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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마가복음 9:2~8)

by 강정훈말씀닷컴 2023.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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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멘 다음이 중요하다!

마가복음 9장 2~8 절 

서론

지난주일 설교는 베드로의 시험에 관한 말씀입니다. 생전에 시험근처에도 가지 않을 사람, 그 베드로가 시험 들었습니다. 바다에서도 살아남은 강한 사람이 왜 시험 들었나요? 더 많이 인정받고 칭찬받고 싶었는데 꾸중을 들으니 자존심 상하고 마음 몰라준 선생님이 야속한 거죠.

시험을 당한 베드로, 6일을 어떻게 보냈나요? 섭섭병이 들어 구원의 즐거움과 자원하는 심령이 싸악~ 사라졌습니다. 하루 종일 시쿤둥~ 제자생활에 재미를 잃은 것입니다. 베드로를 시험에 그냥 두었다면 자신은 물론 제자공동체는 어떤 분위기였을까요? 매사에 딴죽을 걸었을 거예요!, 나 몰라라~ 방관 자세, 제자그룹 이탈하고 뱃사람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겠지요!

 

예수님께서 그 사정 모르겠어요? 베드로 놔두면 안 되기에 시험을 극복하는 길로 인도합니다.

 

-최고의 장소. 2850미터 높은 은혜의 산. 여러 시간을 걸으며 길과 산이 주는 치료 받지요.

 

-최고의 영성가. 모세는 구약율법의 대표자, 엘리야는 선지자와 예언의 대표자. 두 사람이 출현해서 십자가 사역을 논의하는데 그 귀한 일에 베드로는 어떤 모양이었나요? 훼방했었지요!

 

-최고의 영광. 예수님은 그런 영광이 내면에 있으면서도 모욕과 거절로 얼마든지 시험에 들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면이 강했기에 시험을 영광으로 만들고 유혹을 이겼습니다.

 

-최고의 음성, 내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니 마음이 녹아지고 시원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최고를 동원해서 베드로를 일으켜 세웁니다. 베드로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 그 활달한 성질이 돌아옵니다. 은혜가 돌아온 것이지요! 6일을 풀 죽어있던 사람이 뭐라 합니까?

 

5,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기라는 말은 장소를 말하지만 베드로의 심정, 상태를 말해줍니다. 초막을 지어드리겠다는 말은, 모세와 엘리야는 하늘로 올라가지 말고,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마시라는 것입니다. 지난 6일이 얼마나 마음고생 했으면 세상만사 다 잊어버릴 무릉도원 같은 이곳에서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세 분을 모시고 심부름 하면서 살고 싶다 했겠어요?

 

베드로, 엿새 만에 시험은 물러가고 은혜로 충만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좋사오니~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마가는 베드로의 행동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베드로가 자신이 하는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무심코 내뱉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아서 아멘~ 아멘~ 해 놓고 예수님의 생각은 무시하고 우리끼리 여기에서 놀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변형된 모습, 영광,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준 이유는 무엇일까요? 높은 산에 기도원 세워놓고 기도와 예배를 드리며 오순도순 살라고 이런 체험을 주셨나요? 세 제자는 제자공동체 선두그룹입니다. 산 아래의 다른 미션을 위해 영광을 체험하게 합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과 상의하는 말을 들었기에 누구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이해하게 됩니다. 셋은 영광도 보았고 하나님의 음성도 들었습니다. 대단한 신앙적 체험입니다.

 

왜 이런 특별한 체험을 허락하셨나요? 다른 아홉 명 제자들에게는 이런 신비한 체험이 왜 허락되지 않았을까요? 이런 광경을 목도했다면 가룟 유다는 배신하지 않을 수도 있고 도마는 만성적인 의심병에서 일찍 헤어 나왔을 것입니다.

 

베드로와 두 제자에게만 이런 신비경험을 주신 까닭은 그들의 사명, 책임이 컸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 사후에 선두그룹이 되어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키고 세계화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시험도 유혹도 더 많고 핍박도 더 쎄게 받을 것입니다.

