱에 쓸려 죽고 짐승들의 먹이로 내주었습니다. 고문을 받다 죽었습니다.
기독교는 그처럼 희생하는 밀알로 시작되고 지금도 공산권-이슬람권에서 자기를 희생하는 무명의 그리스도인들⋯ 선교사님들로 많은 열매들이 맺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1956년, 미국 명문 휘튼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짐 엘리엇을 비롯한 5명의 크리스천 젊은이들이 남미 에콰도르의 와오다니(아우카)족에게 복음 전파를 위해 들어갑니다. 백인이 접촉해서 살아남은 사람이 없다는 사나운 부족입니다. 선교사들은 경비행기를 타고 바구니에 성경책과 선물을 내려주는 시간을 가진 뒤 강가에 비행기를 착륙시키지만 창에 찔려 살해당합니다.
끔찍한 비극은 미국 전역을 들끓었습니다. 언론은 ‘이 무슨 낭비인가(What a waist!)’라는 제목으로 비난합니다. 전도유망한 청년들이 너무나 허망한 죽음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엘리엇 부인이던 엘리자벳은 ‘이 무슨 낭비인가’라고 쓴 기자에게 남편이 휘튼대학에서 썼던 일기장을 보여줬습니다. 수많은 크리스천의 가슴을 격정적으로 만든 문장이 거기 있었습니다.
“영원한 것을 위해서 영원하지 못한 것을 버리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하지 마라.”
“주여! 이 쓸모없는 나뭇개비에 불을 붙여 주소서. 제 삶을 주의 영광을 위해 태워 주소서. 오래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해 풍성한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아내들이 남편 뒤를 따라 아우카족에게 들어갑니다. 정글생존훈련과 아우카족과 친해지는 방법을 터득한 뒤 마을로 들어가 정성껏 부족들을 섬겼습니다. 그들은 여인은 죽이지 않는다는 전통이 있습니다. 추장을 비롯한 아우카족들이 헌신에 감동했습니다. 아우카족 전체가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선교사들을 창으로 찔렀던 5명의 원주민 중에 4명은 목사, 한 명은 전도자가 됩니다. 그 중의 하나는 살해된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 스티브 세인트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부인들이 본국으로 떠날 때 추장이 “무엇 때문에 우리를 위해 이 고생을 하십니까?” 물었습니다. 엘리엇의 부인 엘리자벳이 대답했습니다.
“남편들은 하나님을 알려주기 위해 왔지만 당신들이 죽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남편들이 당신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들려주기 위해 왔다. ‘예수님은 여러분을 사랑합니다’.”
헌신과 열정, 희생, 사랑과 용서가 기적을 낳은 것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이 있어 인류에게 구원의 길이 열렸습니다. 성육신 자체가 희생입니다. 힘이 없어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것도 아닙니다. 구원을 위해! 남을 살리려 희생하신 것입니다. 진정한 믿음을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직분이 많은 것은 자기를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가 일급 수(水)가 아니라 오염 중입니다. 오염된 고기는 아무리 커도 먹지 않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변질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세상이 종교를 버리는 것은 아닌지⋯.
우리 늘빛교회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으로 되어진 교회입니다. 그런 희생을 나열한다면 오늘 하루 종일이라도 시간이 모자랍니다. 그만큼 여러분들에 대한 제 고마움이 큽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28절,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님께서 답하십니다. 29절 30절!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여러 배로 열매를 내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3. 잠재력이 있는 밀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알의 밀알이 희생하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씨뿌리는 비유에서는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교회가 내세울 수 있는 교회는 아니어도 33주년 만에 400배(2인X400=800명) 가까이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의 밀알에는 엄청난 잠재력이 있습니다.
잠재력은 씨앗과 같습니다. 잠자고 있는 힘입니다. 저장된 힘입니다. 언제라도 폭발할 수 있는 깊이 묻혀있는 힘입니다. 이 힘을 계발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손에 있는 씨앗을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으셨을까요?
“제 손에 뭐가 있습니까?”
“씨앗입니다!”
“그건 사실이지만 진실의 전부는 아니오!”
“그럼, 진실은 무엇입니까?”
“진실은 내 손바닥의 씨앗이 그냥 씨앗이 아니라 내게는 숲이오! 나는 숲을 보고 있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잠재력은 현재가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입니다.
한 장애소년이 잔디를 깎았습니다. 처음에는 5달러를 받았습니다. 열심히 하니 다음 주간에는 10달러를 받았습니다. 자신감과 재미가 붙었습니다. 열심히 노력해서 몇 달 만에 200달러를 벌었습니다. 주인이 말합니다.
“너는 2백 달러를 받을 수 있는데 왜 5달러로 살려고 하느냐?”
장애소년은 장애만 보다가 자신에게 있는 잠재력을 봅니다. 그 잠재력으로 성공합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서 어떤 잠재력을 보십니까? 아버지와 형들, 사무엘조차 목동으로 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는 한 왕을 보았느니라!”(삼상 16:1)고 말씀하십니다.
생명을 가진 밀알의 최고 잠재력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온전히 닮아갈 수 있는 잠재력입니다. 포유류 5,400여 종(種)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잠재력을 심어놓은 것은 사람 밖에 없습니다. 그걸 사탄은 파괴합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선악과만 따먹으라 합니다!
지금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가라 합니다. 절대 희생하지 말라 합니다. 네 인생은 너를 위한 것! 하나님이든 누구든 희생하지 말라 합니다! 그런 사탄의 가르침이 교회 안에도 번지고 있습니다. 교회의 씨앗들이 생명을 잃어갑니다. 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생명의 근원과 다시 연합해야 합니다. 생명이 없는 채 자기를 희생하고 인본주의로 자선, 배려는 죽은 생명들을 낳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요한복음 3:6 “육은 육으로 끝난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다! 영으로 나야 영이다!”
참 포도나무 생명이신 예수님에게 붙어 그 생명을 받아 많은 열매를 맺어드리는 교회가 되기를 다시 다짐합시다!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합시다! 희생의 위대함을 보입시다!
결론
러시아 시인 라졸 캄자도프의 ‘사랑의 노래’를 선물하며 주님의 마음을 다시 전합니다.
만약 그대를 천명의 사나이가 사랑한다면/그렇다면, 그 천명중에는 나, 라졸도 끼어 있을거요.
만약 그대를 백 명의 사나이가 사랑한다면 /그 백 명 중에 나, 라졸도 끼어 있을 거요.
만약 그대를 열 명의 사나이가 사랑한다면 /그 열 명중의 하나는 나<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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