 

이런 영적 체험이 있기에 시험받을 때마다 변화산 은혜로 시험을 이겨낼 것입니다. 유혹이 왔을 때 예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세상권세와 명예는 하찮게 여기게 됩니다. 핍박이 왔을 때도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크게 위로를 받고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게 흔들리지 않는 지도자 자리로 세우기 위해 6일 동안 시험에 빠졌던 베드로, 언제라도 시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는 요한과 야고보에게 남들에게는 없는 은혜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랬더니, 제자들에게서 어떤 일이 반응이 일어났나요? 할렐루야~ 아멘~ 은 혼자 다 하면서 이번에는 예수님을 시험 들게 하는 사단 노릇을 또! 합니다.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을 지어 여기서 삽시다! 먹을 것 입을 것 우리가 다 책임집니다. 산 아래에는 주님을 대적하는 시끄러운 놈들로 가득 차 있는데 내려갈 것 뭐 있습니까? 여기에서 율법과 예언을 논하고 종교진리나 가르쳐 주세요~ 우리가 잘 배우겠습니다.”

 

세상말로 은혜의 영성 장소에서 신선(神仙) 노릇이나 하라는 것입니다.

 

엿새 전에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에서 죽지 말라 막더니 지금은 산 아래로 내려가지 말고 여기 은혜로운 곳에서 할렐루야~ 아멘~이나 하며 지내자는 것입니다. 엄청 믿음이 있는 말로 들립니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소리지요. 그래서 유진 피터슨은 <메시지> 성경에서 

 

6절을,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무심코 내뱉었다고 해석합니다.

 

오늘 설교의 핵심단어는 이것입니다. 무심코 내뱉은 아멘! 할렐루야~ 설교 중에 아무런 긴장감이 없이 내 마음에 들면 아멘! 하는 것, 뱉어놓고 아무 생각도 없는 것! 이것이 문제입니다.

 

기독교신앙에서 아멘은 아주 좋은 단어입니다. 설교 때 회중들이 아멘!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설교에 손뼉을 져주는 응원가입니다. 그런 회중들이 있으면 설교에 가속화가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멘의 의미가 무시되고 있습니다. 아멘은 옳습니다, 믿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믿은 대로 실천하겠습니다! 이게 아멘! 인데 한국교회에 아멘은 노래할 때 흥을 돋우기 위한 추임새, ‘얼싸 좋다~’ 흥겨운 노래에 장단을 맞추며 흥을 돋우는 여흥구와 추임새로 이해됩니다.

 

사실 아멘!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아멘! 속에는 자기 포기와 자기희생!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가 어떤 희생을 치러도 선포되는 말씀대로 살겠다는 결단이자 반응입니다. 그러기에 아멘! 할 때는 심사숙고 가운데 나와야 합니다.

 

한국교회 강단언어의 영향력, 범위, 한계는 어디까지입니까? 예배당 안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정도에만 설교는 영향을 미칩니다. 설교의 기능은 은혜를 받기 위해서만 필요합니다. 세상이 갈수록 설교는 지키기 위해 받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는 쪽으로만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는 위로와 힐링이 되어야 하고 그러려면 은혜로운 내용이어야만 합니다. 이런 내용 앞에서 아멘! 할렐루야~가 나옵니다. 결단을 요구하거나 잘못된 행태를 지적하고 책망하면 치는 설교라 치부합니다. 이런 때는 아멘! 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에 맞으면 아멘! 틀리면 노멘! 그러다보니 목사는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아멘! 만 책임지려 합니다. 성경공부의 역할은 성경을 더 많이 알도록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개 끄덕이도록 합니다. 지적 만족감입니다. 끄덕이는 지식을 삶으로 행동으로 이어내지 못합니다.

 

그러면 어떤 결론이 나오는가? 학교우등생이 사회 우등생이 되지 못하는 경우입니다. 성적과 지식은 세상사는 데 아무 도움도 되지 못하는 죽은 지식인데 죽은 지식을 전하는 교수들에게 아멘! 아멘! 열광했던 것입니다.

 

진짜 지식은 어떤 지식입니까? 홍익인간 아닙니까? 남들보다 더 열심히 배우고 하나라도 더 많이 알려고 밤낮을 자지 못하고 공부하는 까닭은 세상에 도움 주고 유익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기에 참교육은 학교 안에 머무르는 지식, 답안지에서만 위력을 발휘하는 지식이 아니라 세상에 나가서 웃는 자들과 웃고 우는 자들과 울고 건강한 자들과 힘을 모으고 병든 자들에게는 힘이 되어 세상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내는 미션이 배움의 목적입니다. 그러기에 많이 배웠으면 그 의무와 책임이 남들보다 더 큰 것입니다. 그러나 배움 이후의 홍익적인 삶이 없기에 학교의 지식은 죽은 지식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을 헛똑똑이라고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입으로만 아멘! 하는 은혜에만 매달려왔습니다. 아멘! 아멘! 하면 다 되는 줄로 알았습니다.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으면 신앙이 좋고 믿음생활 교회생활을 잘하는 신자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멘도 중요하지만 아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멘 이후 우리의 행동입니다. 아멘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아멘! 은 미사일이 되지만 생활로 이어지지 못하면 아멘! 할렐루야는 공포탄에 불과합니다. 아멘고백만 아니라 아멘행동이 용사를 만들어 냅니다.

 

베드로, 여기가 좋사오니~ 아멘 할렐루야~ 여기에 있자고 합니다. 은혜를 받았으니 좋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막을 지어 여기에 살자 합니다.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7,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베드로가 보여주신 은혜에서 아멘! 하며 여기에 있자하니 예수님께서 옳다하셨나요? 나도 이런저런 사람들로 골치 아프다~ 이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십자가를 질 생각을 하니 두렵다~ 너희가 초막을 짓고 은혜생활을 한다 하니 나도 그게 좋겠다! 오케이! 그렇게 하셨나요?

 

예수님께서 은혜 받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하십니까? 데리고 하산하십니다. 산 아래에는 14절 이하, 제자일행이 귀신에 들린 자들과 싸움을 하느라 엉망진창이 되어 있습니다. 고된 현실이 또 시작입니다. 산위에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변형되는 은혜를 맛본 예수님, 그걸 뻔히 알면서 산 아래로 내려옵니다. 삶의 고민이 있고 딜레마가 있는 곳으로 하산하십니다! 은혜의 산에 고립되어 있는 길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은 것만큼 세상을 섬겨야 한다! 아멘으로 은혜를 받았으면 삶으로 은혜의 지경을 넓혀야 한다! 이것이 예수님 신앙입니다!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은혜 이후의 실천, 아멘 이후의 행동을 몸소 실천으로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후, 베드로는 선생님의 교훈을 잘 받들어 아멘신앙만 아니라 믿습니다~ 아멘~을 실천해서 은과 금은 없지만 예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의 대장부가 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가 부끄러운 모습을 많이 보였습니다. 십수년을 싸우는 대형교회! 누구의 잘잘못을 떠나 제자훈련의 원조교회입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제자상은 어떤 제자입니까? 예수님의 어느 제자가 그렇게 싸웠나요? 자살자 중에 유명 장로님 집사님들이 있고 크리스천 연예인 자살자들이 많습니다. 무기중개업 연예기획업을 하는 회장 장로님은 벌어들인 돈을 감추기 위해 예배당 건축을 하면서 동생 목사만 알게 예배당 벽장 속에 비밀금고를 만들었다 들통~났습니다. 강동구의 어느 권사님은 혼수감, 예단이 적다고 며느리에게 갑질하다 방송에 나와서 한국교회에 먹칠을 했습니다. 모두 교회에서는 은혜를 받고 아멘! 아멘~ 하던 직분자들입니다.

 

교회에서 아멘! 하고 은혜 받고 나간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것입니까? 어떤 세상이기에 우리의 아멘! 을 그렇게도 무력화하며, 얼마나 쎈 세상이기에 구령처럼 외쳤던 할렐루야~ 고백을 이렇게도 무기력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사는 세상이 그렇게 쎈 세상입니까? 도대체 어떤 세상이기에 아멘을 삶으로 살아낼 수 없는 것입니까?

 

우리는 압니다! 세상이 쎄서가 아닙니다. 우리의 자세들, 특히 설교를 듣는 자세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의 아멘! 은 여기가 좋사오니~ 오늘 말씀이 듣기에 좋다! 은혜가 된다!~ 위로가 된다! 힐링이 된다~ 그런 면에서 아멘~ 하는 것이지 그 말씀대로 살려는 선언, 선포가 아닙니다. 그냥 구호처럼 외치고 길들여진 사람들처럼 설교가 마음에 위로가 되면 장단에 맞추어 추임새를 놓는 얼씨구나~ 그거입니다. 그래서 설교를 끝나면 아멘도 잊어버립니다.

 

내가 무엇에 대해 아멘! 했는지, 몇 번을 아멘~ 했는지 내가 아멘~하고 살아가야 할 말씀은 무엇이었는지 처음부터 실행하려고 들은 말씀이 아니기에 아멘과 함께 잊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설교 이후 아멘을 선포한 사람이나 아멘을 모르는 사람이나 다른 게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교회생활을 해 왔고 직분은 점점 높아졌습니다. 그러나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서 한홍 목사님은 <아멘 다음이 중요하다>라는 책을 냈습니다. 책의 표지에는 입술의 고백이 삶으로 증명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습니다. 아멘이 시작이 아니라 끝이 되어야 한다, 아멘이 입으로 시작해서 가슴으로 손과 발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요즘과 같은 시대에 적절한 지적입니다.

 

성경의 인물들은 은혜를 받은 아멘 이후! 삶으로 그 아멘의 진실성을 인정받습니다. 베드로가 부름을 받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너는 어부는 어부되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다! 했을 때 베드로는 아멘~ 으로 응답합니다. 그걸로 땡! 인가요? 배와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나서는 아멘실천을 보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가 된 것입니다!

 

삭개오! 예수님께서 방문하자 너무 황송하고 고마워서 은혜를 받은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아멘! 아멘! 으로 받았을 것입니다. 그걸로 땡?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분배하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네 배로 갚겠다! 아멘실천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너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이르렀다, 너도 이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19:9)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은 아멘! 신앙이 아니라 아멘신앙을 아멘행동으로 이어갈 때 임합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대단한 두 권의 책을 썼습니다.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교리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는 교리서이면서 생활지침서입니다.

 

로마서는 1~11장까지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 12장부터 16장까지는 구원을 얻는 자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생활을 전합니다. 즉 전반부는 아멘신앙이고 후반부는 아멘행동입니다.

 

갈라디아서 역시 1~4장까지는 교리서로 율법의 한계를 말하고, 5-6장은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행동지침을 말합니다. 로마서처럼 전반부는 아멘신앙이고 후반부는 아멘행동입니다.

 

우리가 이런 면에서 많이 약합니다. 이걸 바로 세우지 못하고 여러분을 세상에서 아멘행동으로 바르게 사는 일은 돕지 못하고 교회부흥 수단으로만 사용했으니 한국교회 목회자들의 욕심이 큰 것입니다. 목회자들의 이런 성찰과 반성만이 한국교회의 신뢰성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론

아멘 이후가 중요하다! 설교 때에 아멘! 아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멘! 한 만큼 그 고백에 책임을 지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그건 설교자에게는 더욱 무거운 짐입니다.

 

설교자는 강단설교로 여러분에게 은혜로 들어오게 하고 아멘~ 아멘! 을 끌어내야 합니다. 설교를 마치고 나면 강단 아래의 생활설교로 여러분에게 아멘! 을 끌어내야 합니다. 그래야 여러분들도 듣는 것만 아니라 보는 설교를 통해 아멘!을 고백하고 아멘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아멘신앙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를 하고나면 늘 미안하고 부끄럽습니다. 설교 내용처럼 그렇게 살지 못하면서 그렇게 살라고 설교하는 그 마음이 얼마나 무겁겠어요?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런 설교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은혜를 보이시고 축복의 통로로 삼으시니 얼마나 좋으신 아버지이십니까? 그런 아버지에게 아멘으로 화답하고 아멘 행동으로 영광을 올리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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